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이래, 세계적으로 일자리투쟁이 당연한 삶의 요구를 위한 최우선 투쟁이 되었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체제를 지양하는 운동이었다기보다는 노동을 위한 투쟁에 집중하게 되었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유지시키려는 것과 노동자를 노동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노동자가 선택해야 할 투쟁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선택은 간단해 보이지만, 현실에서 그 간단해 보이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왜곡되고, 대다수 노동자들은 먹고 사는 일에 쫓기며, 일자리 지키기가 최선의 방어이자 투쟁으로 여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으로부터 해방이란 상상력조차 박탈시켜왔다.
일자리 '방어 vs 해방'
다시 경제공황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국내적으로는 1997년 IMF 경제위기와 세계적으로는 1929년 세계대공황에 견주며 현재 위기의 심각성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경제위기는 노동자와 서민의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면서 다시 일자리-지키기, 나누기, 만들기-와 관련된 정책들이 사회정책의 핵심과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노동자와 서민의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진보진영뿐만 아니라, 수구보수정권에게까지도 매우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예산안 통과 이후 2009년 발표된 경제운용방향에서 일자리 지키기·창출 방안, 서민·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MB정부의 태도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짚고 가야한다.
MB정부 불안정 일자리 강요
MB정부는 ‘2009년도 경제성장률’에 대해 한국은행, 국내·외 연구소와 신용기관 등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며 3%라고 밝혔다. 내년도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일자리정책과 경제정책으로 경제성장률 3%달성은 가능하다고 홀로 외치고 있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의 내용으로는 청년실업에 대한 인턴제, 고용유지 지원금 상향지원, 기간제 근로자 및 비정규직 사용기간 제한 완화, 비정규직 파견허용 업종 현 32개에서 대폭 규제완화, 단시간 근로활용장려, 근로시간 단축지원금 확대, 최저임금제 부분적 완화 등이다. 또한 SOC사업 확대를 통한 토목·건축분야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기대하고 있다. 일련의 일자리 지키기 및 창출방안이 노동조건을 더욱 열악하게 한다는 점과 불안정한 노동을 확산시킬 뿐이라는 비판에 대해, 지금은 위기의 시기이고 이러한 때,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는 어떠한 일자리라도 유지해가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MB정부의 노동과 복지에 대한 시각이다.
MB정부의 능동적 복지에서는 “일이 곧 복지”이고,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노동을 통해 복지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과 복지를 양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전제로 한 복지급여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노동을 목적으로 복지를 연계시키는 것을 ‘노동연계복지(welfare to work)’ 또는 ‘근로복지(workfare)’라 한다. 복지에 있어 노동력 유무를 따지기 시작했던 역사적 기원은 1600년대 영국의 구빈법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20세기 이후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으로 현대화되었다. 노동과 복지를 연계하는 방식에 있어 유럽적 전통과 미국적 전통의 차이가 존재함에도 한국에는 미국식 방식의 노동연계복지로의 수렴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식이라 했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복지의 권리를 시민권으로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매우 제한적인 대상에 대한 국가의 원조로 사고한다는 점과 문제의 발생을 구조적 원인에서 찾기보다는 개인의 노동윤리나 계층적 문화에서 기인한다고 보기 때문에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므로 노동연계복지를 통한 탈빈곤 효과나 사회통합의 효과는 그리 높지 않다.
루즈벨트 뉴딜정책은 가장 자유방임적 경제체제를 유지했던 미국이라는 곳에서 자본과 노동의 타협을 시도하고 유도했다는 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자본은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에 기인한 자금회전의 보장을,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조치(해고보호, 최저임금 기준, 노동시간 40시간 이하로 축소 등)와 사회적 안전망(실업급여, 농민대책, 공공사업전개 등)을 최초로 획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요소가 있음에도 현재 MB정부는 그들이 루즈벨트 시기의 뉴딜정책을 적용하고 있는 양 호도하고 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뉴딜이 우리의 요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뉴딜정책, 더 크게 케인즈주의식 개입주의 전략을 통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에 기인한 이윤율 하락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황을 계기로 한 또 다른 자본주의 생산체제, 그것이 대안적 또는 개량적 정도의 차이가 어떻든지 과연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가?
본원적 질문은 잠시 뒤로 하고, 당장 생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현 시점, 2009년 우리는 어떤 사회정책적 대안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노동과 소득보장에 대한 분리적 사고를 노동자·시민들이 먼저 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기초생활수급자나 저소득층에 대한 국가지원이 허투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러나 대량 실업과 자영업 도산이 예상되는 시점에서 더 이상 소득단절은 시장으로부터 배제된 몇몇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사회문제이다. 그러나 한국 복지제도에서 이러한 위기에 대응할 만한 보편적 소득보장제도가 없다. 정부가 제시하고 있는 저소득층 가구 긴급복지지원, 실직·폐업으로 인한 근로 빈곤층의 계비지원, 영세 자영업자 고용보험 가입 허용 등은 저소득층 중심의 한시적 지원이라는 한계와 기존 조건부 수급(생계비수급을 위한 직업훈련이나 구직활동 필수)의 한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2009년 예산안에서 기초생활보장에 대한 예산을 약 326억이 감액한 점을 보면 새삼 정부가 새로운 예산을 조성한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 이에 노동과 일자리를 전제로 한 사회복지급여 설계가 아니라, 그야 말로 생존과 사람답게 살기 위한 매우 보편적 의미의 사회수당제도에 대해 적극 요구할 필요가 있다. 노동을 조건으로 한 급여형태의 발전은 근로유인력을 높인다는 점에서 다각적으로 각광받아왔으나, 현재의 문제는 개인의 노동윤리나 복지에 대한 무임승차욕구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모두에게 돌아갈 일자리가 없다는 점이다. 이 구조적 문제를 더 이상 개인의 능력이나 윤리 그리고 책임의 문제로 초점화하는 것에 전면 반기를 들어야 한다. 재원형성과 현실 가능성에 발목 잡히지 말고,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것이 우선이다.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헌법 10조에 보장되어 있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한 권리를 가진다”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소위 "대운하.형님예산"으로 지칭되는 "2009년 예산안"이 통과되었다. 2009년 예산의 가장 큰 특징은 참여정부 기간 동안 약 2%정도에 불과했던 SOC예산이 무려 26% 증가하며 24조7천억 원이 배정되었다는 점이다. 반면, 경제위기시기 더욱 강화되어야할 복지예산은 올해와 비교해 7조원 증가했으나 5대 사회보험의 자연증가분과 기초노령연금 확대실시에 따른 증가분을 제외한다면 실제로 감소되었다. 보건복지예산은 74조7천억 원으로 약 10%정도의 증가했으나 재정지출증가율인 11.5%에 못 미쳤다. MB정부는 예산안 제출시기부터 2008년 대비 보건복지예산이 9%이상 증가했다고 발표해왔으나, 국가예산이 해마다 증가하고, 사회보험기금으로 운용되는 제도의 확대에 따른 기금확대를 감안한다면, 예년대비 증가액이나 증가율은 실질적인 복지예산 증가로 평가할 수 있는 수치로는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당해 연도 총 재정지출 대비 보건복지예산의 비중이나, 하위 사업별 증감비교와 같은 분석을 통한 내용적 증감을 분석해 봤을 때, 증가가 아닌 감소적 경향이 짙다. SOC를 통한 새로운 일자리창출을 선전하고 있지만, 24조7천억 원의 공적자금이 결국 건설자본 수중으로 고스란히 돌아갈 것은 뻔한 일이다. 이에 새로운 일자리 창출,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란 담론에 대한 진보진영의 제도적 개입이 중요할 것이다. 공적 자금 투입에 대한 사회적 결정권을 회복하고 노동자, 서민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는 제도설계가 마땅히 요구된다.
그러나 더불어 우리는 지금 이 위기의 시기에 동시에 고민해야한다. 노동에 대한 투쟁이 과연 누구를 위한 투쟁이고,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투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자본주의 생산체계 형성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보고 이루어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