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글이었던가.
시를 잊고 산지 참 오래다. 재작년 겨울 목 디스크가 왔다. 빨리 수술을 하라는 의사들의 말을 뒤로 하고, 내설악 만해마을로 내딴엔 긴 여행을 떠났다. 3개월 동안 처박혀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온통 세상이 하얀 눈밭이었다. 인적이 드문 먼 산까지 올라가 얼음을 깨고 계곡물을 받아 마시곤 했다. 그리운 것들이 많았다. 그 기간 동안 밀린 숙제로 네루다 평전을 쓰기 시작했다. 거의 연애하는 심정이었다. 그가 내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고 느낀 때부터 미친 듯이 쓰기 시작했다. 바깥일들을 잊기 위해 썼다고 해도 될 것이다. 보름동안 1000매가 써졌다.
서울로 내려와 마지막 교정을 봐서 출판사로 넘기려고 했다. 그 사이 잠깐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만났다. 3년여 잠깐씩 연대하며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들이 싸움 1000일을 곧 맞는다고 했다. 안타까웠다. 그들의 1000일은 이 사회 89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망의 1000일이었다. 월 급여는 법정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1,850원, 3개월, 6개월짜리 노예계약, 상여금 0%의 파견직 노동자들이 1000일이 가까워 오도록 노숙농성을 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을까. 기륭전자 여성비정규직의 1000일은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움과 자성의 1000일이어야 했다.
잠깐 돕겠다고 들어간 일이 1년여 지속되었다. 두 번의 고공농성, 94일에 이르는 집단단식, 미국 원정투쟁, 마지막 망루 투쟁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나 역시 두 번 국회의사당 내 한나라당 원내대표실 점거를 들어가야 하기도 했다. 과정에 두 번 유치장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기륭전자 문제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을 것이라는 생각에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꾸리기도 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 역시 당시 500여일을 빈 공장에서 맞고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공장에서 양계장의 닭처럼 일하며 그들은 세계 기타 시장 점유율 1/3에 이르는 기타를 낳았다. 빼빠질로 지문이 없어지고, 거개가 유기용제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30여년 동안 이들과 기타와 노래를 사랑하는 세계인들의 삶을 착취해 박영호 회장은 물경 1000억대의 자산가가 되었지만,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박영호 회장은 더 값싼 노예를 찾아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영혼이 없는 기타, 착취받는 기타로는 노래할 수 없다고, 우리는 동료 예술인들과 사회에 호소했다.
정말이지 올해 초에는 다시 도망가고 싶었다. 네루다 평전도 정리해서 내고,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다시 책을 읽고, 쓰고 싶었다. 차분하게 삶과 사회에 대해 돌이켜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세상을 읽는 일보다 나를 다시 읽어보고 싶었다. 자성하며 그리운 것들을 소중하게 갈무리하고, 다시 조금은 더 외롭고 싶었다.
하지만 이 개떡 같은 사회는, 이 빌어먹을 세상은 내게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1월 20일,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람들을 죽였다. 용산에서 였다. 이 평지에서는 갈 곳이 없어 저 하늘에 답답한 망루를 지어 오른 사람들이었다. 제발 우리의 절박하고 참혹한 얘기를 들어달라고 올라간 사람들이었다.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공권력 진압이었다. 어차피 쓰레기 같은 인생들이니 죽여도 괜찮다는 허가였다. 12시간만에 유족들을 따돌리고 강제 부검이 이루어졌다. 호들갑은 금세 잠잠해질 거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죽음이 일상이 되어 있는 사회다보니 누구도 타인의 죽음에 대해 크게 애통해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용산 참사 현장을 쫓아다닌 지 오늘로 140일째, 결국 네루다 평전은 지금도 고이 컴퓨터 한 폴더에서 한가롭게 잠자고 있다. 난 한 번도 그를 깨워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쉽지 않다. 네루다도 한때는 시를 버리고 참사의 현장을 쫓아 다녔다. <스무개의 사랑노래와 하나의 이별노래>라는 연애시집으로 유명했던 네루다가 세계적인 민중시인이 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겪으면서부터다.
나는 잠시 멈추고 현대 문학에서는 금지되었지만 인류의 염원에 깊이 뿌리내리고 인본주의로 향한 길을 찾기로 했다. 시가 핍박받고 소외된 다수를 향해 힘과 다정함과 기쁨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시는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노래하지는 못할 거다.
당시 스페인은 오늘 세계의 모습과 어쩌면 닮아 있다. 스페인은 세계의 미래와 과거가 맞붙은 힘의 대결장이었다. 스페인 내전은 1929년 미국의 대공황 이후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한 착취로 만회하려는 자들과 좀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간의 대리전이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즉각 왕당파인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고 나섰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중립이라는 얼빠진 자리에 가 서있었다.
왕정과 세속화된 교회와 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공화파들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무려 100만 명이 이 내전으로 죽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소녀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농부가, 어부가, 목수가, 대장장이가, 그들의 아내들이 죽어갔다. 그러고도 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조국을 등져야 했다.
당시 네루다는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칠레영사였다. 그의 스페인 친구들은 열렬한 공화파들이었다. 파쇼에 맞선 투쟁에서 그가 ‘스페인의 가슴’이라고 칭했던 로르까도 죽고, ‘스페인의 얼굴’이라 했던 염소지기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도 총을 잡고 죽어 갔다. 참을 수 없었던 네루다는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옹호한다>라는 잡지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랭스턴 휴즈와 영국의 W.H.오든, 아일랜드의 예이츠, 훗날 모두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와 스웨덴의 셀마 라게를뢰프, 사무엘 바케트 등이 함께 했다.
공화파에게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 세계의 지성들과 양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 50여 개국에서 스페인의 공화정을 지키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에 저항하려는 전 세계 젊은이들이 스페인으로 몰려들었다. 그건 위대한 일이었다. 4만 여명의 세계 젊은이들이 인류의 도덕과 양심을 지키는 총을 들기 위해 달려왔다. 2만 여명의 세계인들이 의료와 보육과 병참 지원을 위해 달려 왔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작가 헤밍웨이가 총을 들고 싸웠던 곳이 여기였다. <1984년>으로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조지 오웰이 총을 들었던 곳이 여기였다. <인간의 조건>을 쓴 세기의 지성 앙드레 말로가 총을 들었던 곳이 여기였다. 피카소가 그의 대표작 <게르니카의 학살>을 그린 곳이 여기였다. 이반 요리스의 다큐영화 <스페인의 대지>에는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넣었다. 존 코포드와 랠리 폭스가 죽어간 곳도 여기였다.
네루다는 스페인에서 확실하게 <스무개의 사랑노래와 하나의 이별노래>, 그리고 이어진 시집 <지상의 거처> 시절 내내 드리워져 있던 우울의 장막을 벗어났다. 스페인은, 그리고 거기에서 죽어가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은, 그를 고뇌에 찬 자기만의 방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슴 속의 스페인>은 그렇게 쓰여졌다. 양심과 정의가 거리에서 피 흘릴 때 중립이란 사실은 학살자의 편에 선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이제 시는 평화의 행동이었다. 평화는 시인에게 빵을 만들 때 밀가루가 필요한 것과 같았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네루다가 살던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만큼은 아니지만, 2009년 용산에도 그런 바보스런 문화예술인들의 연대가 있었다. 그간 문화예술인들은 용산 학살의 진상을 규탄하고 규명하기 위해 적잖은 일들을 해왔다. 용산 참사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많은 진혼무들을 행했다. 1937년 스페인에서 이반 요리스가 다큐 <스페인의 대지>를 만들 때, 피카소가 홍보 포스터를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넣듯, 아직 이름없는 작가인 장호경이 다큐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들 때, 만화가 신성식이 삽화를 그렸다. 네루다와 그의 친구들이 급히 <세계의 시인들은 스페인 민중을 옹호한다>를 내듯, 15명의 르뽀작가들이 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여기 사람이 있다>를 판화가 이윤엽의 작품을 표지에 새겨 냈다.
미술인들은 25년, 30년 넘게 한 가족의 희망이었다가 지금은 버려져 헐릴 처지에 있는 포장마차를 기억과 추모의 예술포장마차로 꾸며냈다. 전국순회 미술전 ‘망루전’과 더불어 고 이상림 열사가 운영하던 레아 호프 1층에서 ‘끝나지 않은 미술제’를 개인전 형식으로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대추리에서부터 한미FTA와 기륭전자를 지나 오늘 용산에서 이름없이 함께 하고 있는 그들 전진경, 나규환, 이윤정, 정윤희, 김재석, 김기호, 김천일, 배인석 등 그 아름다운 이름들을 나는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 1층에는 조약골과 허경, 김도형과 그의 친구들이 2층에 있는 <촛불방송국>과 함께 <언론재개발 행동하는 라디오>라는 대안미디어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의 자율과 활력은 아스팔트에서도 꽃이 피어오르게 할 것 같다. 연극인들은 매주 금요일 ‘끝나지 않는 연극제’를 열고 있다. 제주도 <한라산>, 대구의 <함께 사는 세상>, 청주의 <예술공장 두레>, 경북 청송의 <나무닭움직임연구소>, <한두레> 등이 다녀갔다. 문학인들 역시 매주 금요일 자신들의 책을 들고 나와 연대를 위한 무료 사인회를 진행하고 있다. 대중음악인인 김승환, 이상은 등이 늘 든든한 문화연대 벗들과 함께 용산참사 추모음악제를 열어주기도 했다. 시사만화가들이 ‘용산, 가자전’을 보태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진가 노순택 등이 사진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모든 이들이 내일(6월 10일) 용산 참사 140일, 거덜나버린 6.10항쟁 22돌을 맞아 용산 참사 현장에서 추모와 규탄의 현장 문화제를 갖기로 했다. 통한의 140일에 맞춰 각자 1가지씩 140가지의 문화행동을 준비하자 했는데 이미 190여개로 늘어나 버렸다. 시인들은 벽시를, 소설가들과 평론가들과 동화작가들과 영화인들은 벽글을, 미술가들은 벽화와 추모그림들을, 사진가들은 사진관과 슬라이드 작품들을, 연극인들과 음악인들과 춤꾼들과 풍물패들은 공연을 준비키로 했다. 참여 인원으로 보면 300여명이 넘는다.
작은 자리인 듯 하지만 쉽지 않은 자리였다. 하나의 사안을 가지고 하나의 장소에, 한 가지씩의 예술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함께 한 경우는 처음일 것이다. 형식적인 기념의 6.10을 넘어 다시 올 새로운 6.10이 어떤 장소, 어떤 사건, 어떤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우린 그곳이 용산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구의 시신이 140일째 갇혀 있는 순천향병원 냉동고를 열지 못한다면 어떤 민주주의도 가능치 않다고 생각했다.
1937년 7월 파리로 피신했던 네루다는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과 함께 글과 서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세계적인 예술가들에게 내전 중인 스페인 마드리드 한복판에서 반파시스트 작가 총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어떤 기차도 그렇게 많은 작가들을 싣고 파리를 떠나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온 200여 명의 작가들이 스페인과 세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확고한 평화와 평등의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고 공화파가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법정, 진실의 법정에서만큼은 그들 이 승리해 왔다고 믿는다.
그렇게 다시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아 2009년 6월 10일,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불안한 시대의 열차들을 타고 네루다처럼, 엘뤼아르처럼, 피카소처럼, 쇼스타코비치처럼, 이반요리스처럼 위대하지는 못하지만 양심을 버리지 않고 살려는 소중한 문화예술인들 300여명이 용산을 향해 길을 나선다. 더 많은 이들이 용산을 함께 지켜야 한다는. 우리 시대를 함께 지켜내야 한다는 소망을 담아 나선다. 그날, 그 길에 더 많은 예술가들, 양심들이 함께 해주기를 바래본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 용산에서 무자비한 공권력 진압 과정에서 5명의 철거민들이 학살당했다. 독재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쓰레기 몇을 치웠을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고 끌려가며 외쳤다. 다섯 달이 다 되도록 시신들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자신들 역시 그 냉동고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고, 그 진실은 곧 밝혀졌다. 아직 심장이 살아 있고, 머리가 채 굳지 않았던 예술인들도 그 길에 함께 했다.
“당신들은 물을 것이다 - 라일락은 어디에 있냐고
양귀비꽃으로 치장한 형이상학과
구멍들과 새들로
가득 찬 언어는
끊임없이 두들겨 패는 비는 어디에 있냐고
모든 것들이
저마다 커다랗게 외쳐대고 있었다 사고 팔리는 소금이 있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빵이 노적처럼 쌓여 있고
그리고 숟가락에서는 기름이 흐르고
거리에는 활기에 넘치는 손과 발의 깊은 율동이 있었다
또한 거기에는 자질구레한 생활의 척도
미터와 리터가 있고
겹겹으로 쌓아올린 생선들이 있고
지붕의 구조 위에는 차가운 태양에 지쳐 빠진 첨탑이 있고
상아와 같이 하얗게 타오르는 감자와
토마토가 바다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이 모든 것에 불이 붙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반지를 낀 공작부인들을 태운 악당들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검은 성직자들을 태운 악당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살해했다
거리에는 온통 어린 아이들의 피로 넘쳐 흘렀다
아이들의 피처럼 천진난만하게
오 승냥이도 경멸해 마지않을 승냥이들아
목이 타는 엉겅퀴까지도 침을 뱉을 돌멩이들아
살모사까지도 혐오해 마지않을 살모사들아
그래도 당신들은 물을 것인가 - 왜 나의 시는
꿈에 관해서 나뭇잎에 관해서 노래하지 않느냐고
내 조국의 위대한 화산에 관해서 노래하지 않느냐고
와서 보라 거리의 피를
와서 보라
거리에 흐르는 피를
와서 보라 피를
거리에 흐르는!”
- 네루다, <그 이유를 말해주지> 중에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140인 예술행동"
용산 참사 140일 해결 촉구 및 6.10 항쟁 22주년 현장 문화제
■ 일시 및 장소
- 일시 : 2009년 6월 10일(수) 낮 1시부터 늦은 11시까지
- 장소 : 용산 참사 현장 (4호선 신용산역 2번 출구)
■ 주요 프로그램
- 낮 1시 : 용산 참사 해결 촉구 문화예술인 시국선언 및 기자회견
- 낮 2시부터 늦은 7시까지 : 190인의 예술행동
- 늦은 7시부터 늦은 11시까지 : 문화예술인 추모 문화제
■ 140인의 예술행동 주요 프로그램
- 공연 : 음악, 연극, 마당극, 춤, 풍물 등
- 만화 : 캐리커처 그리기, 벽화, 전시 등
- 문학 /영화 등 : 벽시, 벽글 쓰기, 시낭송 등
- 미술 : 벽화, 설치, 퍼포먼스, 공예, 공공미술, 전시 등
- 사진 : 마을사진관, 현장 사진전, 슬라이드쇼 등
- 참여프로그램 : 드럼서클, 마을 텃밭 만들기, 생활창작 워크샵 등
- 기타 : 라디오방송, 영상물 상영 등
■ 참여작가 리스트(무순)
[음악] 엄광현 김정은 고동주 길바닥평화행동 한낱 조약골 이정훈 시와 지민주 노래공장 덥 밴드오삼 테히언 룩앤리슨 미쓰홍당무 아름다운청년 이수진 김호철 별음자리표 [연극] 극단‘함께 사는 세상’ 극단‘제비꽃’ 극단‘숨은 그림’ 극단‘꾼’ [춤] 김미선 서정숙 이삼헌 박찬희 민족춤패‘출’ [풍물] 터울림 풍물굿패‘삶터’ [미술]
김성건 성효숙 김재석 정윤희 이영학 김종도 전미영 배인석 김기호 전진경 나규환 김천일 이윤엽 그라죠 정세학 찬타 이윤정 김미혜 불가 이철재 김윤기 박건웅 신유아 박도영 최용신 신문자 이슬 최루시아 허수연 표명선 김영등 [만화] 이동수 정재훈 신성식 김성희 김현숙 허선희 배영미 강우근 우리만화연대 전국시사만화가협회 [사진] 김홍지 노순택 박선주 양혜리 양희석 오은진 이재각 임태훈 정택용 조재무 주용성 한금선 이윤선 조광현 최지현 윤경진 이윤영 이애리 유여경 권민호 곽대현 [문학] 염무웅 공선옥 최창근 강기희 박수정 송경동 고명철 고영민 공광규 오도엽 김근 김미월 이재웅 김사이 김서령 김해자 안재성 홍일선 이승철 손세실리아 오철수 오철수 김별아 백가흠 김이구 김혜원 김일영 김정환 김종광 김주대 김형수 문동만 박수연 박형준 박후기 정우영 손택수 송기역 김자흔 표광소 전기철 서수찬 맹문재 박재연 신현수 황인숙 김성규 박민규 유채림 홍새라 안이희옥 황규관 김해원 양지안 공진하 박서영 [퍼포먼스] 드럼서클 김승현 조약골 비광청 나해석 카라 다꽝 날래 수수 [참여 프로그램] 서미원 쑨 노지호 서희정 김순영 우리만화연대 [영상] 장호경 태준식 용산미디어팀 조동원 [평론] 임정희 이원재 [영화] 정지영 김경형 권칠인 권병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