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부터 16년이 지난 올봄, 대만이 공산당을 합법화했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우리보다 한참이나 낙후한 필리핀이 이미 16년 전에 합법화했고 우리와 비슷한 분단국이면서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국력의 우위를 접하고 있는 중국과 대치하는 대만도 합법화를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도 사상의 자유를 제약하는 반쪽 불구의 민주주의를 청산하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로 도약할 기회가 있었다. 국민이 거대여당을 만들어준 17대 국회의 2004년 정기국회이다.
당시 노무현정부는 국민의 지지에 힘을 얻어 국가보안법 폐지 등 개혁 법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해찬 국무총리가 불필요하게 한나라당을 차떼기 정당이라고 비난했고 울고 싶은데 뺨을 맞은 한나라당은 등원거부로 맞섰다. 결국 노무현정부는 국회정상화를 위해 개혁법안들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로써 국가보안법 폐지는 물 건너가고 말았다. 60년 만에 찾아온 국가보안법 폐지 절호의 기회를 엉뚱한 발언으로 무산시킴으로써 한나라당을 도와준 이 전 총리의 이적행위(이 점에서 이 전 총리는 민주화 진영에 ‘위장 취업’한 한나라당의 프락치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전략 부재 등으로 다수 의석을 가지고도 노무현정부는 냉전적 보수세력에 항복을 하는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제 부메랑으로 날라 오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정부는 국가보안법 폐지 등 하라는 민주개혁은 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정책은 무비판적으로 열심히 수행해 유례없는 양극화를 초래했다. 그 결과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민심을 불러일으켜 이명박정부 출범의 일등공신이 됐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6개월은 한국의 냉전적 보수세력이 부패했을 뿐 아니라 무능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줬다. 굴욕적인 소고기 협상, 미친 교육정책, 대기업을 위한 고환율정책에 따른 물가폭탄 등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촛불투쟁으로 이어졌고 이 대통령은 임기 초기 대통령으로는 유례없는 10-20%대의 바닥을 기는 지지도를 기록해야 했다. 그러던 가운데 8월 들어 촛불시위가 약해지고 올림픽 등으로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자 이명박정부는 위기 탈출을 위해 군사독재 식의 극우적 공세에 나서고 있다. 특히 방송과 인터넷 장악에 나서는 한편 촛불시위를 주도한 누리꾼들과 쇠고기 파업을 주도한 민주노총 지도부에 대해 검거에 나서는 등 신공안정국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이와 관련, 이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남쪽 사회를 이념적으로 분열시켜 국력이 모아지는 것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시도는 계속될 것 인만큼 이에 대한 대책이 강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진 지 며칠 되지 않아 경찰이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사회주의 노동자 연합(사노련)의 관계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국가보안법이 다시 살아난 것도 놀랍지만 특히 사노련은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표방해 온데다가 북한을 강하게 비판해온 조직으로 지하조직이 아닌 공개조직, 그것도 ‘반북적’ 공개조직을 국가보안법으로 체포한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충격을 주고 있다(그렇다고 친북적 조직은 처벌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주체사상을 지지하고 친북적이더라도 북한과 직접 연계를 맺어 자금을 받거나 지령을 수수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생적으로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것이라면 그 같은 자유는 보장해주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다.) 이 대통령이 급하긴 되게 급했나 보다.
이번 사건이 발표되자 야당들과 시민사회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민주당의 경우 2004년에 국가보안법 폐지 하나 못 해 놓고 이제 와서 난리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건재한 데에는 열린 우리당을 계승한 민주당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민주당은 사실 이번 사노련 사건의 숨겨진 ‘가해공범’이다). 이에 대해 한 때 오교수와 함께 민중당을 주도한 바 있는 차명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사회주의가 좋다고 생각할 자유는 있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 강령을 만들고 조직을 만들고 행동할 자유는 없다”고 반박했다. 아니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두뇌 속 사상의 자유’는 있고 이를 표현하고 결사체를 만들,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없다? 한마디로, “두뇌 속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있지만 두뇌 밖에서는 없다”는 기이한 이야기이니, 자유민주주의의 ABC도 모르는, ‘웃찾사’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기에 민주노동당도 사회주의 이념을 강령으로 하고 있는 바(물론 사회주의가 무엇이고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것이 과연 사회주의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필요하지만), 차명진식 논리라면 다 잡아 넣어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이번 사건이 얼마나 억지인가는 법원이 혐의소명이 부족하다며 관련자 전원에 대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는 사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니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두뇌 속 사상의 자유’는 보장하겠다니 한국의 냉전적 보수세력이 그래도 지난 60년 동안 놀지 않고 발전을 하긴 했나보다. 이제 ‘두뇌 속 사상의 자유’라도 보장하겠다니 고마워 눈물이 다 나려고 한다. 눈물겹도록 고마운 한나라당표, 차명진표 ‘두뇌 속 사상의 자유’, 만만세다.
8.15 경축사에서 이 대통령은 선진화를 위해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한참 낙후한 필리핀보다도 최소한 16년이나 뒤지고, 경제발전에 비해 인권후진국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대만보다도 뒤진, 시대착오적인 공안 통치로 되돌아가면서 선진국으로 나아간다니 선진화치고는 기이하기 짝이 없는 선진화이다. 이 대통령은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경영을 배운 정 회장의 제자다. 사실 정 회장 역시 ‘근대화된 계몽된 자본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정 회장보다도 한참 더 처져 있다. 그가 그의 멘토였던 정 회장의 10분의 1이라도 따라간다면 이번 사건과 같은 촌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 덕분에 엉뚱하게도 정 회장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립다(사실 국가보안법 문제만이 아니라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어쨌든 사노련 사건을 비롯한 이명박정부의 신공안정국은 결국 진보진영의 투쟁을 통해 돌파할 수밖에 없다. 촛불은 사그러들었지만 진보진영은 투쟁을 통해 사상의 자유와 사회주의에 대한 시민권을 지켜내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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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일보에 매주 월요일 연재하는 ‘손호철의 정치논평’ 2008년 9월 1일자에 실린 “정주영, 이명박, 오세철”을 확대한 글로써 ‘민중의 소리’와 민중언론 ‘참세상’에 같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