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엔자의 세계적 대유행에 대한 우려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03년 아시아에서 발병한 조류 독감(Avian Influenza, AI)이 해마다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면서,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하여 관련 전문가들은 이 질병의 대유행을 예고했다. 또한, WHO는 미국의 ‘질병 통제·예방 센터(U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cention)’에서 개발한 ‘플루에이드(FluAid)’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보급하여, 국가별로 대유행에 따른 피해를 추계하고 예방 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이에 2006년 4월 국내에서도 질병관리본부 전염병관리팀장의 명의로 신종 인플루엔자 대유행에 대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당시 WHO의 전염병 경보수준은 3단계로 ‘인간 감염은 거의 없으나, 현저한 동물 감염’이 일어난다고 보는 상황이었다. 보고서는 신종 플루의 대유행 상황이 도래할 경우 국내에서는 총 인구의 19%가 병원 외래 진료를 받게 되고, 0.4%가 입원하며, 0.08%가 사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 계획으로 △인체 감염 예방을 위한 홍보를 강화 △항바이러스제 비축을 지속적으로 추진 △백신 및 항바이러스제의 국내 생산시설 및 자체 개발 기술을 확보 △검역 및 격리 병상 시설·장비 확충 등을 제안하였다.
특히, 항바이러스제 비축에 대해서는 유행의 전파 속도를 늦출 수 있으며, 조기 치료에 사용할 경우 입원 환자의 발생을 줄일 수 있는 방안으로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항바이러스제, 그 중에서도 ‘타미플루(Tamiflu)’의 세계적 독점 생산으로 인한 생산 능력의 절대 부족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고, 이로 인해 부족한 치료제의 우선 배분 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다. 또한, 보고서는 “필요할 때 약을 구할 수 없으면 그림의 떡”이라고 표현하며, 대유행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어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e) 요구가 비등한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타미플루를 독점 생산하고 있는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회사 로슈는 2005년 10월 13일 타미플루에 대한 특허를 제3자가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후 2006년 8월 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는 『신종인플루엔자 대비·대응계획』이라는 문서를 발간한다. 대유행에 대한 정부의 대비계획을 보다 상세하게 정리해 놓은 이 문서는 정부가 사전에 준비해야 할 사항과 대유행 위기 단계별로 취해야 할 조치를 설명하고 있다.
두 보고서에서 예측한 대유행은 3년이 지난 2009년에 이르러 현실이 되었다. WHO는 지난 6월 11월 신종인플루엔자 ‘세계적 대유행(pandemic)’을 선언하고 전염병 경보수준을 최고단계인 ‘6단계’로 격상시켰다. 2009년 2월 멕시코의 베라크루스 주(州) 라 글로리아 지역에서 집단적인 감기 및 발열 증상이 발생한 이후 4달 만에 이뤄진 조치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3년 전에 세운 대응 계획은 WHO의 대유행 선포 이후 어느 하나 제대로 지켜진 것이 없다. 오직 불길했던 전망만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을 뿐이다.
예상된 '재해', 막지 못한 ‘인재’
▲ 보건복지가족부 홈페이지 |
질병관리본부가 전염병 대책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국가 지정 격리 병상을 갖춘 5개 병원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확산이 본격화된 8월부터 바로 한계를 드러냈다. 8월 21일 이뤄진 지역별 거점 병원 지정은 사실 상 공공의료체계가 대유행 상황에 대한 대응 능력을 상실했음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다. 그마저도 정부의 준비 미흡으로 해당 병원 및 약국들의 반발을 샀고, 서울대 병원이 정부의 요청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환자들이 병원 밖에 차려진 텐트에서 치료를 받는가 하며, 병원에서 신종 플루에 감염된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다. 때문에 거점 병원을 발표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현재, 거점 병원 체제의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다. 또한, 신종 플루 진단을 받기 위한 검사비가 20만원 가까이 되면서, 신종 플루 의심 증상이 나타나도 선뜻 병원에 가지 못한다는 비난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치료 받기 힘들다.”라는 불만을 “약을 먹지 못할 수도 있다.”라는 공포감으로 만든 당사자 또한 정부이다. 초미의 관심사가 된 항바이러스제의 국내 비축 분량은 신종 플루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한 지난 8월 말에도 WHO의 권고량인 ‘인구의 20%가 복용할 수 있는 분량’에 한창 못 미친 190만 명 분, 즉 인구의 4%만이 복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비축 분량에 대한 정부 발표 역시 매일 매일 그 수치가 바뀌었다. 예상되는 비축 분량이 변화될 때마다 치료 지침 또한 바뀌었다. 지난 8월 21일 정부가 예방적 목적으로 항바이러스제를 사용하는 것을 대폭 제한하였다가, 9월 초 다시 그 사용 범위를 넓힌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백신 역시 질병관리본부장이 지난 8월 24일 외국 제약회사를 직접 방문하여 제약회사가 부르는 값에 따라 가까스로 최소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연말에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백신 공급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제한된 공급량 때문에 백신 접종 우선순위를 정하는 문제를 두고 벌써부터 정부부처 간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갈팡질팡하는 정부를 보면서 국민들은 결국 각자의 개인적인 예방 노력만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여길 뿐이다. 질병의 대유행 상황에서 한 사회의 공공의료체계가 이처럼 유명무실해졌을 때, 국민들이 갖는 ‘지나친 공포심’을 “근거 없다”며 탓할 자격이 과연 정부에게 있는가?
한 사회의 공중보건은 사회적 노력(security)과 개인적 노력(safety)에 모두 의존한다. 사회가 개인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수 없다는 불신이 팽배할 때, 혹은 사회의 안전 보장 시스템에 결함이 있을 때,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개인의 노력이 과도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과도한 노력이 공포(panic), 즉 ‘포비아(phobia)’를 낳는다. 포비아는 질병에 대한 부당한 왜곡과 사회적 편견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분명 우려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포비아 현상의 이면에 있는 ‘시스템의 부재’라는 본질을 외면한다면, 포비아에 대한 우려 자체가 또 다른 우려거리일 뿐이다. 질병에 대한 포비아의 대명사인 ‘에이즈 포비아’가 ‘치료’보다는 ‘통제’에 초점을 맞춘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의 의료 정책과 떼려야 뗄 수 없듯이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국민들의 공포를 덜어주는 존재는 정부가 아닌 시장이다. 방역 마스크와 손 세정제는 8월 중순 경에 국내 시장에서 동이 났는가 하면, 신종 플루와 관련된 각종 보험 상품들과 신종 플루를 예방한다는 온갖 식품 광고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질병의 대유행 상황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신속하고 중요한 해결책인 ‘치료제의 확보’는 시장조차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다.
신종 플루 포비아에 대한 가장 큰 염려를 쏟아내는 곳이 다름 아닌 정부라는 사실은 결국 이러한 ‘시스템의 부재’ 현상이 은폐되고 있음을 방증할 뿐이다. 질병관리본부는 국민행동요령을 발표하며, 온 국민들이 열심히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만 신종 플루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스템의 부재 상황에서 손을 자주 씻거나,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고 해서 질병으로부터 안전해 질 수는 없다. 또한, 이처럼 개인의 노력과 책임만을 강조될 때, 질병은 자신의 건강을 챙길 능력이 없는 사람들만을 공격한다. 즉, 질병이 가난한 사람만을 공격하고 부유한 사람을 피해가는 ‘질병의 부익빈(富益貧)빈익부(貧益富)’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신종 플루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는 신종 플루 바이러스의 존재 때문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할 의무를 가진 정부가 이를 예방하고 치료할 대책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때문에 정부는 자신들의 대책이 정당하고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소연만 늘여놓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 정당하고, 무슨 근거로 충분한 지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줘야 한다. 그래야만 대통령과 복지부 장관이 그토록 우려하는 ‘근거 없는 공포’가 해소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정부가 우선적으로 우려해야할 대상은 신종 플루도 포비아도 아닌 무책임한 정부 그 자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