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 미국 민주당 오바마 후보가 마침내 미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에 당선됐다. 매케인은 일찌감치 패배를 깔끔하게 시인했으며, 개표결과 역시 압승을 거두었다. 44년만의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인종·연령·학력·소득·성별 등 모든 부문에서 고른 지지를 얻었다. 예외가 없었던 브래들리 효과(Wilder effect)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특히 버지니아, 네바다, 콜로라도, 뉴멕시코, 아이오와 등 전통적인 공화당 텃밭에서의 승리는 의미가 크다. 이와 함께 연방 상·하원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모두 과반의석을 넘어서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강력한 통치기반을 구축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번 선거는 처음부터 전 세계적으로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차별과 억압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흑인과 여성에 의해 최초의 흑인 대통령 또는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미국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패권주의에 대한 반발과 백인 우월주의가 내재된 서구중심의 글로벌 정치·경제 역학구도에 대한 거부감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 대해 지구촌 전체가 다양한 흥분과 열광을 보여줬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는 각각 오바마에게 축전을 보내는 매우 이례적이고 신속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과 적대적 관계인 이란과 쿠바에서도 잇달아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처럼 오바마의 열풍이 지구촌 곳곳에 불면서 당선을 염원하는 여론이 고조된 것은 오바마의 세계관이나 정책이 부시와 다르기도 하지만 흑인이라는 점과 비주류이면서 소수자라는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비서구에서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앵글로 색슨, 백인, 신교도)가 근간을 이루는 미국의 지배체제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특별한 것은 인순이의 ‘거위의 꿈’이나 아바(ABBA)의 ‘I have a dream’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진한 감흥과 인간적·운동적 위치를 담보하고 있는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의 희망이 45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하나의 계기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바마의 당선은 오랜 전부터 준비된 매우 의미있고 역사적인 ‘흑색혁명’인 것이다.
역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오바마의 당선으로 인한 미국의 정권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된 단순한 게임에 불과하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측은 이라크전의 패배가 명백해 지고 2006년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의원 모두를 석권하면서 부터였다. 그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된 것이다. 즉 이라크 전쟁과 9.11 이후 네오콘들의 안하무인적 일방주의 그리고 금융위기 등 부시 행정부의 8년 실정(失政)에 대한 심판론이 유권자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미 국민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피로 증후군으로 인해 극도로 성질이 뻗친 상태였다. 전쟁으로 인해 천문학적 전비가 지출되는 사이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가 닥쳤으며, 금융위기는 실물경제 위기로까지 확산되면서 ‘고난의 행군’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 선거의 핵심 쟁점은 경제문제였다. 아칸소 촌놈 클린턴이 아버지 부시를 무너뜨린 무기도 역시 경제였다. 민주당이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것은 뉴딜 노선에 대한 자본의 거부 반응, 그리고 총론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하지만 각론에서는 공화당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일부 자본분파들의 ‘신민주당 노선’에 대한 지지에 크게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아버지 부시가 걸프전에서 이기고도 재선에 실패한 것은 그 만큼 경제적 부담을 헤어나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1996년 대선에서 승리,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이후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민주당 대통령이 된 이유도 바로 경제, 일자리 창출, 사회안전망 등 뉴딜 프로그램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이 지속된 미국은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 시장의 붕괴 이후 1933년 시작된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통해 미국 사회는 방향을 틀었고, 중산층 중심의 사회로 재편된 것이다. 그러나 중산층 중심의 사회는 70년대 이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인종문제로 ‘뉴딜연합’이 와해되고 백인들의 반발에 기반한 보수주의 운동이 공화당을 장악하고 나아가 대선에서 승리하게 된 게 결정적이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경제위기와 함께 뉴딜연합의 붕괴를 가져왔다. 하지만 뉴딜 프로그램을 옹호한 클린턴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할 것처럼 보였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국제 정세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확대되어 현 부시에게 권력을 넘겨줄 빌미를 제공하였다. 소말리아 개입과 코소보 사태, 그리고 이라크 공습이 이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클린턴이 집권했던 90년대는 생산의 팽창이 아닌 금융팽창에 기반한 ‘신경제’의 환상을 촉발한 시기였다. 미국의 신경제가 금융적 팽창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보니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졌는데, 신경제의 본격적 번영기인 1990년대 말에는 오히려 최고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클린턴이 사회보장비를 대대적으로 삭감하여 일시적으로 재정적자를 재정수지 균형으로 돌려놓았지만 9.11 이후 전쟁준비가 가속화되면서 미국은 다시 재정적자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금융화에 기반한 신자유주의는 심각한 문제들을 양산하게 되어 미국경제의 불안정성을 증폭시켜 결국 미국발 세계경제위기를 가져온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이 습관적인 자뻑과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놀이를 즐기는 사이에 전세계 민중들의 고통은 심화되었지만, 공교롭게도 이에 비례해서 제국의 모습은 더욱 흉물스럽게 변해 가면서 서서히 폐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라는 괴물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이들의 절박함에 대해 민중들은 냉소와 비웃음으로 화답했지만 자본의 총단결과 부르주아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위기를 봉합해야 했다.
미국발 경제위기는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시기에 시작된 미국의 제국적 길의 향방을 결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문제의 발단은 2000년 5월의 닷컴버블 붕괴와 9.11 이후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실시된 미국의 저금리 정책과 주택경기 부양정책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미 2년 전부터 앞으로 발생할 위험에 대해 상당히 심층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런데 미 대선을 코앞에 두고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금융시장을 붕괴시킨 것은 다소 의아스럽다.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주도해온 미국에서, 신자유주의를 거부해온 대통령의 등장은 미국 경제뿐 아니라 세계 경제 질서의 재편까지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바마는 이전부터 부시 행정부의 시장근본주의가 위기의 뿌리라며,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반면 매케인은 스스로도 이 주제에 별 관심이 없다고 인정했으며, 나아가 경제 성장을 위해 부유층에게 집중된 감세안을 내놓고는 시장이 최선이며 규제는 필요 없다는 공화당의 고전적인 논지를 펼치면서 패배를 자초했다.
오바마에게서 미국의 희망과 꿈이 실현된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나니 생경하기도 하고 많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억누를 수가 없다. 정말 미국에게 새로운 희망이고 꿈이 될 수 있을까? 그가 내세웠던 변화는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올까? 경제위기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등등. 미 국민들이 이번 선거에서 브래들리 효과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피부색깔에 상관치 않고 오바마를 선택했다는 것은 그 만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비관적이고 두려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많은 변화의 요구가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다. 미국의 패권적 일방주의와 서구중심의 글로벌 정치 경제 질서를 일거에 변모시킬 수도 없다. 그의 정책적 역량과 리더십에 대해서 아직 검증된 바도 없다. 그래도 미국으로서는 “옛날 옛적 미국에서는…”만을 읊조리던 매케인보다 오바마가 효율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다만 미국인들이 미완성 상태로 남겨둔 뉴딜정책을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은 확실하다. 일단 오바마의 주요 공약 중에 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과 부유층을 위한 감세제도의 폐지는 현실화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노조도 되살려보는 것은 어떨까.
분명한 것은 미국이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다는 것이다. 9·11 이후 일방주의로 치닫던 미국의 대외정책이 새로운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외교 노선이 전임자와 다르다고 해서, 지구촌의 다른 구성원 모두에게 ‘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바마는 꿈을 이뤘지만 미국은 꿈을 이룰 수가 있을까? 미국인들이 오바마에게서 보았던 희망과 꿈은 무엇일까? 그것은 과거의 잘 나가던 영광의 시절을, 즉 제국의 길을 재현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 가지만 제안해 본다. 이번 기회에 매년 5천억 달러가 넘는 국방비를 대폭 줄이는 것은 어떨까? 미국 정부는 올해 4천 550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재정적자가 예상된다고 한다. 단순 무식하게 계산하면 답은 간단하다. 세계평화와 미 경제를 위해서 정말 바람직한 방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별로 기대하고 싶지는 않다. 역시 오바마는 미국의 대통령이고 자본과 국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을 지켜보면서 지난 2007년 12월 한국의 대선과 비교를 해봤다. 가장 커다란 쟁점은 경제문제였으며, 현 정권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유사성이 있다. 한국은 ABR(Anything But Roh), 미국은 ABB(Anything But Bush). 반면 가장 대표적인 차이점을 보면,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진하면서 전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 극복 방안에 역행하고 있고, 오바마는 일단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3일자 중앙일보에서 ““대통령 힘 내시라”고 MB맨들이 다시 모인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던 관계없다고 했지만 오바마의 당선으로 한미FTA, 북핵문제, 대북정책 등 미국으로부터 질책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할까 봐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