영상제 폐막일인 25일,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광화문 미디액트의 대강당은 시민감독들이 뿜어내는 발랄하고 신선한 영상에너지들로 가득했다.
마침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인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가 상영된 후 감독과의 대화가 열리고 있었다. 제작, 감독, 주연까지 직접 1인 3역을 해낸 시각장애인 임덕윤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를 본 관객 한 분이라도 시각장애인을 도울 때 꼭 인기척을 하고 도움을 주게 된다면 나는 바랄 게 없다. 한국인들이 정이 많아 그런지 (시각장애인을 보면)일단 붙잡고 본다(웃음).” 장애인을 도우려고 붙잡는 손길을 뱀으로 형상화한 영화 속 한 장면을 말하는 것이다. 도우려 내민 손길이 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오히려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단다. 그는 행사 장소나 리플렛 등에도 장애인 접근성을 좀 더 높였으면 하는 따끔한 지적까지 보탰다.
이어서 원주에서 올라온 여고생 감독들의 재기발랄한 영화 ‘날아라 병아리’와 ‘비비디바비데부’가 상영됐다. 이 당찬 여고생 감독들은 초등학교 조기교육 열풍을 따끔하게 비판하고, 도농 간의 격차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번 영화제 일반부문에서 작품상을 받은 ‘오늘도 난, 외출한다’의 수민 감독은 대구의 여성영상상영공동체 핀다[Find_A]에서 활동하는 여성감독이다. 장애여성의 독립생활을 다룬 이 영화는 결혼은 안 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싶은 장애여성의 고민을 담고 있다. 그녀는 상영소감을 담담하게 말했다. “다양한 정체성과 삶을 가진 여성들을 만나고, 그 얘기를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영상의 힘이 있는 것 같다. 오늘 같은 자리도 마련 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여러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영상의 힘, 다양성, 소통. 퍼블릭액세스의 정신을 표현한 말들이다. ‘영상의 힘’은 비단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88만원 세대의 고민과 넋두리, 그리고 희망까지 자신의 얘기를 솔직하게 담아낸 ‘내 청춘을 돌려다오’로 이번 영상제의 대상을 수상한 김은민 감독은, “다큐를 찍으며 암울한 88만원 세대였던 내 자신이 능동적으로 되가는 것을 느꼈다.”는 말로 영상의 힘을 표현했다. 카메라를 든 그녀는 더 이상 무기력한 88만원 세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경험이 그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고 한다.
시민영상제인만큼 작품을 출품한 감독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공동대상을 수상한 ‘휴대폰을 지켜라’의 황예지 감독은 부산에 사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다. 어린이 및 청소년 부문에는 고등학교 영상반, 예술고 학생들, 카메라로 놀기 좋아하는 일반 학생들까지 다양한 학생감독들의 작품이 상영되었다.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체스’의 김수랑 감독은 7전 8기 끝에 영화제 수상의 꿈을 이룬 감동으로 눈물을 흘렸다. 일반계 고등학교의 영상반 출신도 아닌 그는, 친구들과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좌충우돌했던 눈물겨운 노력담으로 좌중을 웃겼다. 일반부문에는 장애인, 88만원 세대, 영화전공자, 방송사 PD지망생, 50대 회사원 등 다양한 시민감독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출품했다. ‘화씨 2008’을 만들어 일반부문 작품상을 수상한 감독 3명은 영화제작학교에서 만난 사이다. 이들은 촛불집회라는 공동의 주제로 각 세대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말하고 싶어 카메라를 들었다고 한다. 감독 3명 역시 청년층과 장년층으로 세대 간 의기투합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번 영상제의 특징에 대해 물으니, 이희완 영화제 사무국장은 “총 110여 편이 출품되어 32편이 상영되었는데, 청소년 부문은 드라마가 압도적으로 많고, 일반부문은 다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한다. 청소년들은 상상력에, 어른들은 비판과 성찰에 주력한 흔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청소년 감독들의 영화를 보니 세계최고 수준의 억압을 뚫고 이런 상상력을 ‘끝내’ 유지하고 있는 우리 청소년들이 그저 대견할 따름이다.
발랄한 청소녀의 나레이션이 돋보였던 ‘촛불은 미래다’의 대사 한 마디가 떠오른다. “내 생애 최고의 동문서답이다. 아 놔~, 공부해야는데 헌법 1조까지 다시 알려줘야 하나!”. 그 많은 촛불은 다 어디서 샀냐는 이명박 대통령의 의문에 대한 청소년 버전의 답이다.
영화평론가인 염찬희 집행위원장은 “일반 부문이 촛불이나, 88만원 세대 등 현실의 문제에 천착한 다소 모범생의 모습이라면, 청소년 부문은 자신들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에 대해 자유롭고 재기발랄한 상상력들을 발휘한 점이 눈에 띄었다”고 했다. 시민영상제인만큼 영화적으로 매끄럽게 잘 빠진 영화보다는, 조금 거칠더라도 날것 그대로의 문제의식을 잘 담아낸 흔적들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한다. 다른 전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들이 오히려 수상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퍼블릭액세스의 정신이기도 하다.
시민 사회자의 유쾌한 사회로 이틀 동안 열린 영상제는 막을 내렸다. 어느 덧 10회를 바라보고 있는 영상제를 둘러보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 영상제의 슬로건에는 이 행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2001년 제 1회 퍼블릭액세스 시민영상제의 슬로건은 ‘시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였다. 2회 때는‘시민이여 캠코더를 들어라’, 3회는 ‘캠코더로 세상을 말하자’. 4회 ‘캠코더로 상상력을 높여라’, 5회 ‘캠코더로 세상을 바꾸자’까지, 초반 이 행사는 다소 선동적이고 계몽적인 슬로건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중반을 넘기면서 퍼블릭액세스는 ‘다양함’과 ‘소통’, ‘상상력’등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자고 소리 높이지 않아도, 이미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성찰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양한 삶을 긍정하는 영상의 힘을 알아챘는가 보다. 이번 영상제에 영화를 출품한 어느 감독이 말하길“나 하나가 바뀌는 게 세상이 바뀌는 시작인 것 같다”고 한다.
바로 그거다. 기특한 카메라의 발칙한 상상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고, 나를 바꾸고, 결국 세상을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 퍼블릭액세스는 그런 이들의 상상력을 모아 내고, 펼쳐 주고, 함께 나누는 진정한 소통의 장이다.
이 꽉 막힌 불통의 시대에 열린 소중한 시민의 행사. 내년에 열릴 제10회 퍼블릭액세스는 또 어떤 소통의 공간이 될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