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 가운데 누가 더 비판받아야 할까요. 당연한 민주주의를 외치는 현상유지자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민주주의는 현존하는 수탈, 배제, 억압, 차별을 해소, 극복하기 위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목소리들, 실천들 그 자체인데 어떻게 거기에 현상유지가 가능한가요. 결국 그러한 모순적 행태는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고통 받는 이들에게 부당한 현실의 사회관계들을 수용하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상유지는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과 파괴를 방조하는 행태일 뿐입니다. 지난 10년의 집권기간 동안 자유주의정치세력은 수구정치세력들과 타협하면서 그렇게 민주주의를 방치해두었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민주주의는 바로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10년은 분명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수구보수정치세력이 집권한 지금 그 방조의 결과들이 점차 확연해지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과잉’을 조장했다는 것 때문이지요. 자유주의적 기본권리의 제고를 ‘민주주의의 과잉’이라며 그것의 원상복구를 말하고 있으니 그 귀결이 어디인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이미 촛불시위의 대응에서 보았듯이 집회와 표현의 자유는 심각히 제한되고 있으며 언론, 출판의 자유 또한 정권의 홍보기구화 시도 앞에서 현저히 위협받고 있습니다. 반민주주의의 상징인 국가보안법도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경찰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라는 노동자정치조직이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하고 안보에 위해를 끼치는 문건을 제작, 배포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 활동가들을 긴급 체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직면하여 놀라기보다 오히려 담담해 지는 것은 왜 일까요? 단지 현재 벌어지는 상황의 밖에 존재하는 제3자이거나 부당한 권력행사에 분노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지난 자유주의정권 10년, 그리고 지금 수구보수의 상징인 이명박정권의 행태를 접하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명박정권도 민주주의를 제도화된 선거를 통한 정부와 의회의 구성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지요. 이것은 자유주의정치세력과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발상이 그들 자신의 내적 가치를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전개된 민주주의운동의 효과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수용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87년 체제’로 상징되는 그 민주화의 효과는 지금 수명을 다하며 재구성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 이들이 선거를 통해 정부가 구성된 만큼 민주주의는 실현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흔드는 행위는 법질서를 통해 엄단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민주주의를 최소수준에 가두고 다른 한편 여타 사회관계들에서 제기되는 민주주의적 요구들을 배제, 억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요. 이들이 지금 자유주의적 기본권리조차 제한, 구속하고자 시도하는 것, 그리고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억압적인 국가기구들을 전면에 배치하는 것은 그러한 속내의 일부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촛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87년 체제의 재구성을 위한 첨예한 긴장과 갈등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한 가지 작은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당신들은 법질서를 세워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가요. 법과 제도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들이 이 사회에 다양한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부당한 사회관계들을 확대, 심화시키고 사회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더욱 분절, 파편화시키는데 일조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해소,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요. 이미 말하였듯이 민주주의란 기존의 수탈, 배제, 억압, 차별의 사회관계들을 더 호혜적인 관계로 진전시키기 위한 목적의식적인 실천들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법과 제도 그 자체는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지금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당신들의 해석에 근거한 법질서를 지키기 위해 이 사회구성원들 다수를 고통에 빠뜨리는 현실의 저 부당한 사회관계들을 외면, 묵인하고 이른바 선진화의 미래를 향해 나가자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법과 제도는 기존의 사회관계들이 호혜적인 것으로 나가는데 기여할 때만이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인데, 당신들은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당신들이 편협하게 해석한 법과 제도에 이 고통스런 현실을 가두어 두려고 하니 거기에 어떤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나요. 따라서 당신들이 기본권리를 제한하고 억압적 국가기구를 동원하여 대중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지금의 이 현실은 바로 당신들이 벌인 원맨쇼의 결과인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은 파시스트들이 전형적으로 즐겨하듯이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결속력 정도를 테스트하기 위해 계속 이곳저곳을 찔러보는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라구요? 진정 그런가요.
그런데 왜 당신들의 내보이는 일련의 퇴영적 행태들을 보면서 당신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질서를 문란케 하는 정치세력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더 기울어지는 것일까요.
당신들은 기륭전자라고 하는 중소사업장의 비정규직여성노동자들이 3년을 넘는 생존권투쟁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목숨을 건 단식을 해도 눈 한 번 깜짝이지 않는 그런 정치세력, 그런 권력입니다. 30% 정도의 지지로 당선된 권력으로 철저히 자본을 옹호하고 온갖 중상으로 가난한 자들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그런 정치세력이지요.
당신들은 비정규직법 개정시기에 그것을 ‘비정규직보호법’이라고 말하며 으스대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요. 850만 비정규직노동자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신들이 바라던 것 아닌가요.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이 악법을 전향적으로 개폐할 그 어떤 생각도 비치지 않는 것인가요. 이전의 자유주의정치세력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또 책임전가를 할 것인가요. 당신들은 권력이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에 있다고 외친 자유주의정치세력의 외침에 성이 차지 않아 거기에 ‘비즈니스 프랜들리’를 덧붙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부류들입니다. 이처럼 당신들은 당신들 자신이 대중들에게 그토록 들이 대온 ‘국가의 중립성’을 스스로 내팽개치고 자본의 이익을 철저하게 옹호하는 그런 이율배반의 군상들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신들이야말로 이 사회와 공동체를 더욱 분열시키는 가장 조합주의적인 계급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당신들에 대해 대중의 행복권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질서의 실질적 파괴자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과도한 평가인가요.
당신들은 겉으로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말하지만 국가보안법이라는 전가의 보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념의 낙인을 찍고 그들의 신체를 구속하고 사상을 가두어두고자 하지요. 왜 그런가요. “사회주의가 붕괴하여 역사가 종말되었다.”는 그 엄청난 통찰과 자신감은 어디로 사라졌나요. 아니면 이제 깨달았나요. 그 체제의 붕괴와 무관하게 더불어 사는 사회, 꼬뮨을 향한 대중의 꿈과 열정 자체를 가둘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세력들과 대중 앞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기가 두려운가요. 무엇이 두려워 과거의 유물이라는 국가보안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가두려 하는 것인가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활동가들에 대한 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된 지금 당신들이 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당신들이 탈이념과 실용을 말하지만 정작 특정 이념에 의해 인간의 존재 가치 여부를 가늠하는 ‘이념의 노예들’이라는 사실을 혹시 당신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안타깝게도 그 사실은 조금만 양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공개된 비밀입니다. 모든 사회관계들을 자본에 복속시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극우반공주의라는 이념을 준거로 현실의 인간관계와 삶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당신들이야말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지향을 파괴하는 반사회적 장애물이라는 사실을요.
또 당신들은 이 국가가 자신들의 소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죽을 때까지 노동자로 살다가 이 국가로부터 그 어떤 혜택 한번 받지 못하고 죽은 이 땅의 이름 없는 남녀노소 수많은 대중들은 당신들의 노예였나요. 그렇기에 지금 신자유주의시대 그들의 후예들조차 권력과 자본의 화신인 당신들, 혹은 당신들의 후예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고, 당신들이 그려준 지도를 따라 그렇게 끌려 다니다가 삶을 마감해야 하나요. 이 공화국은 당신들의 전유물도 아니고 당신들의 일방적 생각이 이 국가의 정체성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이 국가는 끊임없는 재구성의 대상이고 따라서 당신들이 그렇게 즐겨 말하는 정체성도 결코 고정되어 있을 수 없지요.
묻습니다.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술과 행태를 구사하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요. 당신들은 이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특정의 정체성을 강요하고 그들의 사상을 검증하려 들기 이전에 당신들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스스로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닌가요. 당신들이 이 사회의 상위 10%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 권력이 아니라 여전히 전체 국민대중을 대표하는 권력이라는 점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정치적 예의 아닌가요.
진정 당신들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자,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가로막는 자,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것에 의해 인간의 존재 여부와 생사여탈을 강요하고자 하는 자, 노동자 등의 생존권 자체를 억압하고 거대 글로벌자본의 이해를 위해 수도, 의료, 건강보험 등 공유재조차도 민영화, 사유화하고자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자, 엄청난 부정과 부패를 일삼는 자본을 국가기여도 운운하며 다시 복권시키고 세상을 자신 있게 활보하도록 만드는 자, 이런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권력인가요.
비정규직으로 살아도 세금 한 푼 떼먹지 않는 이 땅의 노동자들, 서민들과 달리 천문학적인 재산을 지니고 호위호식하면서도 얼마 안 되는 세금을 떼어 먹고 고위공직을 자신의 부와 권력을 증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당신들은 누구인가요. 얼마나 많은 권력과 부를 당신들의 수중에 넣어주어야, 얼마나 많은 대중의 고통을 당신들의 왕관과 지갑을 위해 재물로 바쳐야 그 욕망은 채워질 수 있는 것인가요.
지난 10년을 이른바 ‘진보좌파의 집권시대’라고 임의적으로 규정하고 그로부터 야기된 모든 변화를 다시 원상회복시켜야 한다는 당신들은 누구인가요. 그리하여 당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나머지 70%에 이르는 대다수 국민대중을 ‘좌파’로 규정하고 이른바 ‘적출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당신들은 도대체 어느 곳에서 온 누구입니까. 양아치들이나 사용하는, 그러한 끔찍한 용어를 얼굴 빛 한번 변하지 않으며 언론 앞에서 공공연히 쓸 수 있는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요.
이런 당신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말 할 수 있습니까. 확언하건데 당신들은 민주주의와 아무 연관이 없는 세력들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민주주의는 지금 이 순간 수탈, 억압, 배제,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 자체이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세력만이 언급할 수 있는 소중한 개념이지요. 이처럼 민주주의는 항상 현재적인데, 필요할 때면 그 알량한 과거의 ‘민주화 이력’이나 파먹고 다수 대중의 꿈과 희망을 숙주로 삼아 비대해진 권력과 부를 탐하는 당신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운위할 수 있나요. 이것이 당신들이 그토록 금과옥조로 보듬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입니까. 물론 당신들의 민주주의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이 세상에 현실로 존재하는 모든 민주주의는 어떤 이들의 꿈을 위해 다른 이들의 희망을 먹고 사는 그런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당신들은 손뼉을 치며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현실의 민주주의가 그런 것이라면 “만수산 드렁칡”처럼 그냥저냥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니냐고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의 민주주의들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해소, 극복의 대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자기부정은 민주주의가 지니고 있는 운명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완성도, 과잉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너무도 과감하여 민주주의의 과잉을 말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신들 스스로가 가장 먼저 해소,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당신들의 수법을 모방한 누군가가 당신들에게 낙인을 찍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법과 제도를 물신숭배하는 당신들 자신이 현실의 사회관계들을 외면하기에 자초한 것이지요. 이른바 ‘선진화’로 포장된, ‘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시장의 독재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경쟁국가의 완성’이 진정 다수의 대중에게 어떤 삶을 강요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인가요. 당신들처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을 만드는 자양분으로 만드는데 민첩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을 모를 리 있나요. 대중에게 그것은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죽거나, 나쁘거나”의 삶을 의미할 뿐입니다. 옛날 어르신들은 이런 삶을 “죽지 못해 산다.”고 표현했지요. 이런 희망 없는 사회관계들을 비전이라고 말하는 당신들에게 어떻게 박수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처럼 그것을 교조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처럼 다양한 영역의 사회관계들을 잔인하고 집요하게 분열, 파편화시키고자 하는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누구의 사주를 받아 이렇게 하고 있나요. 당신들의 배후조종자는 누구입니까. 진정 당신들은 파시즘의 꿈을 키우고 있는 전령사들은 아닌가요. 만일 그렇다면 지금 당신들 앞에 무엇이 서 있는지 보세요. 서로 함께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결코 당신들에 의해 꺾일 수 없는 질긴 삶들입니다.
- 덧붙이는 말
-
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부관장이며 정치학과 교수입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