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이 열사흘 만에 3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이것은 올해 개봉된 한국영화 중 최고 속도다. 상반기 한국영화 가운데 최대 흥행작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추격자>가 각각 개봉 24일과 20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였기 때문이다. 관객층 또한 30-40대로 확대되고 있어 장기흥행도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강우석 감독이 <공공의 적> 1편 이후 6년 만에 들고 나온 <강철중>에 중점을 둔 것은 관객의 웃음이다. 그는 <강철중>에 대하여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영화”라며 “<투캅스> 때의 감각이 여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말한다. <공공의 적>은 국민 누구나 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악인을 강철중이 뒤쫓는 내용의 형사영화 시리즈이다.
<강철중> 홈페이지에서는 강우석의 신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공공의 적> 시리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이 나라의 밝음 뒤에 숨겨진 어둠을 그려왔다. <강철중>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폭력문제를 그리고 있다. <강철중>은 사리분별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멋진 싸움장면으로 미화되는 폭력과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에 맞서는 ‘꼴통 형사’ 강철중에 대한 이야기다.”
정의파 형사 강철중의 고단한 세상살이
강동서 강력계 엄 반장이 규정하듯이 강철중은 ‘꼴통형사’다. 그도 그럴 것이 강철중은 사회악의 대명사 조폭척결에 앞뒤 가리지 않고 앞장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에게는 세상살이가 결코 녹록지 않다. <강철중>은 강력계 형사의 고단한 일상과 삶의 피로, 그리고 절망에 가까운 현실을 거칠 것 없다는 듯 보여준다. 몇 가지 본보기를 보자.
강력계 형사생활 15년 만에 그에게 남은 것은 산동네 전세 한 칸이다. 돈이 필요한 철중은 은행에서 대출을 신청해보지만 창구직원은 끝까지 대출을 거부한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으로 그는 은행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지만 그것이 전부다. 필요한 전세자금도 대출받지 못하는 대한민국 형사의 초라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감방에서 썩고 나온 안수는 강남에서 세 개의 노래방을 운영하고 있다. 월수 4천이 넘는데다가 벤츠에 운전사까지 고용한 그는 영락없는 재벌 2세다. 하지만 안수는 경찰서와 철중을 보면 오금이 저리고 가능하면 피하려고 애쓴다. 자존심으로 뭉친 철중은 끝내 안수에게 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영화대본을 쓴 장진의 순발력과 재치가 넘치는 대목이다.
하지만 압권은 조폭 우두머리 이원술의 집에서 만날 수 있다. 원술을 잡아넣을 상당한 근거를 가진 철중이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아주 요란스레 밥을 먹는 철중을 원술의 아내는 벌레 보듯 한다. 여기서 그녀가 덧붙이는 말. “그래도 우린 당신보단 낫게 살아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키스>를 배경으로 그녀가 내뱉는 대사는 정말 압권이다.
강력계 형사 강철중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바깥에서 떠도는 인물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조폭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악을 척결하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현실을 지배하는 황금만능의 이데올로기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추상적 가치질서 사이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 <강철중>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만만찮은 문제의식이다.
모순된 인간 이원술의 두 얼굴
관객은 철중과는 완전히 대척적인 인물 원술과 대면한다. 그는 ‘거성그룹’ 회장으로 남부럽지 않은 호화판 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생들까지 ‘깡패’로 키워 그룹에서 필요한 용역으로 활용하려는 비열한 인간이다. 그가 아이들을 모아놓고 해대는 일장연설은 미래의 조폭을 희망하는 어린것들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섬뜩한 장면이다.
하지만 원술은 전혀 다른 면모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교외에 자리한 주말농장으로 데려간다. 요즘 도회지 아이들이 경험하기 어려운 전원생활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메마르고 삭막한 도시생활 때문에 아들이 건조하고 각박한 인간으로 성장할지 모른다는 원술의 따뜻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원술은 남의 자식들과 내 자식 사이에서 완전히 상반된 자세를 가진 인물이다. 어느 재벌회장이 아들을 때린 사람들에게 보복 폭행하려고 한 무리의 깡패를 동원한 사건이 이 장면에서 떠오름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에게 제 자식은 소중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자신이 동원한 깡패들에게 집단적으로 구타당한 인간들은 사람으로도 생각되지 않았던 게다.
수단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냉혈한 이원술. 그에게 철중은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철중을 제거하려는 그의 음모는 보이지 않지만 착실하게 진행된다. 살해기획에 부설된 두 가지 이상의 복선이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물론 이런 기획의도가 언제나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저어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강철중>에서 우리는 낮과 밤의 생활이 전혀 다른 인물 이원술을 통해 우리 사회 지도급 인사들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서둘러 결말로 인도한다.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그 과정에서 사건해결의 실마리가 넘쳐나는 웃음과 더불어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강철중>의 가능성이자 한계다.
<강철중>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영화는 왜 아이들이 대학교 진학 대신 조폭세계를 열망하는지 제대로 보여준다. 그런 과정에서 관객은 오늘날 완전히 무너져버린 고등학교와 공교육의 현장을 목도한다. 거기 더하여 초등학교 어린것들까지 함몰되어 있는 ‘조폭 신드롬’과 만나게 된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조폭을 때려잡는 형사보다 조폭을 더 좋아하는 어린것들의 행태는 놀라울 지경이다.
철중의 어린 딸마저 형사보다는 조폭이 멋지다고 말하지 않는가! 왜 그런지 영화는 묻지 않는다. 외려 장면과 장면을 통하여 ‘그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냐’고 되묻는 듯하다. 언제부턴가 정의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 우위에 서 있게 된 나라 대한민국. 그 나라의 국민이 죽을 때까지 꿈꾸는 대박인생. 그러니 ‘너무 빤한 결론 아니냐’는 투로 영화는 말한다.
하지만 <강철중>에는 빠진 게 있다. 2008년 6-7월 시점에 대한민국 ‘공공의 적’이 과연 조폭인가, 하는 문제다. 원술 같은 조폭을 잡아 가두면 공공의 적이 처단되는지, 그것을 묻고 싶은 것이다. 단언컨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폭염의 거리와 장맛비 내리는 광장으로 10대 어린것들부터 노인들까지 촛불을 들려 거리로 내몬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무리, 큰 나라에 빌붙어 먹고사는 정당 패거리, 불법 탈세와 부당상속을 일삼는 대기업총수, 그들 모두의 이익을 대표하는 보수언론 아닌가. 영화는 그런 거대한 ‘공공의 적’들과는 아예 비교도 되지 않는 조폭 우두머리를 악의 대본영으로 몰고 간다. 몇 해 전 미국이 작은 나라 몇을 ‘악의 축’으로 낙인찍었듯이 말이다.
짧은 맺음말
흥행의 귀재 강우석의 연출, 한국영화에 풍자와 해학을 성공적으로 도입한 장진의 상큼한 시나리오. 설경구와 정재영의 불꽃 튀는 연기대결, 한바탕 웃음을 선물하는 이문식과 유해진의 동참까지. <강철중>은 흥행할만한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것이 빠른 시간 안에 300만 관객을 동원한 근본 동인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 지점 어딘가에 딱 멈춰있다.
<강철중>은 재미있다. 단순-과격하되 통쾌하다. 하지만 조폭 때려잡는 꼴통형사 강철중 이야기는 재미 자체에 함몰되어 있다. 한국영화사에 이정표를 세운 <실미도>가 보여준 지난날의 아픈 역사와 전도된 세상과 고통받는 사람들 이야기가 사라져버렸다. <강철중>은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영화제목과 내용은 그만큼 어긋나 있다.
하여 여러분에게 다시 묻는다. 2008년 7월 현재시점에 여러분은 우리 사회 ‘공공의 적’이 아직도 조폭이라 생각하시는가. 다시 대답한다. 결단코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사회를 병들고 지치게 하며, 우리를 땡볕과 장마의 거리로 내모는 집단은 결코 조폭이 아니다. 이런 기막힌 현실의 탈출구를 한국영화가 맹렬하게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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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님은 경북대 노어노문학 연구자로 일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