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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의 미래를 위한 투자...

[기고] 터키 '완'에 사는 페르젠데씨 가족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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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동부의 호반도시 '반(쿠르드어 이름 '완')'에 페르젠데씨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페르젠데씨는 13년여 간의 수감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석방되었습니다. 쿠르드노동자당(PKK) 활동에 관계되어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페르젠데씨가 체포될 때 부인 시린 여사도 함께 체포되었고, 시린 여사도 1년여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단지 남편이 쿠르드 노동자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당시 젖먹이 아이가 있었던 시린 여사는 아이를 맡길 데가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감옥엘 들어갔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부부의 큰딸은 12살이 되던 해에 쿠르드노동자당(PKK)의 무장 게릴라 투쟁에 결합하기 위해 집을 떠납니다.(12살짜리 어린 아이가 무장투쟁을 하겠다고 집을 나서는 것을 부모로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느냐고 묻자, 시린 여사는 '혼자서 숙고해서 내린 결정이었고, 아이의 결심을 강력했다. 보내기 싫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라고 대답 하더군요. 한국의 일제 식민시절에 한국에서도 10대 중반의 소년, 소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야기들을 종종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 생각을 하니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자 가족에 가해지던 미행과 감시와 탄압은 이전보다도 더욱 심해지기 시작합니다.

가족은 결국 원래 살던 '하카리'(쿠르드어 이름 '졸라메르그')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지금 살고 있는 '완'으로 이주를 합니다.

이주 했다고 해서 탄압이 잦아들지는 않았습니다. 가족에 대한 미행과 감시는 계속되었고, 셋째 딸은 고등학교를 수료는 했지만, '테러리스트'의 딸이란 이유로 졸업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둘째 딸은 쿠르드족의 인권을 위한 여러 활동에 결합하다가 여러 차례 체포되고 고문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이 역시 산행(게릴라)을 결심합니다. 어느 날 셋째 딸이 집에 돌아와보니 언니가 보이지 않더랍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엄마에게 물어보니 잠시 여행을 갔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이내 직감을 하고 울면서 언니를 찾아 돌아다녀 봤지만 언니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웃더군요.

딸 둘을 산으로 보낸 시린 여사는 평화어머니회(자식을 게릴라 요원이나 터키군으로 둔 쿠르드족 어머니들이 결성한 평화운동 단체로,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함인지라 정말 절실하게 평화를 요구하는 어머니의 모임입니다.) '완' 지회를 설립하고 비슷한 처지의 어머니들을 모아서 본격적으로 평화운동에 뛰어듭니다.

첫째 딸은 터키군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둘째 딸은 아직도 산에서 게릴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간혹 페르젠데씨 집은 경찰의 감시를 받습니다. 집 근처에 차를 세워놓고 감시를 하고 가족 중 누군가가 외출을 하면 드러내놓고 미행을 합니다.

최근 이 페르젠데씨 가족에게 몇 가지 경사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유난히 웃음이 많고 장난이 심하던 셋째 딸이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 아이의 장난과 웃음에 푼수 같다면서 주위 사람들은 짜증을 부리기도 했지만, 이 아이의 웃음 속에는 깊은 아픔이 담겨있음을 알고 있기에, 이 아이의 장난과 웃음은 그 깊은 아픔과 슬픔의 표현임을 알고 있기에, 만날 때면 이 아이의 장난을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이후 아이는 저를 오빠라고 부르더군요.

이 아이의 결혼소식에 가슴이 싸~해지더군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지만 조그마한 선물을 준비해서 8시간을 버스로 달려서 아이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넷째이자 아들로서는 큰아들이 올해 키르기즈스탄의 한 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된 것입니다.

영어도 제법 잘 하는 이 친구는 키르기즈스탄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합니다.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수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고 이들은 최소한 언어와 문화 차원에서는 동화정책을 거치지 않았기에 원형의 쿠르드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영어와 러시아어를 공부해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양대 강국 사이에서 쿠르드족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그간 삯바느질로 아이들을 키워오던 시린 여사의 건강이 악화되고 13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학비는 들어가지 않지만 타국에서 아들의 생활비를 정기적으로 보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 딸의 결혼식이 끝난 자리에서 아주 난감한 표정으로 아주 어렵게 제게 말을 꺼내더군요. 혹시 아들의 생활비를 지원해 줄 수 있는 장학금을 알아봐 줄 수 있겠느냐구요.

키르기즈스탄이 잘사는 나라는 아니라서 큰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집세와 생활비를 포함하면 한달에 15~20만 원가량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달에 제게 들어온 후원금이 11만원이 있습니다. 이번 달에는 여기에 조금만 더 보태면 이번 달 생활비는 어떻게 지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앞으로 5년간(키르기즈스탄의 학제는 5년제인가 봅니다. 5년간 머물 거라고 하더군요.) 이 친구의 생활비를 지속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은 저 역시 넉넉지 않은 상황이고 제게 들어오는 후원금도 들쑥날쑥 인지라 여간 벅찬 일이 아닙니다.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 글을 받아보시는 분들께 쿠르드족의 미래를 위한 투자를 부탁드립니다.

해외 소수민족의 인재를 지원하는 장학재단이나 지원기금에 관한 정보도 찾고 있습니다. 터키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학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젊은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차제에 이런 젊은이들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혹시 정기적인 후원이 가능한 장학재단이나 기타 기금의 정보도 부탁드립니다. 큰돈은 아닐지라도 5년간이나 지속한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기에 좀 더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후원이 이뤄졌으면 합니다.

이번 달 부터는 모든 후원금 내역과 사용내역을 공개할 생각입니다.
후원: 제일은행 156-20-019013 예금주 : 김기성
덧붙이는 말

아쉬티 후원계좌 : 제일은행 250-20-440303 (예금주 : 김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