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로 각국의 부르주아 진영에서도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거론하는 마당에, 이명박은 ‘신자유주의만이 살 길’이라고 밀어붙인다. 자본과 부자에 대한 감세정책(종부세, 법인세 감세)을 통한 성장동력 창출이 그러하고, 미국식 거대 투자(투기)은행을 만들기 위해 자통법, 금산분리 완화법, 산업은행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이 그러하다. 또 노무현 때 타결된 한미FTA 국회 비준을 적극 시도하는 것도 있다.
거꾸로 가는 게 이명박뿐이랴.
이미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린 ‘민주대연합’의 망령이 부활하고 있다. 그 부활의 계기는 이렇다. 12월 27일 방북하고 돌아온 강기갑 민노당 대표가 김대중을 방문했는데, 김대중이 이명박 정권 하 ‘남북관계 파탄, 민주주의 위기, 경제위기와 서민의 고통’을 비판하며, 이명박 정권에 맞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시민사회단체가 굳건하게 손을 잡고 광범위한 민주연합을 결성해 역주행을 저지하는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대중의 제안 이후 곧바로 ‘민주당-민주노총 회담’, 야 3당 (민주당, 창조한국당, 민노당)의 '남북관계 위기 타개를 위한 비상대책회의'(비상대책회의)가 성사되었다. 그리고 12월 4일에는 한국진보연대가 주도하는 ‘민생민주국민회의(준)’과 야 4당(민주당, 창조한국당, 민노당, 진보신당), 400여 개 시민단체들이 공동주최하는 '경제·민생위기 극복을 위한 제 정당·원로·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연석회의)가 열렸다. 실로 짧은 시기 내에 민주대연합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이다.
크게 뭉쳐 이명박에 맞서 싸우면 좋은 거 아닌가?
“독재정권, 과거로 회귀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 민주당과 민주노총이 국민에게 힘을 줘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리(민주당-민주노총 회담)를 마련했다.”(이용식 민주노총 사무총장), “민주세력들이 함께 ‘큰 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
언뜻 보면 그럴 듯해 보인다. 현재 남북관계 경색, 한국경제 위기와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인한 대중 삶의 파탄, 민주주의 악화를 막아내기 위해, 공공의 적(?)인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총결집해야 한다는 논리니까. 그러나 민주대연합의 주체와 내용, 즉 그 ‘성격’을 보면 민주대연합은 이제까지 어렵게 일궈온 노동자 민중 투쟁의 성과를 뿌리째 뽑아낼 것이다.
대연합의 주체; 민주당은 노동자민중의 동지인가?
우선 문제가 되는 게 민주대연합의 주체문제다. 민노당, 진보신당, 한국진보연대(민생민주국민회의), 민주노총은 이명박 정권에 맞서기 위해서는 ‘모든 민주세력이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솔선하여 김대중과 보수야당에 대한 적극적 연대 행보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김대중이 누구인가? IMF 위기를 활용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인 당사자이자, 대우자동차 등 구조조정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공권력을 투입해 탄압한 책임자다. 민주당은 또 누군가? 노무현 시절 집권여당 역할을 했던 신자유주의 개혁정당 아니었는가. 한미FTA를 타결짓고 주한미군을 위해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미국의 대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며 한국을 제국주의 침략동맹의 하위파트너로 만든 집권여당의 후신이 그들이다.
이런 자들과 노동자민중의 이해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지금은 야당이 되어 잃어버린 권력에 대한 동경으로, 도저히 오를 줄 모르는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그럴듯하게 변신한 듯 가장하지만, 그들이 본질은 자본가계급의 정당일 뿐이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일언반구 반성조차 없다. 이런 세력들과 ‘차이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느니, ‘모든 민주세력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는데, 이들과 같이 할 근거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대연합의 내용; 보수야당에 포획된 노동자민중운동
민노당이 민주대연합을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행동은 [비상대책회의]였다. 실제 민노당 박승흡 대변인은 “민주대연합의 관건은 우선 개성공단을 살려야 한다는 절실함”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손호철 선생이 “대북정책과 관련된 반MB연합보다 더 시급한 것은 민생을 지키기 위한 반신자유주의연합”이라고 비판한 것은 실로 적절하다. 게다가 [비상대책회의]의 공동선언문은 “6.15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의 실천적 이행”, “개성공단 활성화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키워나가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중소기업의 희망을 지켜내겠습니다. 남북관계 위기극복을 통해 세계경제 위기도 극복하는 위대한 한민족의 힘을 확인할 것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화해협력-경제협력을 진행시켜 남한자본의 새로운 이윤착취처로 북한지역을 편재한다는 김대중/남한자본의 구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은 내용이 바로 민노당이 합의한 공동선언 내용이다.
게다가 연석회의의 ‘경제위기-민생위기 극복을 위한 3대 방향’과 ‘10대 요구안’은 보수야당까지 포괄하니, 현 경제위기 시기에 필요한 노동자민중의 중요한 이해와 요구가 빠져 있다. 한미FTA, 금융(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및 운동 금지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가 없다. 또 산업은행 민영화 저지와 공적 자금이 투입된 기업에 대한 사회화 및 노동자민중의 통제 등은 언급도 없다. 기조가 국가 재정지출 확대를 통한 사회적 복지 확대와 강만수의 경질과 거국민생내각 구성이다. 이 요구들은 최근 민주당이 주장하는 정책과 별반 차이가 없다. 민주당은 최근 한미FTA에 대한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사회적 안전망 구축의 불가피함과 대정부 공세 차원에서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정도다.
노동자민중운동의 역사;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역사
87년 이후 노동자민중운동의 역사는 조직 건설과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민중이 보수야당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서 나간 역사이기도 하다. 87년 6월 항쟁 당시 힘이 없었던 노동자민중운동은 보수야당과 재야세력이 주도한 ‘민주화쟁취국민운동본부’의 지도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6.29선언’ 이후 모두가 대선만을 바라보고 투쟁을 멈추었을 때, 혼자서 투쟁을 이어나갔다.
90년대 초 전노협 결성 등 급성장한 노동자민중운동은 보수야당과는 분립된 독자적인 ‘전선 운동체’를 만들면서 노태우 정권 퇴진투쟁의 주체로 섰다. 92년 대선에서는 민족주의세력의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비판하며, ‘백기완 후보’를 노동자민중후보로 내세우는 독자후보 투쟁을 조직했다. 93년 문민정부(김영삼 정부) 등장 이후엔 ‘정부 내 개혁세력의 입지를 좁힐 수 있으므로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김영삼 의지론(?)이 널리 퍼졌지만, 현총련 노동자들과 전해투 동지들은 그 환상을 투쟁으로 깨나갔다. 96·97 총파업을 경과하면서는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당(민노당)을 건설함으로써, 보수야당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자신을 세워냈다(민노당 건설 주도세력의 정치적 노선의 문제점, 민노당의 활동과정에서 보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의 결과로 노동자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대중적 차원에서 외쳐지고 추진되었다는 발전적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즉 노동자민중운동은 87년 대투쟁을 출발로 10여 년 간의 투쟁과 갖은 우여곡절을 거쳐 보수야당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벗어나 독자적인 투쟁의 주체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서나 간 것이다.
민주대연합, 지금이라도 폐기할 때
그런데 노동자민중투쟁의 역사를 무화시키는 민주대연합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민노당과 진보신당, 민주노총 등이 민주당과 손잡음으로써 김대중은 졸지에 민주대연합의 구심(?)으로 떠올랐다. 민주대연합이 계속 추진된다면 07년 대선과 08년 총선에서 심판당하고 촛불투쟁에서도 대중적으로 거부당한 ‘민주당 살리기’에 민노당과 민주노총, 진보신당이 일조할 수 있다. 민노당과 민주노총은 더는 ‘민주대연합’ 성사를 이유로,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핵심 정책인 한미FTA 등에 대해 눈감아선 안 된다. 또한 이후 지자체 선거 승리를 위하여 보수야당과 공조하는 추잡한 제도권정당의 합종연횡 작태를 벌여서도 안된다.
진보신당 마저 ‘비상대책회의’에 대해 “많은 단체와 인사가 함께 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라며 참여를 공식 발표했다. 진보신당의 ‘연석회의’ 참여는 진보신당의 활동이 신자유주의 반대의 원칙을 무시하고서라도 제도정치 안에서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연석회의’의 성격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의회입성을 위해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올 총선에서 심상정 대표가 민주당과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면서 받았던 비판에 다시 직면할 것이다.
"민주당이 무엇이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민주당과 정책적으로 차이점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당 지도부의 가장 큰 문제"(민노당 당원 발언)
위와 같은 쓴 소리처럼, 노동자민중운동이 지금 역량을 쏟아야 할 데는 보수야당과의 연대/연합이 아니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투쟁이 아니다. 경제위기 시대에 노동자민중의 삶과 호흡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보수정당과는 다른 대안과 정치적 전망을 제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 경제위기와 민생파탄의 원인이 정권뿐만 아니라 자본에게도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방어를 넘어, 한국경제를 노동자민중을 위한 경제로 재편하는 노동자민중운동의 공동투쟁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 경제위기 국면에서 노동자민중의 삶을 지키는 것이자, 노동자민중운동의 독자적 역량을 강화하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