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위에서 김순진, 이영도 두 노동자가 내려올 채비를 하는 동안 그는 말없이 굴뚝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어떤 생각이 드느냐는 나의 거듭된 질문에도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목은 이미 너무 오랜 세월 꽁꽁 묶여 봉합 당한듯 하다. 해고당하고 보낸 세월 육년간 최고 슬픈 날이 명절이었는데 올 명절도 우울하고 슬픈 명절이 될 뻔 했는데 이영도, 김순진 두 동지가 땅을 밟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는 용인기업 권오균 지회장. 해고 당하고 고생한 세월 육년만큼이나 길고 끔찍한 지난 몇 달이 지나갔다. 만감이 교차한다는 그의 말처럼 용인기업 노동자들의 복직 투쟁에서 시작된 싸움에 세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걸었고 수천 명의 노동자가 울산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수만 명, 아니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이 절박한 연대 투쟁을 알게 되었다. 이 엄청난 파동을 누군들 예상이나 했을까.
“맘이 너무 편합니다. 맘 무겁게 설 쇠러 갈 뻔 했는데 맘이 너무 편합니다.”
모처럼 뒷짐을 지고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는 그저 맘이 편하다고만 한다. 그동안 우리들 모두 얼마나 불편했던가. 애타는 겨울 가뭄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릴까봐 노심초사했고 눈이 내리는 날도 하늘을 향해 원망을 하질 않았던가. 이제 굴뚝에서 그들이 내려 왔다. 이번 설날, 떡국 먹다가 체할 걱정일랑 거두어 두자.
“다행이죠. 하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에요. 현대가 수없이 합의를 해왔지만 박일수 열사 투쟁 때도 이 합의서를 다 어겼단 말이에요. 앞으로도 이 합의서가 휴지 조각이 될까 걱정이에요.”
얼마 전까지 감옥에서 미포조선 투쟁을 함께 하느라 살이 많이 빠져 버린 배문석 민주노총 문화국장이 앞으로의 우려와 다짐을 이야기 하는 동안 굴뚝 위로 119 헬기가 다가가고 있다. 굴뚝 위의 두 노동자를 안전하게 헬기로 이동시키는 동안 헬기의 날개는 큰 소리를 내며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헬기가 하늘에 떠있기 위해서는 저 날개가 쉼 없이 돌아가야 한다. 날개가 쉼 없이 도는 동안은 둥근 원모양이 된다. 우리의 걱정과 우려, 다짐도 한데 묶어 저 헬기의 날개처럼 둥근 원을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도 헬기처럼 날 수 있을지도, 그럴 지도 모른다.
“김순진,이영도 두 동지 너무 고생 많았고, 아쉬운 합의지만 이번 투쟁을 경험으로 더욱더 민주노조를 올곧게 세우는데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해 갑시다. 지역에 동지들하고 전국에서 연대해 주신 동지들 너무 고맙습니다. 2009년엔 이명박 정권 타도 투쟁에 더욱 힘써 투쟁해 갑시다.”
오랜 세월 미포 해고 노동자로 살면서 누구보다도 미포 조선 사업장의 민주화를 바랬던 노동자 김석진. 집회장에서 늘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는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듯 했다. 구호를 외칠 때도 노래를 부를 때도 그는 자주 낮은 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난 날은 너무 무거웠다. 그의 삶도 너무 무거웠다. 앞날을 예감하는 그의 목소리도 너무 무겁다.
“정규직이 중심이 되어 비정규직 투쟁을 함께한 이 투쟁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울산에서의 이런 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굴뚝 투쟁을 정리하면서 굴뚝 아래에서 함께한 열흘간의 동조 단식을 정리하는 조승수 전 의원의 검은 얼굴로도 선한 웃음이 번진다. 정말이다. 이 투쟁이 아름다운 건 경계가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나또한 그 사랑에 감염되었다. 바보같은 사랑을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