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신문 보기가 두려운 나날이다. 세계경제가 1930년대 경제공황기와 다르지 않다는 언론보도가 새롭지 않다. 날마다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세계 각국의 실업률과 끝 모를 주가하락, 주택경기침체를 알리는 소식이 반갑지 않은 것이다. 철거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용산참사, 연쇄살인범, 유명배우들의 잇단 자살이 세상 분위기를 흉흉하게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단일 세계체제 아래 살고 있다. 19세기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 같은 용어는 그것의 변형된 외양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500년 이상 존속하면서 19세기 이후 지구전역을 삼켜버린 거대 이데올로기이자 유일한 역사적 체제 자본주의. 그것이 예전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무질서하게 작동함으로써 심각한 위기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우리가 조석으로 대면하는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위기와 혼란은 자본주의와 너무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뉴욕 주립대학의 석학 임마누엘 월러스틴은 이것을 자본주의가 맞이한 말기적.구조적 위기라고 진단한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그의 최근 저작으로 가까운 미래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마련하려는 의도로 집필된 책이다.
서문에서 월러스틴은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 지도자들과 언론 및 지식인들의 언사에 내재된 ‘유럽의’ 보편주의를 지적한다. 그들은 비유럽 국가들과 거기 사는 저개발 국민들과 관련된 정책에 대해 말할 때 거의 언제나 보편적인 가치와 진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말한다. 지은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보편주의 행태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한다.
“유럽 지도자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인권을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증진한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문명의 충돌’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서구문명이 보편적 가치와 진리에 기초한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전제된다. 세 번째는 시장에 관한 엄정한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신자유주의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논리다.” (8쪽)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제1장 ‘누구의 개입할 권리인가’에서 근대와 자본주의 및 유럽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 추적한다. 근대의 문을 열면서 유럽은 신대륙을 포함한 여타지역의 군사 정복, 강제수탈 및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와 진보, 경제성장과 발전이란 용어로 호도하였다. 근대란 유럽국가와 민족의 팽창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16세기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정복 이후 그들이 내세운 보편적 가치는 기독교였다. 그들이 보기에 원주민들은 야만상태에 빠져 우상숭배와 인신공양의 관습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잔인한 지배자로부터 양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기독교 전파는 야만과 작별하기 위한 필연적인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멜 깁슨의 영화 <아포칼립토>를 연상하면 좋겠다.)
유럽은 이런 식으로 16세기에는 기독교, 19세기에는 문명화, 20-21세기에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워 세계 각국의 정치와 사회에 개입하였다. 그들이 내세워 관철한 개입할 권리를 월러스틴은 원천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유럽의 보편주의 주장을 특수주의로 규정하면서 지구적 보편주의와 그것에 기초한 지구적 보편가치 창조를 주장한다.
“지구적 보편가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가치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기획은 인류의 위대한 윤리적 기획이다. 그것은 우리가 강자의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을 넘어서 선에 대한 진정한 공통의 인식으로 나아갈 때 성취할 희망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평등한 구조를 요구한다.” (56-57쪽)
오리엔탈리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콜럼부스 이후 신대륙을 정복한 유럽인들은 19세기 아시아에서 고급문명을 소유한 국가들과 대면한다. 인도, 페르시아,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중국이었다. 잘 살펴보면 이들 제국은 계통발생적인 문명의 후예라는 공통점이 있다. 여타 문명의 영향과 혼융을 언급해야 하지만 우선 인더스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및 황하 문명을 거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오리엔탈리즘’이란 이념적.학문적 개념을 가지고 아시아를 재단하고 평가하였다. 그것의 고갱이는 아시아의 무력화와 서구의 우월성 확립에 있었다.
“동양문명이 문화적으로 서구의 기독교 문명만큼 풍성하고 세련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 문명은 작지만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들 문명에는 근대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서구문명의 도움을 받아야 동양문명은 자신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 따라서 서구의 지배는 과도기적인 현상이지만, 세계발전과 피지배자들의 직접적인 이익에 필수적인 현상이다.” (131-132쪽)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자들을 일컬어 ‘오리엔탈리스트’라 부른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세계에 (혹은 구약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럽문명만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근대성을 산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진보적인 유럽문명에 뒤지는 다른 문명이 외부세력의 개입 없이 근대성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명저 <오리엔탈리즘>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은 근본적으로 동양이 서양보다 약자라는 이유로 동양에 강요되는 정치적 원리”(69쪽)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출발하면서 사이드는 ‘거대서사(巨大敍事)’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월러스틴은 사이드의 거대서사에 의지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그 하나는 세계와 보편적 가치에 은밀하게 관여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힘 있는 자들의 주장을 평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편적 가치의 존재여부와 그것이 존재한다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지 숙고하는 것이다.” (74쪽)
저자는 지배세력의 원리에 구현되었다고 주장되는 보편주의와 피지배자들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특수주의를 근대 세계체제의 이분법적 구별로 규정한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민족해방운동과 68년 세계혁명으로 세계체제는 지속적인 붕괴를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월러스틴은 특수의 보편화와 보편의 특수화를 통해 종합의 길로 나아갈 것을 제시한다.
대학의 변화와 위기상황
저자는 말기적 증세를 보이는 세계의 유일체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핵심부(유럽, 미국, 일본)와 주변부의 노동 분업과 세 가지의 문화적.지적 발판에서 본다. “보편주의 규범과 인종주의/성차별주의 관행의 역설적인 결합, 중도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지구문화, 두 문화 사이의 인식론적 구분에 기초한 지식구조가 그것이다.” (98쪽)
월러스틴은 현대사회의 기술과 부의 축적이 상위 20퍼센트와 하위 80퍼센트 간의 양극화 대가로 가능하며, 양극화는 경제적.정치적.사회적.문화적 양극화라고 규정한다.
오늘날 세계체제의 구조적 위기는 지식의 구조, 특히 세계의 대학제도와 과학적 보편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세계구조의 작동과 정당화에서 지식의 구조가 필수적인 탓이다. 지식의 구조는 세계체제 유지에 가장 유용한 형태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후 대학은 중세 유럽과는 전혀 다르며, 대학은 자연과학부와 인문학부로 양분되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그때부터 자연과학자는 가치와 무관한 진리추구에 몰입했으며, 인문학자는 선과 미, 가치추구에 매진하였다. 양자의 긴장관계는 1945년 이후 고가의 복잡한 기술이 과학자의 전유물이 되면서 인문학자가 뒤처지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분리됨으로써 사회과학의 모호한 경계와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까지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은 사회과학으로, 역사학, 인류학, 동양학은 인문학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68혁명으로 학문의 세 기둥이 근본적으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대학은 시간제 교수진과 일반 교수진의 이중구조가 고착화되고, 교수들이 연구 성과를 판매함으로써 대학의 시장화가 가속되고 있다. 대학의 위기가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지식인을 위하여
오리엔탈리즘은 계속 약화되었지만, 과학적 보편주의가 그 뒤를 잇고 있다고 그는 판단한다. 진리추구는 과학에게, 선과 미의 추구는 인문학에게 부여함으로써 보편적 진리는 과학자가 제시한다는 주장을 일컫는다. 개입할 권리, 오리엔탈리즘, 과학적 보편주의라는 세 가지 양상으로 전개된 유럽적 보편주의를 대신할 보편적 보편주의를 저자는 제기한다.
“보편적 보편주의는 사회현실에 대한 본질주의적인 성격부여를 거부하고,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모두를 역사화하며, 과학적인 것과 인문학적인 것을 단일한 인식론으로 재통합하고,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개입을 위한 정당화 근거를 객관적이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138쪽)
보편적 보편주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식인의 구실이 중요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식인은 분석가로서 진리를 추구하고, 윤리적 개인으로서 선과 미를 추구하며, 정치가로서 진선미를 통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상호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세 가지 차원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거짓된 ‘가치중립성’의 족쇄를 벗어야 한다고 그는 충고한다.
전문가이자 다방면에 걸친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서 지식인은 학문적인 분석을 역사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체계는 역사적이며, 모든 역사는 체계적이다”는 명제를 내세우면서 그는 구조분석이 가능해야 부분이해도 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향후 25-50년 동안 전개될 이행기 세계체제 분석과 이해 및 대안선택을 위해 행동하는 지성을 강조한다.
글을 마치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되풀이되는 후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목도하면서도 대한민국 정부와 보수언론은 여전히 경쟁제일주의와 경쟁력 타령에 여념이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숱한 부작용으로 인해 퇴출직전에 있는 일제고사 시행부터, 대학에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에 새겨진 ‘국제경쟁력강화’가 그것이다.
고갈지경에 이른 세계경제의 근본위기를 통찰하지 못하고, ‘지금’과 ‘여기’에 함몰된 우물 안 개구리들의 어리석은 합창경연이 오늘도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잘 나가는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국ㆍ공립대학을 기업화하며, 특목고를 우대하고, 자립형 사립학교를 대거 세움으로써 공교육 붕괴와 말살을 자초하는 한 이 나라의 앞날이 밝을 리 만무하다.
앞 다투어 ‘글로벌’을 노래하고, ‘세계초일류’와 ‘무한경쟁’과 ‘경쟁력 극대화’를 외치는 2009년의 부박한 대한민국! 진정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자 한다면 나 혼자 잘 살겠다는 얄팍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지구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행복한 인류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야망과 기획에 허심탄회하게 헌신함이 어떻겠는가!
<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임마누엘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창비,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