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영구적 IMF, 해체된 생의 시간, 대우자동자판매 노동자

[기고-미행(美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에서 노동의 권리를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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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화 거부’

11월 13일 오후. ‘미행’ 프로젝트에 동승하기 위해 진보신당 당사가 있는 여의도를 찾았다. ‘미디어행동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자’는 취지에는 열렬히 공감하지만 곰곰이 따져볼수록 이 문제가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막막하게만 느껴져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노동자들과 인터뷰를 해야 한다던데, 입이 잘 떨어질 것 같지 않다. 진보신당 당사 근처에서 <특수임무수행자회>가 걸어놓은 초대형 현수막을 보았다. 방금 먹은 점심밥이 거꾸로 올라오는 듯해 얼른 시선을 돌려보지만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순복음교회—한나라당—특수임무수행자회의 기막힌 트라이앵글! 그래 이 여의도를 빨리 뜨자, 미행이나 하러 가자!

내가 찾아가기로 한 투쟁사업장은 둘 다 자동차관련 업종이다. 하나는 생산업체(‘쌍용자동차’)고 다른 하나는 판매업체(‘대우자동차판매’)다. 자동차산업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미 10년 전부터 포화상태다. 극심한 경쟁과 인수합병, 상시적 구조조정이 거듭되는 전쟁터다. 올해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가불안의 직격탄을 맞아 소비시장까지 잔뜩 얼어붙은 상태다. 생산과 판매가 더욱 움츠려들 수밖에 없다. GM대우가 생산라인 일부의 조업을 중단시켰다는 뉴스가 나오고 GM본사가 도산할 수 있다는 놀라운 얘기도 들린다. GM대우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모든 자동차산업, 아니 IMF 때처럼 경제 전체로 불황이 확산될 것 같다. 비정규직은 말할 것도 없고 정규직의 운명도 풍전등화다. 상당수의 기업들이 불황의 터널 속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 이런 악조건에서 소수의 비정규직 노조가 자신들의 요구―일단, ‘고용안정과 정규직화’라고 해두자―를 관철시킬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보인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데 이 가난한 노동자들이 거대자본과 ‘자본의 친구’를 자처하는 국가권력을 향해 던지는 계란이란 게 무엇이겠는가? 다름 아닌 자신의 몸뚱이와 가족들의 생계이지 않은가. 생존을 건 이들의 투쟁 앞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둥 없다는 둥 함부로 떠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입을 꾹 다문 채, 파업농성이 벌어지고 있는 인천 부평구의 대우자동차판매(대우자판) 본사로 향했다. 대우자판 영업직 노동자들은 벌써 2년째 회사의 부당한 ‘대기발령’과 싸우고 있고, 또 그로 인한 생활고와도 싸우고 있다(대기발령 상태에선 월급이 기존 임금의 절반인 5~60만원 정도만 지급된다고 한다). 삼십대에서 오십대에 이르는 가장들에게 생활고란 그저 ‘먹고살기 힘들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다. 그건 사랑하는 가족이, 당장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일로 무너져가는 모습을 지켜봐야하는 고통이다. 회사는 직원들의 그런 아픔을 모르는 걸까? 아니지, 사측은 그런 약점을 파고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데도 버틸 수 있나 보자!’ 이 부조리한 싸움에 도대체 무엇이 걸려있는 것일까? 긴 얘기를 해야겠지만, 한마디로 줄이자면, ‘비정규직화 거부’다.

[출처: 미행(美行) 제공]

‘누가 갇혀있고 누가 자유로운 건가?’

여의도를 출발해 30분쯤 차를 모니 대우자판 본사 앞이다. 앞에까진 왔는데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정문 밖에선 전경들이, 안에선 용역경비원들이 출입을 막는다. 가까이 다가서보니 커다란 청색 철문 한쪽은 닫혀있고 다른 반쪽은 소형 트럭 한 대가 막고 서있다. 트럭은 오래 방치된 폐차처럼 지저분했고 짐칸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제멋대로 쌓여있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차의 초라한 행색이라기보다 차가 취하고 있는 어정쩡한 포즈였다. 트럭은 회사를 나오다가 정문에서 시동이 탁 꺼지기라도 한 것처럼 짐칸은 회사 쪽을 향해, 운전석은 회사 밖을 향해 내민 채 정지해있다. 어디선가 날아와 박힌 유탄처럼 보이기도하고, 연좌시위를 하다 드러누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찰과, 사정인지 항의인지 모를 실랑이를 한참 한 후에야 회사 안에서 농성중인 대우자판 노조원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들은 회사 밖으로 나올 수가 없고, 우리는 회사 안으로 들어가질 못하니 인터뷰를 하려면 문턱에 멈춰선 트럭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트럭은 그렇게, 임시 면회소가 됐다. ‘누가 갇혀있고 누가 자유로운 건가?’ 대학생시절 들었던 물음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트럭은 회사 문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열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도 같다.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걸까?

[출처: 미행(美行) 제공]
“11월 4일, 사측은 구사대와 용역깡패 수백 명을 동원해 우리를 강제해산시키려 들었습니다. 두 명의 동지들이 피를 흘리며 병원에 실려 갔어요. 경찰은 방조하고, 용역깡패들이 행패를 부려 며칠 동안 음식조차 들여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감금상태나 마찬가집니다. 사측에선 전기를 끊었고 하드디스크가 없어졌다며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를 절도범으로까지 몰고 있습니다. 밤엔 촛불을 켜고 콘크리트바닥에 웅크려 자는데 가족들과 연락할 수 없는 게 제일 괴롭습니다.” 차분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하는 김진필 노조 지회장의 덥수룩한 수염이 하얗다. 짧게 자른 머리도 반백이다. 작은 키, 다부져 보이는 체구, 온화한 눈빛을 가진 중년의 노동자다. 그러나 “우리는 사측의 불법 부당행위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때, 그는 회사 안을 어슬렁거리는 새파란 용역깡패들 모두의 젊음을 합한 것보다 더 젊고 단단해 보였다. 허어 이 양반들, 회사는 업무방해로 고발을 하고 공권력은 범법자 취급을 하고 여론은 냉담히 침묵하고 (한 노조원의 표현을 빌자면) 집에선 “나쁜 남편, 나쁜 아빠”가 다 됐는데,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 걸까?

두 개의 이상한 결정

2006년 가을, 대우자판은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이상한 결정 두 개를 통과시킨다. 하나, ‘DW&직영판매’라는 신설법인을 세워 승용차직영판매 사업을 이전시킨다. 둘, 533명의 판매영업직원 전부를 그리로 전적(轉籍)발령한다. 오늘 대우자판 노동자들의 무기한 파업농성은 그때 불씨가 당겨졌다.

대우자판은 GM대우가 만든 승용차를 대신 팔아주는 업체다. 사업다각화로 건설과 금융부문도 갖고 있지만 중심은 아직 승용차판매다. 어림잡아 자산규모 1조 5천억, 자동차판매 순익만 매해 200억을 오르내리는 회사가 고작 자본금 10억짜리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주력사업인 승용차판매 전부를 ‘위탁’시키겠다니, 언뜻 이해가 안 된다. 경영자가 어떤 전략적 구도를 갖고 그러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노조와 아무 협의도 없이 내려진 이 결정―명백한 단체협약 위반―이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져오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DW&직영판매’로 갈 경우 현재의 정규직은 고용안정을 보장할 수 없는 비정규직(특수고용직인 ‘카 딜러’)로 변할 것이고 혹여 대우자판이 이 법인과의 관계를 정리해버리면 소속 직원 전원이 단칼에 해고당하는 꼴이 된다. ‘법인분할은 위장된 인력구조조정이자 불법적인 노조 와해 시도’라는 노동자들의 주장은 회사가 취해온 경영노선―직영점과 정규직을 없애겠다―으로 미뤄볼 때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노조는 즉각 반발했고 사태는 회사 울타리를 넘어 법정분쟁으로 비화됐다. 그런데 법원판결이 아주 애매하게 나왔다. 법인신설은 합법, 전적발령은 개별 노동자들의 동의가 없는 한 불법이라는 요지다. 사측은 해고위협과 압력―전라도에 사는 직원을 경상도 영업소로 발령내리는 식으로―을 통해 절반이 넘는 직원들로부터 신설법인으로 옮기겠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대우자판에 남은 건 200여명의 노조원들뿐이었다. 사측은 이들을 전원을 ‘대기발령’시키고 노조와의 단체협약까지 일방적으로 해지해버렸다. 앞으로 노조와 대면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의사표현이었다. 노조원들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농성에 들어간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강요된 선택’이나 다름없다. 더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곳―비정규직화를 거부하는 노동자들이 마지막에 서게 될 자리는 공권력과 용역깡패에 둘러싸인 무기한 파업농성현장 말고는 없단 말인가?

영구적인 IMF체제

“대우자판은 ‘노조원 블랙리스트’ 사건 등 이전부터 노조에 적대적인 사업장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사람들은 대우자판을 ‘노조파괴 종합전시장’이라고 부릅니다.” 회사 정문 밖에서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추위를 견디던 농성 노조원들의 목소리는 한결 같았다. 대우자판 판매영업사원들은 겉으로만 정규직이고 알맹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비정규직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비정규직화’가 무엇이기에 회사는 온갖 무리수를 둬가며 그걸 강요하고, 노동자들은 갖은 고생을 해가며 그에 저항하는가? 이 얘기를 하려면 다시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구조조정에 들어간 대우자판은 직원의 절반 이상을 잘라내는 대규모 인력감축을 단행한 끝에 2002년 워크아웃(workout)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이후에도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내는 워커-아웃(worker-out)은 ‘효율성’이란 미명 하에 한정 없이 계속돼왔다. 회사는 직영점들을 정리하고 판매영업망을 대리점들로 넘겨 관리했고 그 사이에 직원들의 급여는 본봉 대 성과급이 ‘7 대 3’에서 ‘3 대 7’로 역전됐다. 자동차 매니저(Car Manager)이던 직함도 판매대행자(Sales Representative)로 바뀌어있었다. 대리점이란 이름으로 외주화가 이뤄짐에 따라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는 집단이 생겨났고, 성과급은 시장경쟁에 따른 불안과 위험을 세일즈맨 몫으로 떠넘기는 효과를 가져왔다. 노동강도와 스트레스는 높아졌지만 출혈경쟁을 해도 수입은 꾸준히 떨어져갔다. 2006년엔 과로와 구조조정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동료(고 최동규씨)가 돌연사하는 모습까지 지켜봐야했다. 회사는 매년 수백억씩 흑자를 봤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악화일로를 벗어날 줄 몰랐다. 이제 노조원들이 본사 농성에서 백기를 들고 나오면 고용보장이라는 알량한 명목상의 권리마저 빼앗기게 된다.

[출처: 미행(美行) 제공]

이것은 대우자판 노동자들만의 사정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IMF위기를 졸업했는지 모르지만, 이 나라 노동자들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IMF체제를 ‘조기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태반이 ‘사실상의 비정규직’이라는 일상적이고 영구적인 IMF체제를 감내한다는 조건을 달고서였다.

지난 10년 동안 대우자판 노조의 역사는 바로 이런 과정, 노동의 알맹이를 빼가고 그 자리에 황량한 폐허와 진공상태―그 이름은 ‘비정규직’일 수도 있고 ‘쓰레기가 되는 삶’일 수도 있다―만이 남겨지는 추세에 대한 피눈물의 저항으로 점철돼있다. 노조원의 규모가 십분의 일로 줄었으니 그 싸움은 겉보기엔 패배의 내리막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싸우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패배한 게 아니다. 도대체 무슨 힘으로, 어떤 의지로, 뭘 믿으며 그런 싸움을 해왔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회사: 누적된 생의 시간들

“짧게는 십년, 길게는 이십년을 일 해왔습니다. 우리의 피땀이 없다면 지금의 대우자판은 없다는 걸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회사는 우리들의 삶이고, 우리 판매영업직원들의 노동이 쌓인 것이에요. 이동호 사장은 이런 것에 대한 존경심이 없소. 우리를 쓰다 버리는 부품 정도로 알지. 그런 자는 사장 자격이 없단 말입니다.“ 모닥불 앞에서 만난, 꽤 나이가 들어 뵈는 노동자 한 분이 격한 감정을 쏟아내자 주변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느끼는 공적인 분노의 감정은 언뜻 이해할만 하면서도, 일반적인 생각과는 어긋나는 낯선 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회사란 무엇이냐, 누구의 것이냐’라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대답과 일치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회사는 주주와 경영자들의 것’이라는데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이 회사를 생각하는 방식은 주주나 경영자가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르다. 노동자에게 회사는 일터이고 삶터이며 누적된 생의 시간들이지만, 권리상 기업의 소유주들인 주주와 경영자―그들 중에는 대우자판이 무슨 차를 파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에게 회사는 이윤을 내는 기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평생 농사를 지어온 소작농은 자신이 일궈온 땅에 애착을 느끼며, 그 땅과 일을 씨실과 날실로 삼고 제 삶의 시간들로 무늬를 수놓은 독특한 직물을 갖게 된다. 그 직물은 그의 인생이며 동시에 세계이므로 지상의 어떤 권리도 자신을 거기서 떼어낼 수는 없다고 여긴다. 비록 머리로는 이게 자기 땅이 아님을 알지만 말이다. 농사를 짓지 않는 지주는 소작농이 지닌 이 독특한 소유의 관념을 알지 못한다. 그에게서 강압으로 토지를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그때 지주가 빼앗을 수 있는 땅은 농부가 소유한 것과 같은 땅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도, 지주와 소작농에서와 같은 중요한 관념상의, 또한 정서상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이를 테면 노동자들은 직장에 돈을 벌기위해서만 오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은 ‘돈만 아니면 당장 때려치운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진실이다. 하지만 그 말은 그들의 처한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들이 행하는 노동의 진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화와 싸우는 대우자판 노동자들은 돈과 안정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아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그 자리에 저렇게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사실 돈과 안정, 즉 안정적 이윤증식에 목을 매는 것은 자본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동료들과 함께 살아왔던 과거 또 살아갈 미래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다. 삶터에 목숨 건 사람들이다. 그 삶터는 자동차 팔고 월급 받는 일, 즉 ‘직장’이란 개념과 일치하지 않으며 ‘일자리’란 용어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생존권투쟁’이라는 것을 최저임금이라도 보장받으려는 싸움 정도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우리는 그것을 노동의 알맹이, 즉 노동하는 인간이 만들어온 삶의 공동체와 공동체의 삶을 보존하려는 싸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경제와 더불어 사회라는 공동체 자체가 허물어져가고 있는 요즘, 우리가 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눈을 크게 떠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회사에서 폐차 취급을 당하며 밀려나 자동차판매원이라는 비정규직으로 내쳐지다가 회사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경계에서 고집스레 버티며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닌, 노동의 존재와 권리를 드러내기로 결의한 대우자판 노조원들의 투쟁은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대단히 의미 있는 싸움이며 그들이 수년째 힘겹게 투쟁하며 드러내 보인 저 경계 자체가 우리사회가 이제부터 답해야할 중요한 물음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와 시민의 경계

‘미행’이 대우자판을 방문한 날 저녁, 인근지역 노동자들과 민노총, 시민단체 회원들, 민노당과 진보신당 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여한 ‘장기투쟁사업장 투쟁 승리를 위한 문화제’가 열렸다. 규모는 작았지만 행사 막바지에 아주 뭉클한 장면이 있어 잊을 수 없는 자리가 됐다. 회사 담 밖에 모인 참석자들이 ‘동지들 힘내세요’라고 외치자 안에서 농성 중이던 대우자판 노조원들의 와와 하는 화답 함성이 희미하게 담을 넘어 들려왔다. 철조망이 쳐진 담장 위, 11월의 밤하늘 아래로 두 개의 함성이 몸을 섞었는데 그 울림에, 내 앞을 막막하게 가리고 있던 시커먼 장막이 툭 떨어져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담장을 넘나든 것이 어찌 함성소리뿐이겠는가.

문화제에 참석한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노동자들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관념을 깨지 않으면 각개격파 당합니다. 비정규직을 먼저 자르도록 방조해보았자 정규직의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지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자본가들이 세워놓은 교활한 분리장벽일 뿐입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노동운동은 망하는 길로 들어서는 겁니다.” 나는 이 얘기를 더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와 시민의 경계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하지 않는 시민이 얼마나 되는가. 거의 모든 시민은 임금노동자들이다. 노동문제를 자기 일로 받아들이고 함께 풀어가지 않는 한, 어떤 사회운동도 올바른 방향을 잡기 어렵다. 재테크로 자산을 불려 그 자산의 장벽 안에서 편히 먹고 살겠다는 식의 심성이 팽배한 사회에는 정말이지 미래가 없다.

한 정규직 노동자의 이런 탄식이 떠오른다. “수천억의 흑자가 나도 인건비 감축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정말 기가 막히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대기업들은 몇 년째 국내 신규투자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만약에 대비해 현금을 쌓아두고 금융이나 부동산 등 투기적 성격을 띠는 곳으로 몰려다닐 뿐, 일자리 창출엔 무관심하단 얘기다. 기업이 소명의식을 갖고 사업을 벌이고 또 그런 사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던 시대는 다 지나갔다. 그런 게 기업가들의 입에 발린 거짓말일지라도 한때 우리사회는 그런 신화 같은 얘기를 순진하게 믿었다. 자본가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거짓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윤 창출이 기업의 존재이유이며 ‘분배는 도둑질’이라고 떳떳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업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는 믿음을 무슨 자연법칙이라도 되는 양 신봉하고 있다. 나날의 삶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왜 그럴까? 몇 천주의 주식, 2억짜리 아파트만 갖고 있어도 ‘자본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자본가’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이건 순진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자본의 운명과 우리의 삶을 동일시하는 오류가 어떤 재앙이 되어 돌아오는가 하는 것은 이제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릴 지경이 되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은 대우자판 노동자들, 기륭전자, 콜트-콜텍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그들은 이기지 못할 싸움으로 생을 소진하고 있는, 불쌍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버티고 싸우며 지켜야할 어떤 곳에 한발 앞서 가있는 사람들이다.

부평(富平)의 그 낡은 트럭

프란츠 카프카가 쓴 「법 앞에서」란 제목의 짧은 우화가 있다. 한 시골남자가 법에 무언가를 청원하러 가는데 문 앞에서 그만 험상궂은 문지기의 제지를 받는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소. 자신 있다면 나를 제치고 들어가 보시오. 하지만 내 뒤로도 문지기들이 더 있고 나는 그 중 가장 약한 문지기라는 걸 잊지 마시오.’ 시골남자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세월이 흘러 숨이 넘어가려는 순간, 그는 문지기에게 묻는다. 법에는 호소할 일이 많을 터인데, 왜 나 말고는 이 문 앞에 청원하러 오는 자가 없느냐고. 문지기는 답한다. ‘왜냐하면 이 문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지. 나는 이제 가서 문을 닫겠소.’

이 우화는 법의 기묘한 권위에 눌려 정의로운 삶의 유일한 기회를 거머쥐지 못한 시골남자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들어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는 ‘불가능한 선택’에 고착된 채 하염없는 시간을 견뎌야 하는 생의 고통에 관한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색다른 의견도 있다. 이 얘기 속 시골남자가 실은 메시아라는 주장이다.

나는 대우자판 정문이 아주 닫히지 못하도록 열어두면서, 또 동시에 자본의 부를 상징하는 회사가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어리석은 환상을 가로막으면서 멈춰서있는 부평(富平)의 그 낡은 트럭을 떠올린다. 그 트럭처럼, 우리가 대세라고 믿는 시대적 흐름을 온몸으로 막고, 또 동시에 뚫고 서있는 노동자대오를 생각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에서 힘겹게, 그러나 당당하게 저항하는 그들의 존재에서 우리가 (어쩌면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을) 새로운 법과 정의의 열림을 보아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은 또다시 헛된 부의 욕망과 그와 짝을 이루는 반복적 생활고 사이에 고착된 채 속절없이 흘러가고 말 것이다.
덧붙이는 말

이 기사는 "미행(美行)":비정규직철폐를위한-미디어행동네트워크"의 첫번째 프로젝트인 지역순회 사업, "미디어게릴라들이 비정규노동자들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미행(미행)"은 블로거와 인터넷TV부터, 시민과 노동자, 작가와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디어 게릴라들이 함께 모여 비정규 노동의 현실을 고민하는 프로젝트 팀입니다. 미행의 지역순회 사업은 진보신당과 함께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