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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를 포기한 전태일의 진정성을 기리는 문학

[칼럼] ‘삶과 문학’지 출판 기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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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 외곽의 물류 창고에는 콘테이너 상자가 가득 쌓여 있다. 울산발 서울착 새마을호가 지나는 역은 몇 개쯤 될까? 경주, 영천, 하양, 동대구.... 익숙한 몇 개의 이름을 가진 역을 지나는 동안 어느 새 기차의 투명한 유리 창문 밖으로 다가오는 물류 창고에 눈이 머문다. 저렇게 많은 화물들을 매일 나르고 있었구나. 수송이 중단된 채 외지의 창고에 머문 물류 박스더미들은 파업의 위력을 풍기고 있다.

김천, 영동, 대전 역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도시와 도시 사이 외곽 물류 창고에 쌓여있는 콘테이너에 눈이 머문다. 수 십 년만에 처음으로 조합에 가입했다던 늙은 노동자, 80만 원받고 서울에서 부산 왕복 뛰고 나면 기름값 60만 원 빼고 밥값 빼고 보험료 빼버리면 남는게 하나도 없어서 파업에 참가한다는 비조합원 노동자들, 그들의 무거운 한숨이 저 쌓여있는 콘테이너에 다 들어차 앉아도 모자랄듯 하다.

서울 창신동 창신 시장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직도 한두 평짜리 영세한 미싱 공장들이 줄을 서서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지난해 1월, 처음으로 전태일 기념 사업회를 찾아 가던 날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념 사업회 간사가 알려준 약도는 자세하게 길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나는 도무지 이 좁은 길에서 더 이상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추위 때문인지 약도를 들고 있는 손이 얼어 붙고 낯선 땅에서 길찾기에 지쳐 마음마져 얼어 붙을 무렵 기념 사업회 간사가 날 찾아 긴 골목길을 내려 오고 있었다. 그를 따라 여전히 좁고 어둡고 긴 골목을 한참이나 올라 가서야 ‘전태일 기념 사업회’를 만날 수 있었다.

녹은 눈이 지붕사이로 새어 흐르고 있는 사무실에 빈 대야를 받쳐 놓고 이 좁은 나라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진보적 문학인들이 모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것 같다. 이전 해에 전태일 문학상을 받고 이 모임에도 초대를 받은 나는 이미 문학운동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쉽게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단지 이제 막 다시 창작을 시작한 나의 막막함과 울산의 삭막함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같다.

그 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 나질 않는다. 그러나 내 기억속에 또렷하게 자리 잡은 그날의 영상이 있다. 정면이 아닌 옆으로 앉으셔서 말씀을 하시던 이소선 어머니, ‘문학상 수상자들 100명이 넘지만 상받고 가버리고, 상받고 가버리고, 그 많은 사람들 그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지금 다 어디서 무엇 하나, 노동 문학이 안된다 탓하기 전에 그 사람들이 다시 모이면 노동문학이 살아 난다. 시상식에서만 만나지 말고 자주 만나서 노동문학을 살려야 한다’ 어머닌 왜 옆으로 돌아 앉아 말씀하셨을까? 또 누군가의 어깨 위에 짐을 올리는 일이라 차마 말씀하시기가 무거우셨던 걸까?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은 무겁게 우리 모두의 삶에 올라 앉았다. 어머니의 말씀 이전에 우리 모두가 숙명처럼 무겁게 앉고 있었던 숙제이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표정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고, 차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술을 마셨다. 며칠 뒤, 그날 찍은 단체 사진을 보니 맨 뒷줄 오른 쪽에 전태일 열사가 서있었다. 벽면에 걸린 그의 초상화가 딱 우리들 중 한명처럼 그 사진속에 줄 서 있었다. 묘한 일이었다.

지난 6월 14일, 서울 창신동 시장 골목에 있는 한 식당에서 작지만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한쪽에서는 해물탕이 끓고 한쪽에서는 삼겹살을 굽는, 그야말로 없는게 없는 백화점식 식당이지만, 그런 식당일수록 맛이 없다는 통념을 깨고 모든 음식이 골고루 맛있는, 음식 끝에 정든다는 속담을 확인하듯 오랜만에 혹은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의 어색함도 음식 속에 화기애애하게 녹아드는 자리였다.


‘삶이 보이는 창’ 출판사 분들이 책을 들고 오시면서, 우리는 막 태어난 아기를 안아 보는 분만실 앞 가족들처럼 환성을 지르고 호들갑을 떨며 책을 펴들었다. 어찌 반가움뿐이랴. 이 한권의 책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긴 시간과 노력, 그리고 창작의 기쁨과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위 분들의 열정으로 이 책이 만들어졌습니다. 처음에 원고 청탁을 할 때는 원고가 들어올까 걱정했는데 너무 많은 원고가 들어왔습니다. 제 딸이 ‘태일이’라는 만화책을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진정’이란 남녀노소를 떠나 긴 끈으로 이어져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을 우리속에 살아있는 전태일 정신으로 삼아 앞으로 좋은 글을 써갑시다.”

편집을 맡은 유현아 시인의 말처럼 전태일 정신을 이어간다는 것이 이 책을 만들고 읽어갈 모든 사람들의 염원일 것이다.

  건강이 많이 안좋으셔서 거동이 힘드신 이소선 어머니께서도 이 자리의 한가운데에 앉으셨다.

세 편의 소설 초안을 남긴 채 차마 쓰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전태일 열사. 소설속에서는 승리하는 쪽으로 그릴 수 있으나 현실속에서는 노동자가 승리할 수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쓰기를 포기하고 노동자가 승리하는 길을 향해 온 몸으로 실천해간 전태일 열사. 그가 쓰기를 포기한 그 ‘진정성’을 되살리는 것이 ‘삶과 문학’이 추구해 나가야 할 길이다.

건강이 많이 안좋으셔서 거동이 힘드신 이소선 어머니께서도 이 자리의 한가운데에 앉으셨다.

“열심히 글을 써서 이런 책을 내게 되었고, 여러분들이 이 정신을 이어가서 계속 글을 쓰신다면 좋겠습니다. 축하 드립니다. 전태일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짧지만 한땀 한땀 옷을 깁는 바늘땀처럼 그 말씀 자체가 힘이되고 형상이 되고 움직임이 된다. 부디 어머니께서 오래오래 사셔서 더 좋은 일들을 보고 느끼시고 만족하시고 사셨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진보적인 문학을 추구하는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싣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을 꿈꾸었으나 차마 쓰기를 포기하고 실천속으로 달려 나간 전태일의 ‘진정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작가와 술이라는, 마치 바늘과 실처럼 이어붙는 통념을 깨고 출판기념회와 함께한 식사와 더불어 한두 잔의 술이 돌고 서둘러 자리가 끝난다. 그리고 그들이 우르르, 나름 조직적으로 결합한 곳은 서울 시청 촛불 집회장, 오랜만에 만난 작가들과 진한 술자리를 가지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술조차도 잘라버리고 현실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모습은 노동 문학의 앞날을 밝힐 것이다. 술잔 대신 촛불이 담긴 종이컵을 높이 쳐들고 구호를 외치는 작가들의 행진, 문학을 포기하고 실천을 향해 내달린 전태일의 진정성을 닮은 행동이라 칭찬한다면 너무 자화자찬일까?
덧붙이는 말

르뽀작가 서해식은 1993년 이후 주욱 울산에 살고 있으며 사진을 찍듯, 삶을 글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제2회 민들레 문학상, 제15회 전태일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글은 울산노동뉴스에 동시 게재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