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전략회의는 오는 24일 오후 3시30분 부터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진보좌파정치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나(1)’를 토론한다.
주된 토론 지점으로는 △민주노동당 분당의 의미와 진보신당 △사회주의노동자당준비모임의 행보 △진보좌파 이념의 재구성 △진보좌파운동의 혁신과 현재 요구되는 최소한의 ‘공동행동’ 등이다.
이날 토론에는 고민택 사회주의노동자당준비모임 활동가,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 김현우 진보신당 정책위원, 박영균 진보평론 편집위원, 박진희 진보정치포럼 대표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민중언론참세상’은 발표자의 견해를 미리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으며, 아래는 박영균 진보평론 편집위원의 글이다. 발표자의 글이 도착하는 대로 게재한다. - [편집자 주]
들어가는 이야기
1. 민주노동당의 분당의 의미와 진보신당에 대한 생각들
1-1. 분당의 원인에 관한 평가
한국의 진보운동에서 가장 큰 폐해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변화하면 그 변화를 반영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생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동단결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런 차이와 다양성을 억압합니다. 그리고 다수에 의한 횡포, 패권주의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차이가 분화하고 운동이 다양한 색깔들로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형해화되고 고사됩니다. 이것이 바로 진보운동을 현실에 뒤떨어진, 낡은 패러다임으로 만들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바로 이런 분화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사실은 이전에 그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특히, 이것은 차이를 넘어서는 정치적 이념과 색깔이 서로 다른 세력의 동거였으니까요. 게다가 한국 진보운동의 분화과정에서 문제는 민족주의계열이 끊임없이 자유주의와의 모호한 정치적 관계를 맺어왔으며 자유주의헤게모니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비록 늦었지만 분당을 결정한 것은 한국 진보운동의 정치적 발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보전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있습니다. 특히 그 분당의 과정이 ‘정치적인 노선과 입장’이 아니라 ‘종북주의’라는 반북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것은 퇴행적인 정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종북주의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의 진보운동의 발전 방향과 노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 지구화 속에서 다양하게 분화하고 있는 사회운동을 어떻게 적색화하고 정치화할 것인가’입니다. 그러나 종북주의 라는 색깔에 기대다보니 이런 정치적 발전에 대한 논쟁과 모색은 뒷전으로 밀리고 또 다시 이벤트적, 대중적 심리에 기댄 정치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진보신당이 내걸고 있는 4대 가치인 평등, 생태, 평화, 연대는 기치 이외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들 가치를 내세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의 정치적 흐름으로, 대안 사회의 비전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게다가 당의 정치적 비전보다 2008년 선거를 중심으로 급조되다보니 또다시 민주노동당에 대립되는 선거정당으로서, 그리고 몇몇 정치명망가들에 의해 당의 이미지가 좌우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에 한국진보운동은 더 분화해야 합니다. 민주노동당이 민족주의계열로 가장 오른쪽에 있다면 진보신당은 중간쯤에 있으며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치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가장 왼쪽에 있는 정치세력이 하나의 독자적 정치 단위로 건설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 세 가지의 색깔은 진보운동 내부에 항상 존재해왔으며 단일한 정당 내부에도 각기 그 안에서 이런 색깔이 일정하게 혼재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진보운동은 이 세 가지의 색깔이 하나의 정당을 만들기 힘듭니다. 특히 가장 왼쪽에 있어야 하는 정치 분파는 한국의 특수한 사정상, 예를 들어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금지된 영역이기 때문에, 또 그렇지 않더라도 일반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현실 속에서는 일상적 시기에 이들이 다수를 획득하기 힘들기 때문에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발전은 이들의 성장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경우, 다수를 차지하는 오른쪽이 힘으로 이들의 정치적 행보를 제약한다면 진보운동은 발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진보운동은 이제 왼쪽이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서 3파가 분리 정립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진보정치에서 새로운 세력균형과 함께 다양한 정치적 비전과 공동 행동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2. 진보신당의 재창당에 관한 평가
진보신당 재창당을 서두를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 보다 중요한 문제는 ‘기본적인 당의 노선인 4대 가치 즉, 평등, 생태, 평화, 연대를 어떤 노선 속에서 구현할 것인가’입니다. 현재 진보신당으로 들어와 있는 당원들의 여론 조사를 보면 진보신당은 ‘복지를 우선시하는 유럽형 사민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세력이 56.6%로 가장 많습니다.(2008년 9월 25일부터 전 당원으로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여기에 ‘중산층의 이해를 도모하는 자유주의 개혁정당’을 지지하는 세력도 6.3%나 됩니다. 이것은 종북주의라는 정치캠페인의 역효과로 보이는데, 이들이 입지가 커지면 진보신당 또한 민주노동당의 역사처럼 자유주의 세력과의 모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노동자 계급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은 27.7%로 1/3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신당 내부적으로 보면 이런 당 내의 색깔은 지난 2008년 9월부터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지역별 순회토론회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토론회에서는 4대 가치 이외에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통합, 생태주의, 영성주의, 복수의 이념 등이 나왔으며 새로운 당명으로 진보당, 사회진보당, 초록사회당, 민중희망당 등의 안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현재 진보신당의 다양한 정치적 색깔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양한 색깔이 아닙니다. 다양하다는 것은 오히려 발전의 조건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이런 다양한 색깔을 어떻게 하나의 정치적 정체성으로, 공통적인 당의 노선으로 연결해 갈 것인가’입니다. 이런 점에서 제가 보기에 진보신당의 4대 가치의 총론적 구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재 재창당 논의는 여기에 초점이 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점은 2010년 지자체 선거에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벌써 진보신당은 당대표단 경선 일정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대표단 경선이 이런 정치적 노선과 사상적 분화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또 다시 진보신당의 대중적 정치명망가들인 심상정과 노회찬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선거용 정당 만들기’에 급급해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대의제-대표제라는 틀로 대중들의 정치화를 가로막는다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의 함정, 아니 진보정당운동까지를 포함해서 함정은 바로 이 대의제-대표제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대중들을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지도자에 대한 수동적 지지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하는 ‘자동인형’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사실 저의 관심은 사민주의 정당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저의 관심은 가장 왼쪽에 있는 세력들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진보신당 내의 좌파, 위의 여론조사로는 ‘노동자계급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정당’을 이야기한 27.7%의 행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보가 단지 진보신당 내부에 봉쇄된, 그 안에서 진행된다면 좌파운동은 발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 세력이 진보신당 밖의 더 많은 좌파들과의 공개적이고 개방적인 논의를 전개하고, 공동 행동 테이블을 만들고, 정치적 비전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장은 진보신당의 외연 확장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은 진보신당의 노선을 보다 왼쪽으로 밀어붙이는 정치적 효과를 가질 것이며 진보신당 밖에 있는 좌파들의 논의를 보다 풍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보다 ‘왼쪽으로의 밀어붙이기’이며 ‘대중들을 향한 정치적 비전의 공론장’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2. 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준비모임의 행보에 대한 생각들
- 성격, 건설경로 등에 관한 평가
현재 저는 여기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사회적으로, 대중적으로 한국의 진보운동 내부의 3파가 가시화되고 공론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자신의 노선과 비전에 따른 정치 행보가 가시화될 수 있도록 조직적 세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준비모임(약칭)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진보운동의 역사와 노동운동의 발전을 본다면 심히 늦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발걸음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세계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자본의 한계가 드러나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새로운 대안 정당’의 건설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 건설이 곧 그들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는 좌파 운동들 내부에서 하나의 정치세력화를 향한 열망과 흐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둘째, 당 건설 과정이 대중들을 정치화하고 정치적 주체로 만들어내는 공론의 과정, 논쟁의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당 건설 과정이 대중들의 열망을 담을 수 있는 정치적 비전에 따른 대중적 정치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준비모임의 당건설 과정은 좌파 내부에서도, 사회적으로도 정치적 흐름을 만드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나름대로 전국적인 순회토론을 하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정치의제들과 논의들을 대중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대중화라는 것이 ‘노동현장’에 국한되어 있거나 너무나 협소한 ‘노동자계급중심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진보운동의 성공은 결코 과거와 같은 노동자계급운동으로부터 얻어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노농동맹이 중요했다면 오늘날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의 결합이며 사회운동의 적색화, 노동운동의 정치화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미 정치화가 아니라 노/자의 협상 파트너쉽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노동운동의 정치화하면 노동법 총파업과 같이 정부를 상대로 하면 정치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레닌은 그런 식의 투쟁을 정치투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치투쟁은 ‘권력의지’의 문제입니다. 곧 대체권력, 다른 사회를 만드는 구성 권력에 대한 의지의 문제입니다. 경제주의는 이런 식의 의지를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과 투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노동법이란 명백하게 자본과 임노동의 교환, 계약의 법률적 체계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경제적 이해의 문제이지 정치적 이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의 노동자계급중심성은 ‘현장이냐 아니냐’, 또는 ‘노동자의 이해냐 아니냐’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시민운동=쁘띠부르주아운동이라는 딱지만 판을 치죠. 그러나 사회운동 쪽에서 보면 노동운동은 이미 노동자이기주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싸울 뿐이니까요. 사실, 그런 비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한통계약직 파업 때도, KTX비정규직 파업 때도 그랬으니까요. 따라서 문제는 밖에서 비판하는 것에 대해 ‘저 새끼는 나하고 달라서 까는 거야’라는 식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와 같은 문제들이 왜 나오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노동운동은 자본과 한 세트이며 노/자 관계는 명백한 자본-임노동의 계약적 관계 틀 내부에 있습니다. 따라서 당을 만든다는 것은 이런 노-자 관계를 혁파하는 것입니다. 레닌이 당 건설에서 싸운 대표적인 집단이 ‘경제주의’입니다. 오늘날 민주노총의 문제는 단지 도덕성의 타락 문제가 아니며 몇몇 노동관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과의 메커니즘 속으로 들어간 자본의 포섭-체제 내적 구축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국내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그리고 여성노동자 등의 분할 통치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급통일’과 ‘계급의식’을 창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현장의 이해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당 건설이 중요하죠. 당의 정치화된 계급의식은 결코 현장의 이해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정치화는 명백하게 노조 밖에서 이루어지며 당의 형식 또한 노조라는 틀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당 건설은 노조라는 틀을 벗어나 있지 못합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국가권력을 향해 놓은 것만 다를 뿐이죠. 그러다 보니 대안 사회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 없습니다. 단지 ‘노동자계급정당건설’이라는 구태의연한 구호만 있을 뿐입니다. 사실, 한국사회의 진보진영 왼쪽에는 제도를 거부하면서 반자본적인 대안사회를 구상하고 실천하는 다양한 집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 건설은 이들 집단 속에서 일차적으로 당 건설의 사회적 분위기-흐름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포함할 수 있는 전략과 전선이 모색되어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 그것은 ‘꼬뮌’입니다.
그러나 밖에서 보기에 준비모임은 앙상한 계급중심성 위에서 노조현장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입장과 관점들이 인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색의 색깔은 조직을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퇴색되어 사라지는 ‘낡은 것’이 되도록 만듭니다. 지난 8월 11일에 있었던 준비모임 출범식에서 제시된 △사회주의 정당 △노동자정당 △생태, 여성, 소수자 등 21세기 사회변혁 과제 △사회변혁을 위한 정당 △민주적인 정당 △당원이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정당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핵심이 무엇인지 드러나 있지 않으며 이들의 관계성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나열적인 구호들이지요.
문제는 급진민주주의, 사회운동, 무정부주의까지를 포함한 진정한 좌파정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당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사회민주노동당도 볼세비키와 멘세비키의 동거정당이었습니다. 당 내에는 항상 좌와 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현재보다 훨씬 폭넓은 당건설운동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문호를 더 개방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정당’이나 ‘사회주의’라는 것을 기치를 내걸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힘보다 더 오른쪽에 있거나 왼쪽에 있는 많은 세력들을 배제합니다. 특히 사회운동세력들을 배제합니다.
또한 정치테이블을 보다 넓게 사회적으로 공론화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짜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쟁점들이 이 사회에서의 쟁점으로 이슈화해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생태, 여성, 소수자 등 나열하면 그것이 접합될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생태는 노동자의 직접적인 이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태는 곧바로 화석에너지체제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 소수자의 문제는 인권개념에 대한 새로운 혁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런 개념적 검토 없이 나열되는 것은 어떤 비전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사실, 강령이라는 것도 몇몇 뛰어난 인자들에 의해 작성되는 문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대중투쟁 속에서 얻어진 현재적 경험들이 녹아들어갈 때 풍부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강령작업 과정이 곧 조직의 건설과정이자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 대중을 정치적 주체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준비모임의 활동에서는 그런 대중적인 공론화, 쟁점화, 토론적 의제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다시 앙상한 ‘노동자계급정당’이라는 골격에만 멈추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
3. 진보좌파 이념의 재구성 문제
3-1. 평등, 생태, 평화, 젠더의 문제는 수평적으로 연계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이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3개의 층위를 나누어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수평적으로 연계될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근원적 모순에서 시작된 것이며 어떻게 상호 접합되어 있는가’를 나누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등, 생태, 평화, 젠더의 문제는 그것이 통사적으로 기원하는 모순의 뿌리가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독립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들 간에 관계는 수평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날 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 즉 공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수평적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태, 평화, 젠더의 문제는 자본의 내적 모순을 통해서 접합되고 확대 재생산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것들은 계급모순을 중심으로 배치되며 반자본, 또는 자본을 넘어서는 과제를 공통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나 이런 식으로 계급모순이 우위에 있고 생태, 젠더, 평화 등이 여기에 접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 층위는 바로 ‘주어진 정세에서 주요모순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그것은 각기 다른 모순들이 서로 접합되어 결정됩니다. 이 때 각각의 주어진 정세 효과 속에서 접합의 구조는 바뀝니다. 예를 들어 어떤 때는 평등이, 어떤 때는 젠더가, 어떤 때는 생태가 주요모순으로, 그 정세를 규정하는 핵심적 쟁점이 됩니다. 따라서 정세적인 모순의 배치, 주요한 핵심적 사안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현장 중심의 좌파운동은 노동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모든 모순은 계급모순을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정세의 구체적인 배치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네 번째로 중요한 문제는 각기 모순의 생성 근원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는 과정은 아무 충돌 없이 배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평등과 생태는 오늘날 환경문제가 빈부문제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하지만 생태적 환경의 문제는 화석에너지체제에 절대적으로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는 문제로, 노동의 이해-생산의 이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젠더의 문제는 여성의 성과 소수자의 성이 자본주의적인 노동력 재생산의 구조+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문제는 인권과 다양한 가치, 삶의 풍요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필요와 결핍에 근거한 노동운동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여성과 생태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이들을 연계하는 공통성을 한편으로 찾으면서도 상호 충돌하는 지점에서의 가치서열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적어도 서로의 공통성을 찾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가치의 서열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입니다. 저는 자본의 내적 모순을 중심으로 생태와 여성, 소수자의 문제를 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과정의 전체적인 그림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서열화 작업은 서로의 합의점을 이끌어내는 데 상당한 논쟁과 시간을 필요로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자본주의적 패러다임과 가치 체계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여러 개념들, 노동, 인권, 평화, 생태에는 자본주의적 가치와 패러다임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에서는 시민사회운동이 쁘띠부르주아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들이 훨씬 더 부르주아적인 사고와 가치를 가진 경우도 많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비단 여성운동, 환경운동, 평화운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 현장 자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새로운 공통성, 가족유사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지 이론적 작업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작업장 중심의 노동운동이 아니라 지역에서의 사회운동이 필요하며 상호간의 교차적인 운동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새로운 반자본적 가치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인권 개념이 부르주아적 인권 개념에 머물 때 그것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맑스의 가치는 ‘사회화된 노동’과 ‘사회화된 생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권 개념을 사회적 생산과 노동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권 개념으로 바꿉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노동의 가치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삶을 꾸려가는 공동체의 연대적 가치를 요구합니다. 이런 점에서 생태와 젠더는 사회적 개인이자 공동체적 존재로서 개인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 실업자에게 주어지는 실업수당은 국가나 사회의 시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받아야 할 정당한 몫입니다. 왜냐 하면 실업자도 이 사회의 생산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반자본이라는 공통의 전선 속에서 서로를 횡적이고 종적으로 상호 교차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를 만드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연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연대의 중심에 코뮌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지역에서 코뮌을 만드는 과정이며 생산 현장에서 소비에트와 같은 코뮌을 만드는 과정에서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문화가 생성되어 갈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현장의 노동자는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사회의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이런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창출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헤게모니라는 것은 윤리적 가치의 보편성을 확보하지 않고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불안’과 ‘아노미’적 이기심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모든 연대적 실천이 가야 할 공통의 방향은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의 건설이며 반자본적인 대안권력의 구심적으로 ‘꼬뮌’을 건설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2.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제가 생각하기에 민주주의는 대안 공동체, 대체 권력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지배의 형식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순히 억압을 상징하는 지배의 형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발전시킨 새로운 가치와 권력의 형식입니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서로 대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들이 창출한, 개인의 인격적 독립성을 보장하면서 지배를 창출한 방식으로, 단순히 공동체적인 규율과 집단주의에 의해 강제되는 통치 형식과는 명백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부르주아혁명이 정치의 문제를 인간 개개인의 자기 통치 형식으로 내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초월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의제-대표제입니다. 따라서 대의제-대표제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인민의 자기 통치 방식으로 더욱 급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 통치라는 관점에서 대의제를 넘어선 직접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사회 윤리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런 가치를 자신의 에토스로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오늘날 대중들을 정치화할 수 있는 진정한 통치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원리상 배제된 자들, 지워진 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통치형식이 될 수 있으며 사회적 연대가 상호 소통을 통해서 구축될 수 있는 통치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더욱 급진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단순한 형식적-절차적 문제로 사고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오늘날 민주주의는 관료제라는 국가장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관료제적 국가장치와 다른 통치형식으로서 민주주의를 급진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운동 방식과 운동 조직은 이런 근본적인 반관료적 민주주의의 조직형식을 발전시키고 있지 못합니다. 정치조직과 노조의 조직형식은 부르주아적 관료제와 동일한 집행체와 대의체의 이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인민의 자기통치방식은 소환권이나 징계의 법적 형식으로만 처리될 뿐입니다. 그러니 실상은 부르주아적 권력 형식과 별반 다르지 않죠.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사실은 아이러니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여민주주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참여민주주의만으로 안 됩니다. 참여를 넘어서 ‘행정적이고 집행적인 권력’을 ‘의사소통적 집행권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그 구성원들에 의한 직접 통치라는 조직 형식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 없이 저는 대안권력이 스탈린적 전체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급진민주주의자들의 고민과 토론이 보다 본격적으로 대안사회의 건설과 관련하여 연결되고 소통되고 당의 건설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3. 사회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회주의라는 말처럼 오용되고 잘못 이해되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오해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주의를 코뮤니즘과 동일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역사적 이유 때문인데, 첫째, 과거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를 독자적인 생산양식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며 둘째, 한국의 특수한 반공이데올로기가 공산주의를 금기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결코 독자적 생산양식이 아니며 이행의 형태일 뿐입니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는 코뮤니즘입니다. 오늘날 꼬뮨을 신좌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꼬뮨은 중세자치도시에서 기원하며 파리꼬뮨의 혁명이 발견한 새로운 대체 권력의 형태입니다. 물론 이 구체적인 형태는 나라마다 시기마다 다릅니다. 한국에서의 형태가 무엇일지는 우리의 실천의 과정 속에서 구체화되겠죠.
둘째는 사회주의를 맑스-레닌이 ‘일한 만큼 받아가는 사회’라고 규정한 것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치 사회주의의 원리가 ‘노동가치=노동시간에 의한 양화된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노동가치론을 부르주아적 지배양식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적어도 투하노동가치설은 애덤 스미스에서 발견되고 리카도에서 완성된 학설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노동가치가 부르주아의 소유권의 기초라는 것도 명백합니다. 어쨌든 저는 노동가치론에 따른 사회주의라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쉽게 우리가 생각해도 알 수 있는데, 노동가치에 의해 대표되는 가치의 보편적 등가형태가 바로 화폐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회화된 노동은 가치를 시간으로 환산할 수 없는, 환원불가능한 노동의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죽은 노동의 축적인 기계가 그렇고 자동화된 시스템이 그렇고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지만 연결되어 있는 가치창조의 참여자들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부르주아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제 생각에 이런 문제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물신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국유화라는 관점입니다. 여기에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사적 소유를 국유화하는 ‘사회혁명’을 한다는 소위 ‘선정치혁명 후사회혁명’이라는 단계적 사고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맑스는 이미 파리꼬뮌에서 코뮤나르드를 비판할 때, 이런 이분법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이분법 속에서 사유합니다. 그래서 사민주의든, 정통레닌주의든 간에 ‘혁명’하면 ‘정치권력의 장악’, ‘정치혁명’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혁명은 없고 ‘정치혁명’의 ‘혁명적 정세’를 기다리는 ‘대기론적이고 파국론적인 사고’가 이어집니다. 이렇게 오용되는니 차라리 저는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폐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코뮤니즘을 복원하고 싶습니다.
사실,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은 같이 가야 합니다. 그 핵심에 ‘꼬뮨’이 있습니다. ‘꼬뮨’은 대체권력이자 이후 정치권력 장치가 되는 자율적인 공동체의 자치 권력입니다. 이들이 나중에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대체해야 합니다. 혁명이란 단순히 뒤집어엎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고 생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혁명 과정 자체가 이미 그런 권력을 내적으로 함축하고 있어야 하며 그런 권력체들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 없는 노동운동, 노동운동 없는 사회운동은 결코 자본을 넘어선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국가란 바로 이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파괴를 통해서 새롭게 건설되어야 할 자치권력체 이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두 번째의 문제는 사회주의를 자꾸만 개인적인 몫의 관점에서, 부르주아적 분배의 문제로 환원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코뮤니즘이 노동가치에 근거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맑스-레닌도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원리를 제시한 것처럼 이것은 노동 가치에 근거한 등가적 분배의 원리를 위배합니다. 그것은 곧 사회주의라는 이행기에 이와 다른 원리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은 또 한 번의 혁명을 전제하는 것이 되니까요. 따라서 사회주의에서의 자치권력으로서 꼬뮨은 ‘호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호혜성이 바로 각인의 발전이 곧 사회의 발전이 되는 사회로의 이행을 만드는 물질적인 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4.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사회주의는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시기이며 혁명의 핵심은 ‘권력’입니다. 즉, 사회화된 노동에 근거하고 있는 사회적 소유의 확립이란 개인적 수준에서 소유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소유는 공동체적 소유이고 공동체적 소유는 그것을 관리 통제하는 사회적 소유의 권력체로서 ‘국가’를 필요로 합니다. 부르주아 국가 장치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부르주아 국가장치는 ‘국유화’를 통해서 자본의 축적에 봉사합니다. 그러나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장악해서 ‘국유화’한다고 하더라도 그 소유가 사회적 소유, 공동체적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사회주의권에서 보듯이 명목상으로만 인민의 소유이고 실제로는 전체주의적 권력을 대리 집행하는 자들, 즉 관료와 테크노크라트들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혁명은 이런 국가장치의 문제, 비대해진 관료제에 기생하는 특권층으로서의 관료집단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혁명은 관료제를 파괴하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관료제를 파괴한다는 것은 곧 통치의 문제를 ‘관료’가 아니라 인민들 자신의 자기통치로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물론 이때 민주주의란 대의제가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입니다. 사민주의는 이런 민주주의의 직접 통치 원리를 정치적인 대리제로 바꾸어 놓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실 사회주의권에서도 이 원리는 관료들에 의한 총체적인 합리적 국가의 대리제로 재현되었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없다면 사회주의는 과거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처럼 관료적 국가사회주의와 같은 형태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에서 소유 문제는 본질적으로 ‘정치’의 문제이며 ‘국가권력의 구성’ 문제이며 ‘정치적 주체로서 인민의 조직화’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급진화 없는 사회주의 혁명은 이미 실패한 혁명이며 사회혁명 없는 정치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3-5. 민주주의와 꼬뮌주의는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개념이 자꾸 여러 개로 쓰여서 어려운데, 어쨌든 저는 꼬뮌주의를 ‘코뮤니즘’으로 표기하고 이 관계를 설명하겠습니다. 사실, 앞에서 제 이야기를 계속 들으신 분이라면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유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코뮤니즘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민의 자기통치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그러합니다. 여기서의 적은 ‘대의제-대표제’이며 ‘관료제’입니다.
민주주의 없는 코뮤니즘은 국가를 사멸이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권력으로 바꾸어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산의 사회화란 어쨌든 국가 장치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거대한 생산의 물적 기반을 국가가 장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곧 그 힘을 기반으로 한 권력이 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외적인 권력에 의한 우리들의 삶에 대한 통치, 외적 강제력을 내적인 자기 통치력, 자치로 바꾸기 위해 혁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의사소통과 결정, 그리고 민주적 장치의 구성없이 코뮤니즘적 사회의 구성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코뮤니즘의 내적 본질로서, 인민의 자율적 삶의 구성 속으로 체화되어 사라지는 통치원리로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이야기
4. 지금 요구되는 최소한의 ‘공동행동’
4-1. 다가오는 보궐선거, 2010 지자체선거에서의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저는 장기적으로 진보진영 또는 좌파진영의 공동선거블록 전술로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부르주아 진영에 대응하여 진보진영 또는 좌파진영이 이기기 위해서 단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선거전술에서 이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기는가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때론 패배하는 것이 보다 더 역사적인 의미와 기억들을 남기며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분파가 정견과 비전을 가지고 대중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자신의 후보들을 결정하는 정치의 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기기 위해 밀실에서의 타협에 의한 후보 선정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대중들을 투표하는 꼭두각시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각 당은 문호를 개방해야 하겠죠. 그리고 각 당의 정책과 비전, 정치적 입장들을 대중들에게 선전하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을 조직하며 최종적으로 민중경선과 같은 형태로 후보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가 곧 자신의 정치적 의사 결정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어떤 후보가 민중들과 함께 투쟁하는 후보인지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런 쟁점들과 투쟁성이 드러날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현재 상황에서 보면 공허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제가 가장 왼쪽의 정당 건설에 주목하는 것, 또는 3파의 분리 정립에 주목하는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분리 정립은 곧 자신의 입장 속에서 적절한 정치적 공동행동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패권은 실체가 모호하게 감추어졌을 때 관철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분리되면 다수의 힘을 근거로 한 패권은 관철되는 데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현재 진보신당과 좌파정당이 분리 정립하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같이 하는 것이 나은지는 좀 더 계산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공동전선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든가, 아니면 자기 후보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분리 정립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필패로 가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중들은 결집된 힘을 원합니다. 그렇다고 그 안에서의 어떤 정견의 차이나 정책적 차이, 비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노선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지하는 대중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도 모르는 대중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분열주의자’라는 낙인만을 찍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는 이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공동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전술을 찾아야 합니다.
4-2. 기타
마지막으로, 저는 좌파운동이 ‘통 큰 정치’를 했으면 합니다. 물론 정치적 입장과 차이를 감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더 명확하게 드러내야 하죠.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이 민주적이지도 상호 소통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서로의 차이를 통해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현재 한국의 좌파는 ‘어린애’와 같습니다.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제, 이런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논쟁은 치열하게, 그러나 실천은 공동적으로’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전선을 긋고 그들과 싸우는 데 자신을 개방하고 같이 하는 통 큰 정치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대중은 ‘마키아벨리’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헤게모니는 자기 조직 안에서 갇혀서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자본의 모순이 생성하는 무수한 문제들이, 투쟁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런 투쟁들과 사안들에 대한 횡단하기, 상상하기, 자기 밖으로 나가기가 중요합니다. 제 생각에 ‘헤게모니’란 이런 정치적인 큰 걸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좌파운동은 골목대장들의 파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구태의연한 생각들과 관념들 속에서 낡은 믿음과 도덕, 그것도 부르주아보다 못한 도덕의 틀에 갇혀 있습니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면 더 큰 걸음, 더 큰 정치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과거의 유제나 낡은 전통에 발목이 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혁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혁신은 다른 조직의 혁신이 아니라 자기 조직의 혁신이어야 합니다. 다른 분파의 혁신이 아니라 자기 분파의 혁신이어야 합니다. 혁신은 외부에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자기 조직이나 분파에 가두는 정치가 아니라 자기 조직이나 분파를 벗어나 외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전체 계급투쟁의 전선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맑스-레닌주의적 전통에서 정치는 온전히 개인의 투명한 정치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내부의 권력이 우리 자신을 검열합니다. 마치 신앙고백이 자기 스스로를 강제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는 상상과 횡단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때 상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제, 각 부문, 각 지역, 각 현장을 벗어나서 더 큰 틀에서 보아야 합니다. 부르주아지들은 ‘세계’를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급의 이해를 위해 단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특히, 오늘날처럼 단일 계급의 적대적 전선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헤게모니는 서로의 소통 없이 불가능합니다. 폐쇄된 조직은 결국 사멸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그 미래는 시간적으로 도래하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속에 숨 쉬는 미래입니다. 따라서 미래는 시간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숨 쉬는 지금-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구적 삶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 좌파운동이 그 미래였으면 좋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