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 번쩍 여기저기서 눈을 떴다. 그리고 눈동자에 순간을 담는다. 그 모습은 마치 천 개의 눈동자가 달린 생물 같다. 앞에도 뒤에도 위에도 눈들이 달려서 깜빡깜빡 거린다. 그리고 어떤 눈은 본체에서 뻗어 나와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촉수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보고 다닌다. 언제부터인지 매일 밤 시내에는 괴물이 출현한다. 그 괴물의 몸은 수십만 개의 빛을 내는 아름다운 땡땡이 무늬의 표면을 가지고 있다.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그건 액체라고 하는 게 좋을 모습이고 눈이 천 개가 넘게 박혀 있어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 어디가 입인지 알 수 없다. 수천 개의 소리가 여기저기 구멍에서 쉴새 없이 흘러나오는데 그건 때로는 성난 고양이 소리 같기도 하고 노래 소리 같기도 하며 비명 같기도 하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괴생명체가 출현했다. 단수인지 복수인지조차 알 수 없는, 아직은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서 괴물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그런데 많은 사람이 매료된 아름다운 생명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연히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괴물의 눈이자 촉수이자 무늬이자 본체이자 입일지도 모르니까. 괴물의 정체는 알다시피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상 문제를 시작으로 모인 사람들, 이제는 정권의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흘러나온 사람들,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청계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한지 한 달, 그 사이 100일밖에 안된 이명박 정권을 점점 위협하는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그 괴물은 점점 더 커지고 있는데, 어디가 머리인지 어디로 움직일지 알 수가 없어 공권력은 그것을 가둬보겠다고 컨테이너나 쌓고 있다. 괴물은 뭘 먹고 이렇게 커졌을까?
천개의 눈, 천개의 목소리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확실한 한 가지는 그들이 쓰고 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일 것이다. 즉 한마디로 ‘미디어’다. 한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한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시위를 생중계하는 사람들의 출현, 그것은 기존의 언론/미디어가 아니라 개인들이었다. 노트북을 들고 뛰어다니며 기존 언론이 편집해서 보여주는 것을 넘어 구석구석을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내보내니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신문에 갇히지 않았고 집에서 집회와 행진을 함께하다 첫차가 다니자 다음날 거리로 나왔다. 또 수천 개의 수만 개의 눈들이 깜빡 깜빡 자신이 본 것들을 생생하게 구석구석 인터넷으로 전했다. 누구나 들고 있는 휴대폰 카메라에서 부터 디지털 카메라까지 순간을 저장할 수 있는 눈들이 그야말로 빼곡하다. 그리고 그 눈들이 담은 순간은 기존 매체들의 틀에 박힌 사진과는 다르다. 구체적이고 가깝다. 그리고 일단 눈이 많은 만큼 다양하고 많은 순간들이 기록되어 전해진다. 공권력이 폭력을 사용할 때는 이 무수한 눈들을 부릅뜨고 찍어 나른다. 바로 이것이 역감시다. 권력/폭력에 대한 역감시. 뉴스카메라에 어떻게 하면 “진실”이 보도될까, 이 무자비하고 억울한 “현실”이 보도될까 목멜 필요 없다. 내가 찍어서 전송하면 되니까.
물론 이전에도 이런 것들은 가능했다. 그렇지만 주류 미디어의 힘이 훨씬 강했고 소위 조중동이라는 녀석들이 왜곡을 하면, 인터넷에 올린 나의 진실은 묻혀버렸다.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그것의 감응의 범위와 속도에 가속이 붙은 지금 주류 미디어의 거짓말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주류 미디어의 왜곡 보도라는 게 뭔지, 미디어라는 게 대체 뭔지 슬슬 깨닫는다. “미디어가 보내는 정보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발신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선택된 견해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스가야 아키코 지음, <<미디어 리터러시>>)”는 것을 깨닫는다. 한 달 간 길거리 특강을 매일매일 받은 셈이다. 미디어 혹은 담론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현실과 사실과 진실의 관계는 이런 것이다. 상황과 서로가 서로의 선생이 되어주고 있다.
밤에 거리를 누비던 액상 괴물(들)은 낮에는 집에 돌아가 그날 본 것을 자신의 블로그나 아고라 같은 곳에 기록하고 전파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분석하고 토론한다. 랜선으로 무선 신호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괴물들의 구성성분들은 흩어져서 다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사람들이 이 괴물을 어떻게 의미짓고 이해하고 있는지 분석해본다. 그리고 앞으로의 행로를 고민하고 토론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다시 공감대를 만든다. 물론 공감대의 형성은 단일하지 않다. 그것들은 다시 경합하고 토론하며 길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것은 힘이 된다. 저 무지한 관료들, 통치자들 그리고 그들의 소리통이었던 주류미디어를 와들와들 떨며 기다리게 할 힘이 된다. 괴물은 이 모든 상황들을 우적우적 먹으면서 그 안에서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증식되거나 함께할 다른 이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미디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능력
나는 괴물이 되었다가 괴물을 보다가 집회 시위의 현장이 하나의 교육장이라면 지금 우리는 미디어라는 교과를 제일 크게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동영상이나 기술영역 등으로 협소화된 의미의 미디어가 아니라, 표현/텍스트 생산과 읽기 그 자체로서의 미디어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미디어에 굉장히 예민하고 기민한 반응을 보이며 행동한다. 어떻게 주류미디어를 읽어야 하는지 해석해야 하고 자기 표현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계속 실험하고 배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어떤 시위에 비해서 그 능력은 급진적이다. 미디어가 형성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면서 미디어를 사용하여 표현해 가는 능력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누구나 미디어를 가지고 이렇게 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랜선을 타고, 무선 신호를 타고 인터넷에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소통하는 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그리 어려움 없이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누구나 인터넷과 영상촬영기기, 디지털 카메라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다. 이 재료들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조건들은 세대 간에 계급 간에 편차가 있다. 그리고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텍스트화(그것이 활자든 소리든 영상이든)하고 유통시키는 것은 특정영역의 사람들의 역할로 인식되어왔다. 즉 특별한 능력이었다.
개인적으로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온라인으로 다시 힘을 일으키는 행동을 해보자는 기획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 본다. 그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파업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아니겠는가 하면서 스스로의 글을 모아 인터넷으로 알리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 나왔었다. 하지만 글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고,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고, 그것을 할 물리적 시간 자체가 없다는 이유로 그 기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글쓰는 것 외의 매체를 그들이 다룰 줄 알았다면 어땠을까? 혹은 그 표현의 문제 -미디어로 자신의 상황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담론을 생성하고 상호교감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시위 현장이 자기표현과 유통의 실험실이 되면 어떨까? 그 미디어를 활용하는 능력을 나누고 서로 교육하는장, 서로의 능력을 교환하는 장이 되면 어떨까?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는 행진을 하는 한편, 모인 사람들 그리고 아직 모이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말을 무기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교육하면 어떨까? (교육이라는 말이 위계적인 느낌을 갖지만 그것을 대체할 말이 딱히 없는 관계로 그대로 사용함.) 여기서 우리가 서로 학습해야 할 미디어를 활용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기능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순히 사진찍는 기술, 영상 촬영기법, 인터넷사용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요즘 우리가 거리에서 몸으로 배우는 그것들이다. 즉 내 생각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교통하는 경험이 가져오는 것들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미디어-표현물들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나에게 어떤 행동을 이끌어 내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그것을 스스로의 표현에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쌍방향적인 소통이 가져오는 효과들, 자극들을 지금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 그것을 내 언어에 사용할 상상력 그리고 그 흐름에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소통 매커니즘의 파악 능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사실 이미 매일매일 괴물이 되어 움직이는 사람들은 "학교가 된 거리"에서 이러한 것을 모두 배우고 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이 학교 밖과 학교안 그리고 학교 안에서도 미디어를 활용하는 '능력'을 자기것으로 만드는 기회는 균등하지 않다. 이미 어떻게 다루어야 하루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직 그것을 모르고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도 많다.
우리가 그 능력을 서로 키워가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테지만 하나의 생각을 보태본다. 지난 72시간 릴레이 시위를 함께 하면서, 그동안 영상미디어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현장을 중계하는 것이 굉장한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하나의 스펙터클이 되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위 생중계를 현장에서 큰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몇십 미터 앞의 싸움을 스펙터클로 만들어버리고 뒤에 선 시위대를 관람객으로 만들고 있었다. 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어떤 시위의 한 부분만을 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보여주는 사람과 보는 사람. 그것이 없었을 때, 뒤편의 시위대는 앞의 상황을 몰라도 뒤에서 나름의 시위를 만들어갔고 궁금하면 자신의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동의가 되면 함께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행동을 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주말 시청광장의 영상중계는 많은 이들을 무기력하게 앉혀놓았다.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전쟁의 관람이라는 현상을 만들어 낼 것이 아니라, 도구가 없는 사람들, 미디어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답답한 사람들에게 그 도구들을 빌려주면 어떨까? 물론 이미 이런 실험과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고 기존의 생중계도 이런 역할을 해왔지만! 말,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을 더욱 다양한 미디어 도구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증폭시켜주면 어떨까? 그것이 살아있는 미디어 교육이 아닐까? 아 이렇게 내가 표현하고 싶었구나,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를 느끼면서 새로운 문법, 언어를 배우듯이 체험할 기회들이 열리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 이 시위 현장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투쟁의 현장, 삶의 현장에서 미디어 교육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어 주지 않을까? 현장에서 소규모의 임시적인 워크샵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각자의 능력을 교환하는 가게?들이 장을 펼치는 상상을 해본다.
괴물은 계속 형태를 바꾸고 학습하고 자라고 있다. 그리고 지금 여기로부터 내용적으로 시간적으로 장소적으로 더 멀리 자랄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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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웹진 액트온 10호에 실린 글로 인권오름 107호에 기고했던 글을 약간 수정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