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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칼럼] 영화 <올드랭사인>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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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한참 쏟아지고 난 어느 여름날 저녁, 열명 남짓의 동인련 회원들이 모여든 곳은 집회도, 세미나도 아니었다. 우리의 ‘안정길 대표’가 급작스럽게 제의한 영화번개 덕분에 모처럼 우리의 게토인 종로의 한 영화관 앞에서 회원들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개별적으로 영화 관람을 하러 모인적은 있었지만, 그렇게 단체로 영화관 앞에 모인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 날, 우리는 세편의 퀴어 단편 영화를 관람하였다. 세편 모두 훌륭한 작품들이었지만, 그 중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던 영화는 다름 아닌 ‘소준문’감독의 <올드랭사인>이었다. 동성애자 노인들의 실상을 다룬 이 작품은, 뭐랄까, 개인적으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인권단체 회원으로 3년 넘게 속해 있으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판단의 날을 빳빳이 세우려고 애써왔지만 동성애자 노인들의 삶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나에게는 영원한 젊음만이 있을 것처럼, 마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아주 먼 미래의 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속 두 주인공에 대한 나의 이질감은 시작한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밀려왔다. 종묘공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창식과 성태 할아버지가 모텔로 들어서는 순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펼쳐질 것 같은 공포에 나는 호흡을 잠시 가다듬어야 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당연한거지.’라고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제발 두 사람이 그대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 모텔방을 나와 주기를 속으로 빌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내 경직된 사고에 조금은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올드랭 사인(Auld Lang Syne _ 감독 소준문 / 2007년. 25분)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내 감정은 간단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져갔다. 부끄러움과 더불어 나를 가장 압도했던 것은 밀려드는 깊은 서글픔이었다. 특히 노인이 된 그들이 자신들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모텔방이라는 것, 그들이 초라해진 모습으로 마주친 공간이 종묘공원이라는 것, 이 두 공간적 배경은 여러 가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두 가지 공간은 감독이 작품을 위해 선택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성애자 노인들의 실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 역시 종묘공원 근처를 걷다가 동성애자 노인들로 추정되는 몇몇 사람들을 목격한 일이 있었고, 그들이 근처 모텔을 이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딱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기도 하니까.

이 작품의 두 주인공들처럼, 종묘공원의 동성애자 노인들은 종묘공원이 아니고서는 딱히 갈만한 곳이 없고, 잠시 머물렀다가는 모텔방에서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다. 노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종묘공원에서 소외된 시간을 보내야만 하고,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가정을 이루긴커녕 아무도 볼 수 없는 모텔방으로 숨어들어야 한다. 그나마도 마음 놓고 허락된 공간이 아니라는 건 ‘호모로 보이지 않기 위해 양손에 술을 잔뜩 사들고 모텔을 찾아야만 했던’ 젊은 날의 경험을 말하던 창식 할아버지의 대사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작품 안에서 동성애자 노인들의 관계는 마치 쇠락한 모텔방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지나쳐갈 수밖에 없는 관계로서 정의 내려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동성애자 노인들은 이중의 차별을 겪고 있는 셈이다. 노인이기 때문에,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던 진짜 삶에서 한참을 빗겨나 있다. 그리고 그나마 자신들의 터전이었던 종로라는 공간에서조차 그들은 완전히 밀려나 있다. 나이든 두 사람이 모텔방에 앉아 추억하는 예전 그들의 장소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춰가고 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젊은 동성애자들처럼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이미 그들의 것이 아니다. 동성애자 노인들은 파편처럼 흩어져서 젊은 날 못다 이룬 사랑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쓸쓸히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올드랭 사인(Auld Lang Syne _ 감독 소준문 / 2007년. 25분)

나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모습을 드러낸 젊은 청년 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창식과 성태 할아버지의 과거의 모습과 오버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지금의 젊은 우리의 미래는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미래와 완전히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내가 내린 답은 현재로서는 부정적이다. 창식과 성태 할아버지의 모습은 어쩌면 미래의 나의 모습이고, 우리 모두의 미래의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 따뜻한 보금자리를 꾸릴 수 없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맞다면, 종로에서 나이든 동성애자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효율성을 최대의 모토로 삼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적으로 큰 쓸모가 없는 노인들에게 여전히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뒤바뀌기 전에는 우리의 미래 또한 밝은 핑크빛일리 만무하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나이를 먹는다. 이 글의 제목이자 미국작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것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우리를 위한 나라는 없는 셈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동성애자 노인들의 고단했을 삶 위로 따뜻한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어야 한다. 함께 박스를 뒤집어쓰고 내리는 소나기를 피하던 창식과 성태의 등 뒤로 소준문 감독이 후세 아키라의 ‘오야스미나사이’를 불러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편안히 쉬시라고 우리는 그들을 향해 노래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나라’를 우리 눈앞에 실현시킬 수 있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발행하는 웹진 <너, 나, 우리 '랑'>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해와 님은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