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2년 효순·미선이 미군장갑차에 의한 사망 사건 당시에도 촛불시위를 주도한 것은 여중생들이었다. 그들은 당시에도 카페나 싸이월드에 사진을 퍼 나르며, 매일 저녁 광화문을 촛불로 밝혔다. 당시 온라인 광장의 중심은 오마이뉴스 등의 인터넷언론이었다. 2004년 노무현 탄핵반대 시위 때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소고기협상 반대 촛불시위도 중·고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에서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 더욱 의외의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광화문에서 펄럭이는 다음 아고라 깃발이다.
2002년 즈음의 온라인 뉴스가 대중들의 참여 공간으로 각광받은 것도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실패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의 정당구조 역시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욕망과 대의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었다. 미군에 의해 억울하게 자신의 친구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정부는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중들은 광화문에 촛불을 밝힌 채 직접행동에 돌입하였다. 당시에도 조·중·동 등의 보수언론과 KBS/MBC 등의 공영방송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온라인 매체에 주목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보수언론의 편집되고 가공된 그리하여 왜곡된 정보가 아닌, 날것들의 실시간 중계로 이루어지는 온라인 신문에 주목하였고, 언론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가 왜곡된 언론을 변혁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의민주주의 제도 역시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당시의 직접행동은 의식했던 못했던 여전히 대의제적 제도안의 혁명이었으며, 노무현의 집권으로 일정부분 보상받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일정부분 그러했다. 인터넷 언론은 백가쟁명처럼 우후죽순 생겨났고, 어찌되었던 이런 양적 확산은 의제와 욕망의 다양성 확장을 가져왔으며, 조·중·동은 몰라도 KBS와 MBC의 일정한 개혁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KBS와 MBC의 많은 시사 프로그램들은 정연주 등의 코드인사 때문은 아니다. 대중의 흐름에 누구보다 민감한 방송의 특성상, 방송국 내부주체들의 적극적인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
하지만 이제와 생각하면 그것의 한계는 명확해 보인다. 인터넷언론과 한·매·경등의 개혁신문들은 결과적으로 조·중·동을 여전히 넘어서지 못했으며,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대되었음에도 대의제적 정치제도는 신자유주의 정책 드라이브 속에서 대중들에게 철저한 배신감만을 되돌려주었다. 이는 노무현정부의 실정 탓도 있지만, 크게 보면 신자유주의 체제, 즉 자본이 이미 세계화된 사회체제 때문이다. 일국적 수준에서는 여전히 국민투표에 의해 정치구조가 결정됨에도 불구하고, 정치구조가 국민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철저하게 전 세계 거대자본의 흐름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 탓인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의 반대에도 파병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정부, 그래서 결국 김선일씨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었던 정부. 대추리를 죽창과 싸워가며 미군 손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는 정부. 부동산이 천정부지로 치솟아도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정부. 오늘날 일국수준에서의 대의제민주주의는 결코 민족적 틀 내에서의 대중의 정치의사를 대변하지 못한다. 그것의 반작용으로 황우석이나 심형래의 디워와 같이 우리 스스로를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키치에 빠져들게 하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노무현 세력의 몰락과 2MB정부의 탄생을 불러왔다. 악무한이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3.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왜 소고기협상 반대 촛불시위가 노무현 정부가 아닌 2MB정부가 들어서야 드디어 꽃을 피운 것일까? 그것은 2MB가 일국적 수준의 대의제를 대놓고 부정하고 있는 천박함 때문이다. 노무현이 그토록 욕을 쳐 먹었던 말의 성찬, 그 절차적 대의제라는 연극무대가 사라진 공간에서, 귀 막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삽질에 여념이 없다는 2MB의 공포스러운 모습에서, 한·미 FTA 그리고 민영화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가 순식간에 낱낱이 까발려진 것이다. 우리의 고유한 정체성과 생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야만 그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 성취했던 민주주의의 허망한 위선을.
그래, 그래서 다시 시청 앞 거리에 촛불의 축제가, 저항의 몸부림이 만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거리의 촛불의 2002년 2004년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오마이뉴스 등의 대의제적 공간에서 댓글을 달기보다는 스스로 의제를 정하고 스스로의 정치의사를 표현하기로 작정한 듯 보인다. 인터넷 언론에 글을 기고하기 보다는 다음 아고라에서 각종 미디어를 평가하며 스스로 전략전술을 구사한다. 미디어의 탐사보도와 아젠다 설정 역할을 포탈의 광장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더 나아가 미디어 비평의 영역도 끌고 내려왔다. 전통적인 보수언론 구독거부 운동을 넘어서, 광고주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광고시장에 의존적인 미디어시장의 약한 고리를 직접 타격하고 있다. 그리고 광화문을 벗어나 한강을 건너 여의도로 촛불이 진출한다.
4.
그들이 끌어내린 공간. 포탈의 광장은 언뜻 90년대 4대 PC통신망 플라자 서비스를 연상시킨다. 87년 6월 항쟁과 91년 투쟁의 언저리에서 시작된 90년대 PC통신의 정보통신 운동은 언론운동만은 아니었다. 보수언론에 저항하고자 스스로 미디어에 직접 참여하고 토론하며 의제를 설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장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민중 투쟁의 무기로서 미디어에 주목한 것이었다. 2008년 6월 즈음에 다시 포탈의 광장으로 대중들이 되돌아온, 반복된 이 역사의 경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시 출발점에 선 것인가?
필자는 감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이제 미디어 자체를 다시 재구성해야 할 그런 출발점에 다시 서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촛불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87년 투쟁과 2002년 촛불들이 기만과 왜곡으로 가득찬 대의민주주의로 환언되었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5.
여의도에 몰려든 촛불들은 KBS와 MBC가 예뻐서, YTN이 예뻐서가 아니다. 더더군다나 정연주는 더더욱 아니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대의제적인 아젠다 속에서 그 욕망들을 재구성하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들은 방송을 정치투쟁의 장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다. 그러므로 단지 구호가 공영방송 수호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과거역사의 반복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공영방송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를 그들에게 친절히 알려주는 것이다. 형식적인 국가기구로부터의 중립성이나 양적 공정성이 아니라, 오늘날 무용지물이 된 대의제를 대체할 직접민주주의의 장으로써, 그래서 수호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고 요구하여야 한다. 늘 되돌아오는 재원부족이라는 변명을 깔아뭉갤 만큼의 명명백백한 요구. "원래 공영방송은 우리 것이다."
잘 보여주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사용해야 한다.
6.
이제 인터넷 언론을 비롯한 모든 언론은 한 번 더 진화해야 한다. 사실 그동안 언론들은 그들의 역할 상당부분을 이용자에게 이양해왔다. 1인 미디어 시대이며, 생중계도 직접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 핵심은 소통이다. 대중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있어야 하며, 모든 내용을 대중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100분 토론과 생중계는 TV의 전유물이 아니다. 물론 단순히 이런 기술적인 진전 때문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래전부터 우리는 파탄난 대의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과연, 이 촛불시위의 열기를 과거처럼 대의제적 질서로 환원시킬 정치세력이 오늘날 대한민국 그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점이 87년,2002년과 지금 2008년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이다. 누구를 국회의원으로 보낼 것인가로 대리만족하던 시대가 아닌, 일상화되는 직접행동과 직접민주주의의 요구들이 전면화 되는 세상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대의제가 파탄날 수록 결국 미디어의 가치는 더욱 증대한다. 미디어는 대의제의 핵심적 보조수단이기도 하지만 대의제를 위협하는 양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주류사회는 점차 현장과 거리를 두고 모든 정치행위를 여의도로 한정지으려 할것이고, 반면 일상화되는 직접행동과 직접민주주의의 가두의 요구는 미디어에서 일상적으로 소통될 것이다. 시청앞 광장의 촛불은 한정된 공간에 구획되지 않고, 미디어를 통해 전국으로 그리고 전세계적인 공간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토론과 소통이 핵심이다.직접적인 소통과 토론이야 말로 파탄난 대의제에 저항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이다. 대의제적 틀 속에서 갇힌 정치투쟁이 아니라,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과 직접 행동들 속에 우리의 미래와 미디어 운동의 미래가 있다. 현장의 수많은 카메라와 생중계 장비, 그리고 명박산성 앞에서의 지리멸렬한 토론이 결코 지리멸렬하지만은 않은 이유에 민주주의가 있다.
7.
그리고 이제 포탈을 물어보자. 포탈 아니 아고라는 과연 직접민주주의의 성지인가?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이유로, 선거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광우병 괴담이 퍼지고 있다는 이유로, 조선일보 광고주에 항의하는 것이 위법이라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이유로 임시조치가 포탈에 의해 수시로 자행되는 모습은 과연 역사가 진보했는지 묻고 싶은 지경이다. PC통신 시절부터 쌍팔년도 금서목록으로 검열하던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방송통신위원심의위원회로 이름을 바꿔 여전히 포탈과 인터넷 곳곳에서 암약중이다. 한번이라도 포탈에서 임시조치를 당해본 네티즌이라면 구차한 설명 없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미디어융합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오늘날, 오픈IPTV의 성공을 위해 기꺼이 2MB의 품안에 기꺼이 안기는 다음의 모습 속에서, 왜곡된 대의제와 언론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그 공간은 과연 어떠한 곳인지 다시금 뒤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대의제를 거부하며 끌어내린 그 포탈이란 공간은 가장 자본주의적인 상업공간이다. 실명제로 내가 누구인지 언제나 알 수 있는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는 오간데 없이 정부와 자본에 의한 감시와 검열이 자행되는 투쟁의 현장이다. 내가 올린 지식인의 글과 다음 아고라의 글이 온전히 나의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글의 저작권은 상당부분 포탈사업자의 것이다. 우리는 늘 권리를 착취당하고 있다.
포탈은 이제 단순한 온라인 사업자가 아니다. 포탈의 세례를 받아 성장한 우리에게 그곳은 직접민주주의가 발화되는 사회 공적 영역이다. 그 공적 영역에서 우리의 권리를 수호하고 국가와 자본의 감시와 검열부터 스스로의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이다. 그 요구에 있어, 우리 스로로도 놀랄 만큼의 깜찍한 재기와 조롱기 섞인 발랄함은 직접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가장 큰 무기이다.
더 나아가 그런 재기발랄함이 포탈에 한정될 필요는 전혀 없다. 사실 그간 포탈의 폐해는 수도 없이 지적되어 더 할말도 없을 지경이다. 포탈은 인터넷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주류 미디어의 확대재생산으로 담론 왜곡의 주범이다. 그 재기발랄함이 포탈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꿈꾸지 못하겠는가?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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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웹진 액트온 10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