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명박정권은 스스로 그 자신의 구조적 한계를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다시 촛불대중에 대해 ‘공안정국식 폭력과 여론몰이’로 답하였지요. 신자유주의 경찰국가로서의 경향성을 더욱 노골화시킨 것입니다. 자본은 어떻습니까.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노상에서 1,000일을 훨씬 넘어서는 권리투쟁을 벌이고 있고 사회 각계의 양식 있는 분들 또한 동조 단식을 하며 이 부당한 상황의 종결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지만, 자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문제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이랜드, KTX 등 동일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애끓는 목소리 또한 여전히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을 뿐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독단성이 이명박정권의 경찰국가로서의 경향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추동력
왜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일까요. 그 동안 많은 전문가들은 소통의 빈곤 혹은 그것의 부재를 원인으로 지적해 왔습니다. 틀린 진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과연 그런가요? 소통의 빈곤 내지 부재가 그 무엇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요?”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소통의 가능성을 막고 있는 ‘존재조건들’에 더욱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에서 재생산되는 긴장과 모순관계에 있는 상이한 삶의 가치와 태도에 대해 더욱 숙고, 성찰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인가를 판단, 실천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핵심원인은 무엇입니까. 누차 강조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다양한 사회관계들을 오로지 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시장의 힘으로 재편하려는 신자유주의의 독단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신자유주의를 말하면 구조적, 추상적, 거시적 담론이라며 이 문제를 이런저런 정책의 선택의 수준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지식인들 가운데요. 하지만 잠시 고개를 돌려 주변의 절망적인 삶들을 살펴보십시오. 신자유주의에 숨 막히지 않는, 그 족쇄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어디 있나요. 피곤한 영혼은 그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르나 신자유주의에 지배되는 현실의 사회관계들은 단 한 순간도 그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언론과 언로에 대한 각종 통제시도, 극우보수신문들의 여론조작, 시민사회단체들에 대한 공공연한 협박과 탄압, 심지어 진보적인 공당에 대한 사적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시민들의 촛불저항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는 저 무절제한 권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그러한 발상과 행태가 사적인 폭력과 무엇이 다른지요. 오히려 ‘사적인 테러’를 공공연히 자극, 조장하는 것은 아닌가요. 거기에서 이른바 시민사회의 자유스러운 숨구멍을 모두 막아버리겠다는 공개적 독재체제를 향한 권력의지를 본다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권력행사의 양태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벌어지는가요. 단지 이명박대통령 개인, 혹은 그 주변 인사들의 권력욕, 금권욕 때문인가요. 그래서 청와대 비서진과 내각을 바꾸어 ‘고소영, 강부자정부’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면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요. 다시 말하지만 신자유주의의 독단성이 지금 이명박정권의 경찰국가로서의 경향성을 강화하는 가장 중요한 추동력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위임받은 권력이 주권자들을 계속 부정한다면 그 권력을 회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이견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능한 물리적인 수준에서 비폭력의 방법으로 비판하고 저항해야겠지만, 만일 위임받은 권력이 그 원천인 주권자들을 계속 부정한다면 그 권력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주권자인 대중의 요구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폭력 그 자체라는 점 또한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그러한 행태야말로 실질적인 헌법위기를 조장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진정 대중이 폭력적 상황의 도래를 원했던 적이 있나요. 역사는 그러한 상황이 권력을 사유화하고자 하는 사회정치세력들의 도발에 의해 조성되어 왔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대중은 그러한 상황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상식과 경험 속에서 체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촛불시위에 대해 ‘폭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대중들 사이에 여론몰이의 공포심을 조장하여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취하려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역사에 몽매한 근시안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공개적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5.18민중항쟁, 학살 그리고 그 이후의 민주화과정은 대중이 그처럼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 또한 가감 없이 보여주는 역사의 증언 아니던가요. 그런데 이 폭력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지금 ‘공권력’에 이마가 찢기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촛불대중들을 보면서 국가의 이 가시적 폭력에 분노하시나요.
하지만 이 사회를 권력과 부를 지닌 10%와 그렇지 못한 90%로 양분시키며 수많은 대중을 삶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저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는 그 동안 왜 좀 더 예민하게 대응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자본과 시장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 힘에 의한 질서’이기에,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이기에 그렇습니까. 아니면 나와는 무관한, 단지 생산현장에서 직접 가시화되는 노동과 자본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가요.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일상적 폭력에 대한 둔감성이 지금 목도되고 있는 이 가시적 폭력의 노골적 행사를 조장한 하나의 근인이라고 생각지는 않는지요. 진정 이러한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평화를 파괴하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며 그것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경쟁국가야말로 다양한 삶(生)의 복원을 위해 가장 시급하게 재구성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과도한 지적인가요. 폭력과 평화의 문제는 단지 국가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파괴의 내용과 질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전체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오히려 다양한 대중의 삶 자체를 자본의 이윤실현을 위한 톱니바퀴 정도로, 그 도구로 치부하면서 이 사회를 이처럼 분열, 단절시켜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폭력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평화의 장애물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정당은 민주주의 재구성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 그 자체가 숭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와 관련, 이번 촛불시위를 단순히 정당정치에 이르는 정치과정의 한 측면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른바 이해관계들로 상징되는 ‘투입의 정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만 촛불을 접고 ‘산출의 정치’를 하는 제도정치에게 바통을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른바 지성을 대표한다는 어느 정치학자는 대의정치, 그것의 표현으로서의 정당정치가 민주주의의 본령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치인은 ‘참여민주주의’가 대의정치의 보완물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주장들이, 나름대로 진보적이라는 분들의 입에서조차 거침없이 쏟아질 수 있을까요. 대의정치가 아무리 불가피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것이 민주주의와 동렬에 놓이고 그것과 동일시 될 수 있나요. 아무리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은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요. 모두가 알듯이 그것은 ‘자기지배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거기에는 그것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들, 경계들이 존재합니다. 계급, 성, 지역, 민족, 인종, 섹슈얼리티 등이 그것이지요. 따라서 기본적으로 현실의 민주주의는 그것들을 해소, 극복하여 더 대칭적이고 호혜적인 사회관계, 권력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운동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진보는 이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를 사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장애들에 의해 수탈, 억압, 배제,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이른바 주권자로 통칭되는 그들이 직접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자기화하는 것 속에서 민주주의는 온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그것은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조합주의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요. 지금 촛불을 들고 서로의 삶, 그로부터 도출되는 서로의 이슈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기우에서이지만 정당정치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그것의 존재의미는 자기지배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복무할 때뿐입니다. 따라서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당연히 민주주의운동의 해소,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겠지요. 정당은 민주주의의 재구성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지 그 자체가 숭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정이 이런데 이 촛불정치가, 이른바 ‘참여정치’가 어떻게 정당정치의 보완물이 될 수 있나요.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정당정치를 민주주의의 본령으로 말하며 촛불을 ‘비정치적인 것’,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는 보수정치(학)의 발상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단호히 결별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촛불시위 자체가 행정권력, 의회권력의 존립 근거인 ‘주권자의 정치’라는 점을 더욱 확고히 인식하고 자기화하는 것입니다. 대중의 참여 정도, 지속성 여부는 이 ‘주권자의 정치’를 부정하거나 폄훼할 그 어떤 근거도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위에서 왜 지금 한국사회의 정당 구조와 체계가 촛불로 상징되는 대중의 요구에 무기력한지 그 원인을 냉철히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진정 촛불이 이른바 반정치주의, 정치허무주의를 조장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민주주의의 본령을 정당정치로 인식하는 보수적인 정치인들, 학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이러한 현상을 조장해 왔던 근인이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결속력과 의지를 항상 의심하는, 그리하여 정치 그리고 근대 이후 그것의 핵심인 민주주의문제를 정당정치에 가두어두고자 하는 대의민주주의, 엘리트민주주의에 있다는 객관적 사실이 가려지거나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차원에서 ‘자기지배의 실현’이 아무리 멀고 험난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유를 들어 민주주의를 정당정치로 축소, 대체하고 그에 근거하여 촛불에게 책임을 추궁, 전가하는 방식은 이론적으로도 결코 온당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수많은 대중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 체계적,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지금 빗속에서 사제들은 촛불을 옹호하며 말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말단의 정치학 연구자로서 조건을 붙인다면 촛불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갈 때만이 진정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확언하건데 그 민주주의는 ‘주권자’이지만 상이한 사회관계들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대중들 서로의 호혜성, 연대성에 근거할 때만 의미를 지닙니다. 바로 그럴 때만이 이 촛불은 꺼지지 않고 진정 빛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 촛불정국을 가로지르는 핵심은 무엇인가요. 그 승부의 갈림길은 어디에 있나요. 이 호혜성과 연대성을 얼마나 자기화, 일상화하면서 제고시킬 수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적지 않은 장애들로 쉽지 않겠지만 바로 이것이 향후 민주주의의 도약가능성을 규정할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때입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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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정치학과 연구교수입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