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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녀자’들이 촛불에 앞장선 이유

[칼럼] 먹고 사는 지혜와 경험 나누는 생활정치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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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출신 이명박 대통령은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후광을 업고 나라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을 담보로 이 나라의 대통령 자리를 부여받았다. 전체 유권자를 따지면 10명 중 3명 꼴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지만 선거가 끝난 후에는 그를 뽑은 사람이건 뽑지 않은 사람이건 지지했던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상관없이 이왕 됐으니 ‘잘하라’는 바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램들에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과 ‘검역주권 포기’로 화답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쉬쉬~’하다가 들통이 나자 발뺌과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가 건드린 문제는 다른 것도 아닌 먹는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먹는 문제는 그냥 먹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의 삶과 문화와 직결된 문제다. 우리는 힘들 때마다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라고 서로를 위로한다. 누가 나쁜 짓이라도 하면 ‘다 먹고살겠다고 저러는 건데’하며 관대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서로 만나 나누는 인사도 ‘아침 드셨어요?’, ‘식사하셨어요?’이지 않은가? 먹는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인간관계, 즉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인 것이다.

한편 먹는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되면 될수록 절실해지는 문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여차하면 구조조정이라는 말로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을 ‘당연하고 마땅한’ 일로 만들고 있고 국가가 최소한의 사회적 삶을 보장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서는 것을 ‘당연하고 마땅한’일로 만들고 있다. 그런 체제에서는 더 이상 누구도 누구의 경제적 안녕을 보장해 줄 수가 없고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 맨몸으로 ‘쌩경쟁’해야 한다. 이런 시대에 먹는 문제만큼 중요해진 문제가 어디 있을까? 먹어야 최소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고, 잘 먹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건강해야 ‘최적의 조건에서 최대의 효율’을 생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게 되고 그래야지만이 ‘쫓겨나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혜로운 ‘배운 녀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을 생산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그 경험을 나누면서, 생산되어진 인간을 돌보고 양육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또 그 경험을 나누면서, 양육된 후 스스로 사회의 이 영역, 저 영역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그 경험들을 나누면서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쳐왔던 ‘배운 녀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촛불’을 든 것은 이 때문이다. 촛불을 들고 ‘소녀들’이 가장 먼저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하이힐’과 ‘유모차’들이 촛불로 거리를 메웠다. 하나같이 이 땅에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집회문화’를 만들어 내며 ‘촛불집회’의 ‘상징’이 되어 ‘촛불민심’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생활정치전선의 최전방에서 전화를 걸고, 신문구독을 끊고, 광고주를 설득하고 새로운 정보를 찾고 나누며 생활정치 실천의 장이 어떨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의 삶은 퍼덕퍼덕 살아 숨쉰다. 이들의 삶은 누구에 의해서 강제당하거나 조정당하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게 참조가 되고 자극과 격려가 되는 살아있는 정치이다.

‘촛불민심’이 그냥 한 번 터져 본 것이 아니라 매우 끈질기고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이명박정권은 뒤늦게 간파를 했나 보다. 연일 이어지는 ‘촛불집회’에 ‘소통의 부재를 반성한다’고 슬쩍 머리숙이고 지나쳐 보려했던 이명박 대통령과 그 정권은 사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공안정국’을 등장시켰다. 평택미군부대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을 괴롭혀 본 경험이 있는 어청수 경찰청장을 내세워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때리고 밟고 끌고 가두더니 이제는 다시 ‘배후세력’ 운운해대며 이 단체, 저 단체 눈에 가시였던 단체들 사무실을 뒤지고 다닌다. 사과는 진심이 아닌 시간벌기를 위한 책략일 뿐이었음이 드러났고 수십 번씩 바뀌는 대통령의 말과 태도는 급기야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내 손을 자르리’라는 한탄소리까지 들려오게 한다.

국민들은 ‘뿔’이 날대로 나있는데 이명박정권은 이 상황을 ‘공안몰이’와 ‘나라경제 살리기 우선’이라는 감언으로 정면돌파하겠다고 저런다. ‘미국산 수입 쇠고기’를 시중에 풀어 놓더니 어디서 품받고 동원된 것같기만해 보이는 대부분 30-60대 남자들인 사람들이 대낮에 줄을 서서 쇠고기를 사는 진풍경이 뉴스에 대거 보도되기도 한다.

국민들은 날로 ‘지혜로와’지고 있는데 이명박대통령 그리고 권영세 한나라당 사무총장과 같은 사람들은 ‘듣지도’ ‘보지도’ 않는가 보다. 이들은 ‘뿔’난 유모차들의 맨몸 외침을 무모하고 무책임한 부모나 할 짓이라고 비난이나 하고 있다. 무릇 부모란 생명을 돌보고 보살피는 존재이다.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 부모다보니 부모란 매일매일 일상 꾸리는 것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타고 어디서 자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것이 삶에 있어 기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다. 곧 이들은 ‘생활정치가’들이다.

생활정치는 그만큼 일상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라 공권력으로 촛불을 끄듯 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촛불’집회는 바로 그 생활정치가 어떠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겪고 마음 깊이 새길 수 있게 하는 훌륭한 배움터이다. 물대포 앞에서 유모차를 끌고 결연히 서있던 여성은 그런 지혜와 결연함을 보여준 이 시대의 시민이다. “내가 낸 세금으로 왜 이럽니까?” 그가 묻는다. “물대포가 비키기 전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결연히 주장한다. 그의 결연함은 생명을 돌보고 키우는 마음과 생활 속에서 소통하고 지혜를 나눈 이들이 가지는 힘에서 나온 결연함이었을 것이다. 그의 결연함은 결국 공권력을 물러나게 했다. 생활정치의 승리다.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등장을 알리는 승리다.

촛불집회는 이미 승리한 집회이다.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가 다시금 깊이 고민할 수 있게 된 것들이 한두가지인가? 우리는 촛불집회를 통해 민주주의와 더불어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거리에서 몸으로 배우고 익히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에서 언론이란 무엇인지, 축제가 무엇인지를 몸소 겪었고, 신자유주의 쌩경쟁 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거리 위에 함께 선 서로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회복하는 경험을 통해 치유하였고, 나 아닌 모두를 내가 살기 위해 경쟁하고 무찔러야 하는 대상으로 만들게 하는 신자유주의의 폭력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가라는 지혜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소녀와 소년들이 언젠가는 성숙하게 될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고 용감하고 창의적인지에 대해 놀라고 배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생활정치의 힘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나눠지는가를 배웠다.

이 모든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들이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가 얻은 몸과 마음의 먹거리이다. 어느 날 잠시 촛불을 끄고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주저하고 낭패스러워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가 ‘변화’되었으며 그것이 우리 안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촛불’로 타오르게 될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말

박이은실 님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입니다.

  • 시민

    글쓴이는 공안정국 하에서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이 걱정되시는군요. 진보싸이트가 문을 닫아야 하는 지경까지 갈 것으로 보는군요. 시위에 나오는 국민들은 정권의 탄압의 상황을 글쓴이 만큼 실감 못할지는 모르지만 두러워 하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질기게 한번 해보자고 하는데, 꼭 미친소를 막고 미친교육 대운하 막을때까지 해보자고 하는데 왜 그만 하자고 합니까.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왜 벌써 졌다고 하는건가요. 재협상,민영화,대운하 어느 하나 얻은게 없는데 무슨 승리를 했다고 합니까. 대책회의... 처음부터 믿지도 의지하지도 않았지만, 정말로 대책없는 단체 입니다. 국민이 승리했다고 말하지말고 대책회의가 승리했다고 말하십시요. 성공한 대책회의는 조용히 빠져서 뒷풀이 문화제를 즐기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