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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

[김규종의 살아가는이야기] 이스트우드 신작 '그랜토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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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바른 자세로 늙은 사내가 길바닥에 누워 있다. 가지런하게 두 다리를 모으고, 양팔은 쭉 펼친 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 표정과 곧게 올라간 콧대로 보건대 상당히 꼿꼿한 인간으로 보인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오른손에는 수제 라이터가 쥐어져 있고, 손바닥으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그의 이름은 월트 코왈스키.

화면 가득히 이스트우드가 부르는 ‘그랜토리노’ 주제가가 흘러나온다. 다소 칼칼하고 조금은 쉰 것 같은 팔순 배우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절제된 형식으로 이스트우드는 만년의 인생에서 보고 느끼는 다채로운 소회를 영화에서 피력한다. ‘그랜토리노’에서 여느 할리우드 영화처럼 강렬함이나 폭발력 혹은 역동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영화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으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도된다. 몇몇 성급한 기자는 이스트우드가 출연했거나 감독을 맡은 작품들 가운데 최고의 흥행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기본적인 공식과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이는 ‘그랜토리노’가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낡은 세대의 보수주의자 월트

장례식이 진행되는 가톨릭 성당에서 얼굴을 잔뜩 찌푸린 노인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표정으로 보건대 무엇인가 몹시 못마땅한 모양이다. 그가 지켜보는 대상은 손녀와 손자들이다. 장례식에 와서도 예의 하나 반듯하게 갖추지 못하는 어린것들과 그 부모에 대한 반감을 그는 감추지 않는다. 배꼽티를 입고 등장한 손녀에 대한 불만족은 압권이다.

월트는 지나간 것들과 낡은 세대의 의미와 가치를 남달리 부여하는 보수주의자다. 그가 지니고 있는 모든 것에는 세월과 시간의 더께가 거북 등딱지처럼 견고하게 덧씌워져 있다. 그를 둘러싼 것들, 이를테면 1951년부터 써온 라이터, 50년 이상 모아온 각종 연장과 도구, 한국전쟁에서 받은 훈장, 엠1 소총이 그러하고, '그랜토리노'가 또 그렇다.

1972년 포드에서 일할 때 손수 조립했던 그랜토리노. 아직도 현역으로 뛰지만, 나이는 불혹에 가깝다. 그의 애완견 데이지도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에 도달해 있다. 이렇듯 소유주와 대상의 관계는 오랜 시간의 연대로 견고하게 묶여 있다. 그런 월트에게 새로운 사고방식이나 행동 내지는 유행을 바라는 것은 '새에게서 젖을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가 구현하는 것은 오래전에 한물간 사고와 생활방식이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서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월트. 그가 스물일곱 살짜리 풋내기 신부 자노비치에게 반감을 품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알기에는 너무도 어린 신부의 말이 월트에게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것에 통달한 듯 보이는 월트.

한국전쟁과 월트 코왈스키

‘그랜토리노’에서 월트 코왈스키를 단단히 옥죄고 있는 과거는 한국전쟁이다. 참전용사로 최전선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무시로 넘나들어야 했던 코왈스키.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월트는 한국전쟁의 기억과 상흔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악을 응징하러 나가면서 그가 몽족 출신 소년 타오에게 남기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난 이미 손에 피를 묻혔으니까… 이미 더럽혀졌으니까… 그래서 혼자 가야 한다.”

누이와 집안을 향한 폭력에 항거하려는 타오에게 참전용사는 그렇게 말한다. 열세 사람 이상을 한국전에서 죽였다는 사실보다 타오 또래의 '소년병'을 죽였다는 사실이 월트는 잊히지 않는다. 그것도 두 눈 똑바로 쳐다보고 죽여야 했던 어린 병사의 얼굴을 도저히 잊을 수 없노라고 월트 코왈스키는 말한다. 그것이 그의 비극적인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영화는 곳곳에서 코왈스키 집안 식구들의 갈등과 반목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죽음의 고통 때문에 아들에게 전화하지만, 그것을 끝내 털어놓지 못하는 월트. 그런 아버지를 양로원으로 보내고 싶어 하지만 관철하지 못하는 아들 내외. 할아버지 물건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의 생각과 행동은 마뜩치 않은 손녀. 이런 불편한 가족관계의 발원지는 월트다.

한국전쟁이 코왈스키에게 가져다준 고통의 격랑은 골이 깊고 폭이 아주 넓은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조금도 망각되지 아니하고 오늘의 월트를 한국전쟁 시절로 단단히 옥죄는 살인의 추억. 전쟁의 상흔을 이렇게 일상생활과 결부시키면서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영화는 흔치 않다.

(‘지옥의 묵시록’은 전쟁과 살육의 형이상학적인 해석에 멈춰버렸고, ‘플래툰’은 베트남전의 본질을 미군 내부의 자체 문제로 단순화하였다. ‘디어헌터’ 또한 폭력으로 치장된 미국식 인도주의를 선전하는 데 몰두한다.)


인종 전시장인가 아니면 세계의 용광로인가

월트가 즐겨 찾는 이발소 주인은 이탈리아 출신이다. 월트와 그는 오랜 지기처럼 지낸다. 월트는 시도 때도 없이 인종차별적인 말을 해댄다. 그가 거리에서 대적하면서 침을 뱉는 청년들은 흑인이다. '수'의 남자친구가 별 볼일 없는 '아일랜드계'라고 멸시하고, 아시아계는 개를 먹는다고 비웃는다. 여기에 유대인과 멕시코계에 대한 욕설이 보태진다.

월트 코왈스키는 어디 출신인가. 폴란드다. 우리는 그의 집안이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스트우드의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월트가 아메리카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는 포드 자동차의 노동자였으며, 맏아들은 일제 자동차 판매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집은 가난한 몽족 출신자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앵글로 색슨계가 정치를, 유대인이 언론과 기업을 장악한 나라 미국. 정치적으로나 문화.예술적으로 별로 내세울 것 없는 폴란드 출신 늙은이가 무에 그리 대단해서 온갖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내뱉는가. ‘그랜토리노’에서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미국은 세계의 용광로인가 아니면 인종 전시장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월트 코왈스키는 몽족이 누구고, 어디서 왔으며, 그들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당최 무관심하다. 베트남전에서 미국 편을 들었다가 쫓기듯 미국으로 이민 온 몽족의 실체를 알고 난 후에도 그의 자세는 변하지 않는다. 비주류가 더 힘없는 비주류에게 가하는 폭력적 언사가 영화 곳곳에 난무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트우드의 진가가 발휘된다.

월트의 영웅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월트는 여느 아버지들처럼 가족과 대화하지 못하고, 두터운 장벽을 치고 살아왔다. 그런데 야만인으로 생각하던 몽족 사람들의 풍습과 인정과 가족관계를 보면서 그는 얼어붙은 내면의 자아를 일깨우기 시작한다. 조금씩 그들과 소통하면서 월트는 타오와 수에게 짙은 동류의식을 느낀다. 영화는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며 파국으로 달려 나간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자명한 공식을 체득한 월트 코왈스키. 그는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폭력에 저항하기로 한다. 그는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그동안 경원해왔던 것들과 화해한다. 자노비치 신부에게 회개하고, 죽음과 삶의 의미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타오에게 지난 시절의 아픔과 절망을 털어놓고, 폭력과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간다.

'용서 받지 못한 자'에서 악의 징벌자로 등장한 이스트우드가 아니라, 공동의 힘으로 악에 대처하려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하는 할리우드 영화나, 권선징악을 모토로 내건 서부영화와는 다른 궤를 선택한 것이다. ‘그랜토리노’의 월트는 나약한 타자를 지켜주기 위해 순교자적인 영웅성을 발휘한다.

반면에 그것은 세계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미국의 순교적이고 영웅적인 행위에 대해 보수주의자 이스트우드가 보내는 헌사인지 모른다. 그것이 과거의 베트남과 한국이었든,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혹은 수단이나 소말리아든 간에. 그가 폭력적인 흑인 청년들을 담대하게 윽박지르며 내뱉는 대사는 섬뜩하리만큼 사태의 핵심을 찌르는 것 같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이 있단 얘기 못 들어 봤나? 그게 바로 나야!"

짧은 맺음말

월트는 죽어서도 당당하고 의연하다. 그의 자세는 십자가를 연상시킨다. 골고다 언덕 위로 예수가 인간들의 대속으로 지고 올라갔던 십자가. 예수는 보편성과 사해동포주의를 주창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부활했지만, 월트는 다시 살아날 것 같지 않다. 그는 죽어서까지 백인 우월주의에 기초한 인종 차별주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랜 토리노를 넘겨주면서 그가 남긴 유서의 구절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그것이 단순히 고집스런 늙은이의 마지막 우스개인지, 아니면 치밀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보수주의자의 기막힌 언사인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일이다. 여하간 ‘그랜토리노’는 적지 않은 웃음과 오랜 반향을 가진 문제제기로 우리들 기억 속에 상당 시간 남을 듯하다.
덧붙이는 말

김규종 님은 경북대 노어노문학 연구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