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전략회의는 24일 오후 3시30분 부터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진보좌파정치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나(1)’를 토론한다.
주된 토론 지점으로는 △민주노동당 분당의 의미와 진보신당 △사회주의노동자당준비모임의 행보 △진보좌파 이념의 재구성 △진보좌파운동의 혁신과 현재 요구되는 최소한의 ‘공동행동’ 등이다.
이날 토론에는 고민택 사회주의노동자당준비모임 활동가,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 김현우 진보신당 정책위원, 박영균 진보평론 편집위원, 박진희 진보정치포럼 대표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민중언론참세상’은 발표자의 견해를 미리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으며, 아래는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의 글이다. - [편집자 주]
들어가는 이야기
1. 민주노동당 분당의 의미와 진보신당에 대한 생각들
1-1. 분당의 원인에 대한 평가
민주노동당 분당의 정치적 책임은 일부 평등파 지도자들의 민주노동당 우경화 시도였다. 물론 다수파인 자주파의 패권주의도 문제의 중요한 일부였다. 그러나 평등파 지도자들의 민주노동당 우경화 시도의 핵심 지렛대였던 소위 ‘일심회’ 관련자 제명 기도 안건이 당시 상황을 압도한 나머지 자주파의 패권주의는 진지하게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분당의 직접적 계기였던 2008년 2월 3일 당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는 이른바 ‘일심회’ 관련자 제명 건을 혁신의 핵심으로 봤다. 당시 다함께는 국가 탄압에 반대해 민주주의 옹호라는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소위 ‘일심회’ 관련자 제명 기도에 반대했다. 64퍼센트의 대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는 자주파만이 아니라 자주파의 정파적 이해관계를 공유하지 않는 대의원 상당수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분당을 자주파와 평등파의 분열로 설명할 수는 없다. 심상정 비대위가 국가보안법에 의한 마녀사냥에 일관되게 반대하지 않고 굴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 분당은 평등파 지도자들의 우경적 이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는 세력들이 모두 좌파라는 뜻은 아니다. 심상정 비대위의 ‘일심회’ 관련자 제명 기도는 일련의 우경화 시도(‘운동권 정당’과 ‘민주노총당’ 청산 등으로 표현됐던)의 일환이었다. 심상정 비대위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환멸을 느끼지만 아직 민주노동당으로 오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민주노동당 자체를 오른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상당수 자주파 지도자들은, ‘일심회’ 관련자 제명에는 차마 동의할 수 없었지만, 심상정 비대위의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공유했다. 사실 자주파가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에 이미 그들 내에서 ‘운동권 정당’, ‘민주노총당’ 청산 주장들이 제기된 바 있다.
2004년 8월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과 그해 연말에 민주당의 배신으로 끝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이후,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으로 말미암은 대중적 환멸감, 운동만으로는 개혁을 강제해 내지 못한다는 좌절감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상승 곡선이 꺾이는 상황과 타협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일부 민주노총 간부들의 부패 스캔들과 투쟁 배신이 이런 압력에 힘을 보탰다.
이렇게 초기의 전진 국면보다 덜 호의적인 환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을 때, 민주노동당의 대응을 결정했던 것은 민주노동당 내에 유력한 정치, 즉 개혁주의였다. 이때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이 ― 평등파와 자주파 모두 ― 당 혁신의 화두로 삼았던 것이 바로 ‘운동권 정당’ 청산, 민주노총과 거리두기 등이었다.
요컨대, ‘일심회’ 관련자 제명 기도 건을 놓고 형성된 좌우 분열선이 나머지 쟁점에서까지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모두 본질적으로 개혁주의 정당이다. 노동계급의 변화 염원을 자본주의 체제 틀 속에서 반영하려 한다는 점에서, 개혁주의 정치인과 개혁주의 노조 지도자 간의 정치와 경제의 분업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두 당의 분리는 개혁과 혁명을 둘러싼 근본적 분리가 아니었다.
1-2. 진보신당의 재창당에 관한 평가
분당의 정치적 배경이 우경화였다고 해서 분당 이후 진보신당이 일관되게 민주노동당보다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두 당은 이데올로기와 실천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긴 했어도, 둘 다 대체로 좌파 개혁주의 자세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당 모두 촛불 항쟁을 헌신적으로 지지했고, 이명박식 경제 위기 해결책을 분명하게 반대했다.
특히, 진보신당은 지난해 촛불 항쟁에서 커다란 정치적 수혜를 입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진보신당이 열의 있게 그 운동에 참가한 덕분이었다. 역설적인 것은 ‘운동권 정당’ 이미지를 민주노동당 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던 사람들이 지도부로 있는 진보신당이 촛불 항쟁 덕택에 당세를 늘렸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반동화와 함께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시작됐다는 점 때문에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경제 불황 시기에는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문제가 핵심으로 제기될 것이고, 현실에서 이 문제는 대중 투쟁 중시 여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 진보신당이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도 있다. 예컨대, 지난해 10월 19일 정부의 은행 대외 채무 지급보증 조처 발표에 대해, 진보신당의 심상정 대표는 조건부 찬성을 했다. “금융 위기에 대한 국제적인 정책 공조의 측면에서 불가피한 점”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신당이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포기한 것도 유감이다. 민주노동당 강령에 사회주의를 포함시키고 2003년에는 그 사회주의 강령 삭제 시도에 맞서 방어했던 사람들이 진보신당에 많이 있는데도, 논쟁 끝에 그 당의 강령에 사회주의가 빠져 버렸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이상에 따라 하나의 공화국 형성”, “우리 모두를 위한 새로운 나라”, “모든 종류의 불평등과 차별 그리고 폭력을 지양하고 참된 만남 속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하는 공동체” 같은 다소 추상적인 문구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고 그들의 시스템이 실패작으로 드러난 상황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이런 추상적 문구들보다는 진보신당 지도자들이 과거에 옹호했던 ‘사회주의’가 훨씬 더 유용할 것이다. 그 ‘사회주의’가 실은 좌파 사회민주주의였을지라도 말이다.
이 대목에서 민주노동당의 일부 자주파 리더들이 사회주의 강령 삭제를 시도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공평할 것 같다. 사회주의 강령 삭제를 원하는 이들은 전통적 단계론에 따라 “자주적 민주정부”와 사회주의의 병존이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강령 삭제 발상에는 선거주의 압력도 작용한다. 선거에서 사회주의를 공공연히 밝히는 것은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강령 삭제는 개혁주의로 더한층 향하는 신호탄이자 명백한 후퇴라 할 수 있다. 또, 지배자들과 우파 언론들이 사회주의 주장을 소수 극좌파만의 것으로 치부하기가 더한층 용이해질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안팎의 좌파가 이런 후퇴 시도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전체 노동자 운동의 전진에 이바지하는 것일 것이다.
2.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의 행보에 대한 생각들
2-1. 성격, 건설 경로 등에 관한 평가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이하 준비모임)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아니고, 다른 사회주의 좌파에게 개방해 놓았다고는 하나 단일 정당 구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공동전선도 아니다. 일종의 ‘범좌파 정당’인 듯하다.
이것은 노동자의힘 출범 때부터 추구했던 목표이었지만,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가 이 과정을 자극한 것도 같다. 물론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이라는 사상은 좋은 것일 뿐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범좌파 정당’은 원칙, 강령, 전략 등을 둘러싼 좌파들의 정치적 이질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의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원칙, 강령, 전략 등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일한 정당 구조를 갖추는 것이 곧 그 내부에 존재하는 상이한 정치 경향들 간의 이질성을 자동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토론을 통해 얼마간 정치적 수렴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수렴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북한 체제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사노련과 북한 문제를 사실상 회피하고 차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노동자의힘이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원칙과 강령을 양보할 수 있겠는가.
또, 준비모임과 노동자진보정당 건설 전국추진위원회(노건추)가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전국공동토론회’를 한 차례 하기도 했다(노건추는 2월 말에 내부 이견으로 말미암아 해산했다). 그런데 준비모임 활동가들 중 상당수는 민주노동당을 개혁주의 정당일 뿐 아니라 노동자 당이 아니라고까지 비판해 왔다. 반면, 노건추의 주도 세력들은 대체로 지난해 2월 분당 전까지 민주노동당 구조에 머물러 있었다.
개혁주의에 대한 태도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준비모임이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에서 이해해 왔던 특정한 의미에 따른 혁명 정당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상이한 정치적 행보를 걸었던 두 세력이 통합을 모색한 근거는 아무래도 민주노동당 밖에서 그 당과는 차별적인 정당 건설이었던 것 같다. 민주노동당의 위기로 개혁주의 정당(“계급연합적 진보정당”)이 “역사적 수명을 다했”기 때문에 그 당 밖에서 사회주의 범좌파 당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지난해 분당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심각한 위기를 겪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개혁주의의 장송곡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객관적 사실을 봐도 민주노동당은 분당의 정치적 후유증으로부터 부분적으로 회복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노골적인 계급 정책에 대한 대중적 반발로 민주노동당의 지지도는 다시 상승했다. 물론 그 반대 상황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요컨대, 민주노동당의 운명을 단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개혁주의는 단순히 특정 조직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특정 개혁주의 정당과 결별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개혁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혁주의는 피착취 계급 구성원들이 자신들을 착취하는 사회 안에서 형성한 관념들이고, 그 관념들 중 많은 부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자신감이 없어 투쟁을 기성 체제의 틀 내로 제한하는 한 계속 유지된다. 이런 경향은 개혁주의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표현을 찾는다.
그러므로 대중이 자체의 경험과 혁명적 사상을 결합시켜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될 때에야 개혁주의와 완전히 결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변혁적 좌파는 개혁주의 정당과의 투쟁에 열의를 갖고 임해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여전히 개혁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있는 대중과 함께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다 ― 공동전선. 그 투쟁 속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출판물과 모임, 논쟁 등을 통해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기회들을 포착해야 한다. 이런 일을 거부하는 좌파는 우파에 반대하는 대중의 광범한 정서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봤을 때 옛 노동자의힘을 비롯한 좌파들이 NGO나 민주노동당 같은 개혁주의 세력과 체계적으로 협력하는 것, 즉 공동전선에 열의 있게 참가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 가령, 좌파들은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적극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NGO나 민주노동당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지지하는 광범한 대중이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특정 조건에서 좌파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운동을 협력적으로 건설하고 그 안에서 참을성 있게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그럴 때 발전적 비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고, 그래야 비판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
3. 진보좌파 이념의 재구성 무제
3-1. 평등, 생태, 평화, 젠더 등의 문제는 수평적으로 연계될 수 있는 것인가
- ‘노동자계급 중심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위의 문제들이 수평적으로 연계될 수 없다면 왜 그런 것인가
- 위의 문제들이 수평적으로 연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노동계급 중심성은 노동자주의와 같은 게 아니다. 노동자주의는 노동조건.생활조건 등 노동조합 쟁점에는 열의를 보이면서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피억압 사회집단이 겪는 차별과 학대를 경시하거나 그런 사람들의 저항에 연대하기를 삼가는 태도를 가리킨다. 노동자주의는 경제와 정치를 분리해 그 중 정치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로 인해 노동자주의는 정치적 주도권을 개혁주의자들인 민중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맑스주의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맑스주의를 “계급환원론”이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맑스는 초기에 자신의 목표를 “인간 해방”으로 규정했다. 그는 인간 해방을 인류가 겪고 있는 상이한 형태의 억압과 지배로부터 완전한 해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맑스주의자들은 경제학에만 관심 있는 게 아니다. 진정한 맑스주의는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온갖 형태의 차별과 억압도 끝낼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헌신한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대중을 억압하고 사람들의 사이를 갈라놓는가를 설명한다. 억압과 자본주의적 착취의 특정한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 문제는 경제 문제로 환원될 수 없고, 따라서 계급투쟁과 직접 관계가 없는 쟁점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억압 문제는 그로 인해 노동계급이 분열된다는 점 때문에도 특히 중요하다. 자본주의 지배자들은 노동계급을 분할통치해 각개격파하는 수단으로 성, 인종, 성적 지향, 사상 등의 차이를 이용할 수 있다. 맑스는 “검은 피부가 낙인인 곳에서 흰 피부의 노동자들은 스스로 해방될 수 없다”며 평등을 바탕에 둠으로써만 노동계급이 단결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정 형태의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은 다른 저항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 공민권 운동은 베트남전 반대 운동, 여성 해방 운동, 동성애자 해방 운동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또, 노동자들은 모두 자기의 경제적 해방을 위해서뿐 아니라 자기 계급의 일부에 영향을 미치는 갖가지 억압을 끝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이익이 된다.
따라서 계급 착취(특히 자본가 계급의)를 제거하기 위한 특정한 전략적 중요성(노동계급 중심성)이 상이한 형태의 억압의 성격, 질, 논리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현 경제 체제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이런 억압을 제거할 가능성이 제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체제에 맞선 투쟁이 억압 일체에 반대하는 투쟁을 촉진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또,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반체제 운동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억압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자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신체의 상품화를 고려하지 않고서 ‘가부장제’를 이해할 수 있을까? 노예제의 역사적 유산, 제국과 자본주의의 이주 노동에 대한 의존과 분열 지배를 보지 않고 인종차별주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상이한 문제들은 물론 똑같지 않고 그것들은 각각의 주목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원인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3-2. 노동운동, 사회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3-3. 정치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3-4. 정치운동과 노동운동, 사회운동의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재편되어야 하는가
IMF 전망에 따르더라도 올해 전세계 경제 성장률은 -0.5~1퍼센트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위기가 개발도상국으로 전이되고 있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가난과 실직, 사회 불안, 심지어 전쟁으로 내몰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잠재적 폭발성, 이명박 정부에 대한 대중적 염증과 반감 등 때문에 다시 점화될 것 같은 ‘제2의 촛불’은 지난 촛불보다 더 격렬한 양상을 띨 수 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운동에 중요한 문제다. 정치운동, 노동운동, 사회운동을 따로 다루기보다는 전체 진보진영(중도 좌파, 좌파, 좌파의 좌파 모두를 아우르는)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먼저, 진보진영은 대안을 제시하고 운동이 최대한 단결해서 강력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진보적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경제위기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오른쪽을 향할 수도 있다. 운동이 나아갈 방향과 전망을 책임 있게 제시하지 않으면 운동이 표류할 수 있다. 지난 촛불에서 운동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넘어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전반적 반대로 발전했지만,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정권퇴진 요구를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자 1백만 명까지 모은 운동은 응집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운동이 파편화돼 각개약진하지 않고 하나의 큰 연대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권에 맞서 효과적인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힘을 집중해야 한다. 지난 촛불 이후 이명박의 민생 파탄, 민주주의 파괴라는 포괄적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민생민주국민회의’를 만들었으나 대다수 급진 좌파 단체들이 이에 참가하지 않은 한편, ‘민생민주국민회의’는 민생 문제이자 민주주의 문제인 철거민살인진압 문제에 중심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투쟁이 매우 중요해졌다. ‘제2의 촛불’과 노동자 투쟁이 결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구의 결합 등을 통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촛불에서는 노동계급의 조직적 동참이 미미했다.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 회귀 정도에 따라 NGO와 NL계 주도로 민주당과의 제휴 노력이 세를 얻을 수도 있다. 이때 전략와 전술을 구별해야 한다. 즉, 민주당과 전략적 동맹(국민전선)은 안 되지만, 정치적.시민적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전술적 제휴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주당과의 제휴라면 그 어떤 것도 ‘불가’라거나 아니면 ‘조건적’ 제휴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제휴가 ‘가능하다’는 말은 ‘필요하다’는 말과 다르다. 가능해도 필요하지 않을 수 있고, 또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필요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민주당과의 제휴는 필요한 경우나 불가피한 경우(가령 NGO와 NL계 주도로 제휴 결정이 내려졌고 그 제휴가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받아 소수가 뒤집는 것이 불가능할 때)에 한해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전술적인 것이지, 전략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 제휴를 한다 해도 그것이 무비판적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 민주당의 기회주의와 불철저함을 폭로해야 한다.
끝으로, 대다수 급진좌파 단체들이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운동에 종파적 태도를 취하고 공동전선에 열의 있게 참가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 이들은 지난 촛불 참가에 매우 굼떴고, 광우병대책회의에도 적극 참가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로는 급진좌파가 당면 운동의 참여자로서 현실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자신들의 도그마를 적용하거나 대중의 발전하는 의식에 부합하지 않는 공허한 선언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마무리 이야기
4. 향후 진보좌파운동의 나아가야 할 길
4-1. 진보좌파운동의 혁신을 위해 가장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4-2. 지금 요구되는 최소한의 ‘공동행동’
- 다가오는 보궐선거, 2010 지자체 선거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 기타
진보좌파운동의 혁신 과제 중 하나는 시민단체부터 좌파 단체들, 즉 시민단체들, 민중단체들 그리고 정당을 포함한 정치조직들(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준비모임, 다함께 등)이 상시적이고 포괄적인 공동전선을 구성해 투쟁을 공동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노무현에게 환멸을 느끼고 이반했던 그 지지자들이 촛불 항쟁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정치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야당이 된 민주당에게 다시 눈길을 주기 시작한 듯하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광범한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다시 쳐다보기 시작한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경제 위기 시기에 사회 양극화와 정치 양극화가 더 첨예해질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과 전략적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반동적인 짓이다.
그래서 좌파 개혁주의 활동가들과 변혁 좌파들이 단결해 최소 강령을 중심으로 공동의 캠페인을 모색하는 상시적.포괄적 공동전선이 필요하다.
공동 투쟁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상이한 정치 경향들(과 개인들)이 효과적으로 함께하기 위한 조직 구조가 공동전선이다. 상이한 요소들 간의 정치적 수렴이 단지 부분적이고 모호하며 특히 개혁과 혁명의 선택이 폐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이한 경향이 숨쉬고 공존할 공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전선은 투쟁을 건설하고 지지하는 한편, 선거 대응을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좌파가 원하든 원치 않든 보통의 사람들에게 정치는 선거를 뜻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공동전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므로 4월 재보선에서는 진보좌파가 일부 선거구에서(가령, 울산북구) 후보 단일화를 이뤄 한나라당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