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려나간 손가락만 한 포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노동자들을 혹사시켰던 산재대표기업 ‘키친아트(옛 경동산업)’. 그러나 경동산업 노동자들은 부도낸 경영진을 몰아내고 투쟁과 희생을 통해 2000년, 노동자자주관리기업 ‘키친아트’를 새롭게 만들었다. 파업투쟁으로 해고되고 구속되었던 노동자들은 이제 ‘대표이사’, ‘전무이사’라는 낯선 명함들을 들고 다닌다. 스스로도 아직 낯선 모양인지 11일 오전, 기륭전자 농성장을 찾아 선물을 전하러 온 그들의 모습은 차려입고 온 양복만큼이나 어색했다.
라면박스나 기부하면서 아이들 앞세워 사진 찍고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자본가식 홍보는 전혀 할 줄 모르는 노동자기업. 그래서 한 편으론 더 안타깝기도 했다. 사장님, 전무님 소리하나 매끄럽게 못 부르면서, 농성장을 보면 옛날 자신들 생각에 안타까움이 먼저 앞서는 이들이 이 험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 주방용품 세트를 한 트럭 싣고 키친아트 경영진이 방문했다. |
촛불 이후 힘든 상황 때문에 혹시 오늘의 전달식이 언론에 날까 염려하던 82쿡 회원은 홍보가 많이 안 되었다는 말에 “키친아트 사보에는 나오겠죠. 사보 정도는 괜찮아요.” 하고 안심을 했다는데, 사보는커녕 아침도 못 먹은 채 인천에서 선물을 싣고 달려온 이들이 손에 쥔 건 일회용 카메라 달랑 한 개였다. 차사고 날 때 비상용으로나 쓰는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생색낸다고 흉볼까 싶어 조심조심 자기들끼리 돌아가면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서로 마이크를 잡지 않으려고 뒤로 빼다 진행자의 호명에 앞으로 나온 키친아트의 전창협 대표이사는 기륭전자 조합원들에게 이렇게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오늘 여러분들의 농성장을 보니 새삼스럽다. 옛날 우리도 똑같은 시절이 있었다. 산재로 인천서 가장 유명한 회사가 키친아트였다. 기업인들은 방만한 경영으로 부도내고 도망가고, 10년, 20년, 30년 동안 회사를 내 몸같이 여기고 일했던 조합원들만 남아 새롭게 노동자기업을 세웠다. 여러분들 고생하는 곳을 이제야 찾아와 죄송하다. 선물은 가져왔지만 부끄럽다. 힘 잃지 마시고 꼭 쟁취하시고, 힘내서 추석에는 가족과 함께 이야기 꽃 피우길 바란다. 우리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경영해서 노동자들을 위해 사회공헌도 더 많이 하는 기업으로 만들겠다.”
▲ 연대사를 하는 전창협 키친아트 대표이사 |
노동자기업 키친아트의 사훈은 “공동소유, 공동분배, 공동책임”이다. 노동자의 농성장을 찾아 투명경영을 약속하는 노동자 사장. 이 낯설고 어색한 사장님의 따뜻한 연대사에 몇몇 조합원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기륭전자 조합원을 대표해서 감사인사를 전하러 나온 오석순 조합원은 마이크를 잡자마자 또 목이 멘다.
“외롭고 서럽게 천일동안 투쟁했는데, 이렇게 많은 관심과 사랑에 눈물이 난다…요즘은 마이크만 잡으면 눈물이 난다…분회장 단식 93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저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분회장 죽고 그 목숨 값으로 정규직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잘’살자고 싸운 게 아니라 그저 ‘살아보겠다고’ 시작한 싸움이다. 단식 60일 때 올 추석만큼은 가족과 미음이라도 먹을 수 있었으면…했다. 미음 한 숟가락 먹고 싶은 소망이 정말 1115일을 싸우고 죽도록 단식을 해야 할 만큼 커다란 욕심인가......”
분회장의 목숨 값. 나는 안다. 그 목숨 값이란 게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골리앗 크레인에서 혼자 목을 맨 한진중공업 김주익 위원장의 장례식 때, 위원장의 목숨 대신 얻어낸 모든 것 때문에 괴로워하던 조합원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김주익은 크레인 위에서 혼자 죽어갔고, 김소연은 컨테이너박스 안에서 바짝 마른 나뭇잎 같은 모습으로 날마다 죽어간다. 그녀의 감사 인사는 자주 끊어졌다. 눈물기계가 되어버린 것일까. 한 마디 하고 나면 눈물이 흘러내려, 잠시 고개 돌려 눈물을 훔친 후에야 힘겹게 다음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막막하고 힘들 때 찾아줘서 가슴이 메인다. 기륭에 다닐 때는 비정규직, 파견직이어서 명절이면 정규직들 선물 받을 때 선물도 못 받았다. 그런데 올해는 선물 복이 터졌다. 고맙다.”
▲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키친아트 경영진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
천일동안 외롭고 서럽게 투쟁했는데, 요즘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에 눈물인 난다는 말. 3년 넘도록 고작 3번, 나 역시도 사람이 하나 죽어나가야 들여다보는 무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감사는 그렇게 칼이 되어 내게 꽂힌다. 키친아트의 박선태 전무와 함께 옥살이를 한 인연으로 이 전달식의 다리를 놓게 된 이갑용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재벌은 죄다 사면해주고, 노동자만 죽이는 게 이명박 정부다. 자본가도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힘든 싸움이지만 기운 잃지 말고 함께 하자.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말했고, 촛불 집회와 이길준 이병 양심선언, 기륭 농성장 동조단식까지, 촛불의 정신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82쿡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자 이 자리를 제안한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촛불은 가장 그늘지고 어두운 곳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사회 가장 그늘지고 어두운 비정규직 문제, 그 상징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기륭에서 함께 하고 있는 팔이쿡 회원들께 고맙고, 앞으로도 촛불의 정신을 계속 이어가도록 함께 노력하겠다.”는 말로 연대의 마음을 전했다.
떠들썩한 카메라도, 요란한 박수부대도 없었지만 굶는 그녀들에게 ‘밥솥’을 준 이 역설의 현장은 그래서 더 아프고 감동적이었다. 꼭 이겨서 어서 빨리 단식 끝내고 이 밥솥에 따뜻한 밥 지어 먹으라는 키친아트 노동자들의 간절한 마음이, 아마 그녀들에게도 닿았을 것이다. 거죽만 남은 모습으로 93일 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김소연 분회장은 농성장에서 4번째 맞는 추석에 대해, 이 질긴 싸움에 대해 담담하게 말했다.
“소식 듣고 이런 기업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놀랐다. 이런 기업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노동자기업이라도 옛날 기억을 잊지 않고 이렇게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고맙다.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싸움인 거 잘 안다. 이 싸움 꼭 이기고 정상적인 생활, 투쟁하지 않는 생활로 돌아가겠다. 그 때 꼭 키친아트에 찾아가서 인사드리겠다.”
▲ KTX승무지부에도 연대물품을 전달했다. |
93일을 굶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도 죄인 것 같아 키친아트의 대표이사는 서둘러 단식농성장을 나왔다. 농성장에서 4번째 맞는 추석, 어쩌면 농성장에서 맞게 될지도 모르는 다음 설. 이들 앞에서 사흘 전부터 앓고 있는 내 명절증후군 따위는 얼마나 호사스런 것인가.
바람만 불면 휘청거리는 철탑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KTX여승무원들도 그랬다. “어려울 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힘이 됩니다.” 1000일 동안 어렵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을까. 키친아트에서 선물이 넉넉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을 때, KTX대책위의 누군가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아도 찾아주는 것 자체만으로 고맙다고 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것, 그게 바로 노동자의 연대인데, 나 하나가 무슨 보탬이 되겠냐고 선뜻 함께 하지 못했던 맘이 부끄러울 뿐이다.
기륭의 농성장을 떠날 즈음 어느 여성조합원이 이갑용 위원장에게 물었다. “그러게 왜 97년도에 정리해고법 도장을 찍어줘가지고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웃는 얼굴로 농처럼 건넨 말이었지만 그녀들이 가진 원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가 안 찍었지만, 죄송해요 라고 같이 농으로 넘겼지만 이 위원장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고 했다. 96년도에 정리해고법이 날치기로 통과되어 연말 총파업을 벌였지만 결국 97년 노사정합의로 정리해고를 인정해준 민주노총지도부. 2006년 비정규직법이 여야합의로 통과될 때도 제대로 싸워내지 못한 노동자의원들. 10년 후 그 법들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칼이 되어 날아올지 모르고 어리석게 싸우지 못한 우리는 모두 그녀들에게 죄인이다. 그 법들이 기륭을 만들고, KTX를 만들고, 이랜드를 만들고, 코스콤을 만들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어리석은가. 왜 이렇게 순진한가.
기륭도 KTX도 농성장은 모두 쓸쓸했다. 기륭전자 둘레는 그녀들의 천막을 지나치는 무심한 트럭들로 분주했고, 우리의 전달식은 농성장을 지나는 차들로 종종 끊어져야 했다. 60일 넘도록 함께 굶다가 폐에 물이차서 단식을 중단한 또 다른 그녀, 유흥희 조합원은 말없이 농성장 둘레를 맴돌았다. 아직 곧추 세우기도 힘들 것 같은 약한 몸으로 걸레를 빨고, 주변을 정리하고, 분회장이 굶고 있는 방을 닦고 있었다. 굶지 않은 사람이 해도 될 일인데, 단식을 끝낸 죄인이 되어 분회장 곁을 지키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또 마음이 아프다. 그녀들은 어쩌자고 이렇게 우리 모두의 죗값을 대신 받고 있는가.
93일을 굶고 있는 분회장의 이부자리에는 허영만의 만화 ‘식객’이 주욱 꽂혀있었다. 단식농성장의 ‘밥솥’만큼이나 역설적인 광경. 단식이 끝나고 맘껏 먹을 수 있을 때, 식객에 나온 맛난 청국장 집에 꼭 그녀와 함께 가야지 생각한다. 키친아트의 노동자들처럼 옛말하며 살날이 있기를, 고통뿐이라 해도 어서 빨리 이 순간을 돌아보며 추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키친아트 노동자들이 젤 값비싼 브랜드라며 전해준 ‘명품’ 압력솥에, 모두 둘러 앉아 ‘따순 밥’ 지어먹는 그 현장에 함께 할 날이 오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