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옥. 첫사랑처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아니 잊고 싶지 않은 이름이라 전화를 걸었는지 모른다.
기억하고 싶은 일보다는 잊고 싶은 일이 더 많다. 하지만 잊으려 할수록 더욱 또렷이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잊히지 않는 사람. 잊을 수 없는 사람. 잊어서는 안 될 사람. 망각해서는 안 되는 역사가 있듯이.
이경옥. 만나면 뭐라 부르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경옥은 2007년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서 숱한 이의 기억에 자리 잡은 사람이다. 그해 7월,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다 질질 끌려 나갔던 그는 이랜드일반노조 부위원장이었다.
‘부위원장 이었다’라고 말하는 순간 왜 이리 가슴이 아린지 모르겠다. ‘이어야’ 하는데 ‘이지’ 못하고,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니 가슴이 아리다 못해 찢기는 것 같다.
▲ 2007년 이랜드일반노조 홈에버 상암점 점거농성/ 참세상 자료사진 |
이경옥은 ‘디아스포라’다. 온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처럼, 고향을 떠나 흩어져 떠돌며 살아야하는 사람처럼, 이경옥은 ‘노동자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까르푸가 이랜드에 넘어가면서 홈에버 노동자가 되었던 이경옥은 홈에버가 홈플러스에 매각되면서 이랜드 노동자도 홈플러스 노동자도 될 수 없게 되었다. 해고노동자지만 복직 싸움을 할 수 없고, 홈플러스 조합원이지만 법적으로 조합원이라 불릴 수도 없다.
그 기막힌 사연을 들으려고 이경옥에게 전화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잊고 싶지 않아서 만나는 거다. 이경옥의 얼굴을, 이경옥의 이름을, 그리고 이경옥이 디아스포라가 되기 전까지 한 노동자로, 한 노동조합의 간부로 살았던 소중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궂은날 그를 만나러 나섰다.
이경옥을 만나자 비가 쏟아졌다. 서둘러 구로동의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건물 로비에 조용히 앉아 이야기 할 휴게실이 있다. 이경옥은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오는 길이란다. 이랜드에서 징계해고를 받아 실업급여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홈플러스와 협상이 타결되면서 권고사직으로 사유가 변경되어 신청 자격이 생겼단다.
마주 앉았지만 딱히 물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불쑥 튀어나온 말이 “홈플러스와 협상이 타결되었을 때 마음이 어땠어요?” 다.
파업 지도부의 ‘아름다운 희생’이었다고 말들을 했다. 핵심 지도부가 복직을 포기한 조건으로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복직시켰기에. 간부라는 직책을 빼면 이들도 한 집안의 가장이고, 하루하루 빠지지 않고 일해야 한 달을 먹고 살 수 있는 처지다. 자식들 학비도 챙겨야 하고, 아픈 이의 병원비도 챙겨야 한다. ‘아름다운’이라는 말보다는 이들이 감내해야 할 ‘희생’에 내 마음은 멈춰 있었다.
“홈플러스와 타결되었을 때 진짜 너무너무 좋았어요. 타결을 해서 조합원이 현장에 돌아갈 수 있어서……, (간부들이 한) 약속을 사실로 확인시켜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내 마음이라도 읽기라도 한 듯 이경옥은 타결이 되어 ‘너무너무 좋았다’고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이내 이경옥의 눈은 촉촉이 젖으며 충혈이 된다.
“너무 좋았죠.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맞댔던 조합원을 보지 못하면서, 오백 날을 울며불며 부둥켰던 조합원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니까……, 타결하고 한 일주일 정도는 거의 공황상태였어요. 조합원을 보지 못하니까……. 글도 쓰고 이러면서 뭔가 정리하고 새롭게 하고 그러고 싶었는데, 앉아 있으면 울고 이랬어요.”
동료들이 기쁘게 현장으로 복귀하는 모습에 너무너무 좋았지만 집에 홀로 남았을 때 쏟아지는 눈물은 참을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듯하였을까? 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을까?
▲ 2007년 7월 20일 홈에버 상암점에서 연행되고 있는 이경옥 전 이랜드일반노조 부위원장/ 참세상 자료사진 |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볼펜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이경옥이 말을 잇는다.
“타결하면서도 제일 아쉬웠던 것이, 우리가 복직을 포기하고 권고사직 받아들이면서, 하여튼 활동을 해야 할 현장이 없다는 거, 현장이 없으면서 어떤 활동이 가능할까, 어떻게 조합원을 만날까,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현장이 없다는 거, 현장이 없다, 아…….”
눈물을 지우려는 듯 이경옥은 미간에 힘을 주며 눈을 크게 뜨려고 애쓴다. 그 눈동자가 참 맑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해요. 아, 내가 활동할 곳이 꼭 내가 일하는 사업장만은 아니다.”
마치 흔들리는 마음을 되잡기라도 하듯, 눈물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오뚝이처럼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말한다. 그랬기에 ‘공황상태’에서 헤어났겠지. 씩씩하게 홀로 울었던 날을 이야기 하겠지.
요즘 이경옥은 바쁘다. 파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협상을 타결해야 한다는, 하루빨리 조합원들이 일터에 돌아가 신나게 일해야 한다는, 부담을 탈탈 털어버린 이경옥은 푸른 하늘을 날듯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느라 바쁘다.
“나름 바빠요. 상급단체였던 서비스연맹에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라는 말도 있고, 민주노총 서울본부 북부지구협의회에서 책임을 맡아서 일을 하자는 말도 있어요. 저녁에는 용산 참사 관련하여 집회도 가야 하고요.”
이경옥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입고 있는 똑같은 조끼를 여전히 입고 있다. 권고사직을 받아들였으니 조합원이 아니라고 법적 잣대를 들이대지만 그는 여전히 동료들이 일하고 있는 사업장의 조합원이다. 아니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이경옥에게 이제는 어떤 이름이 새겨진 조끼를 입더라도 어울릴지 모른다. 홈에버 노동자에서 영원한 노동자가 된 거다. 물론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새기고 살아야 하지만.(계속)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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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엽 작가는 구술기록작가로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의 구술기록작업을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소중한 목소리를 찾고 있습니다. 기록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야 될 일이 있는 분은 참세상이나 메일(odol@jinbo.net)로 연락을 하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