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초 청계광장에서 조그만 규모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그동안 정권의 부채질과 전 국민의 호응으로 점점 확대되더니 어제, 6월 10일에는 50만을 넘는 대규모 대중이 모인 장대한 집회로까지 확대되었다. 사태가 이쯤 되면 무언가 큰 사건으로 이어지리라고 예상하는 것이 자연스런 것일 게다. 반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경찰들은 광화문 한복판에 컨테이너로 성벽을 쌓는, 정말 희대의 코미디 연출했고, 그 성벽 뒤에 숨어서 이명박은 국민이 저리 모여 한꺼번에 내각과 비서진을 교체해서 공백이 발생할 것을 걱정해주고 있다며 뻘소리를 하고 있다. 사람들을 열받게 하는 이명박의 코메디야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보아도 그나 그 주변 인물들은 현재의 상황을 전혀 감도 못 잡고 있는 듯하다.
또한 지금 정부는 현재의 사태에 대해 어떠한 전략도 없는 듯하다. 전략은 그만두고 상황파악조차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 운영밖에 모르던 사람들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대통령의 형과 핵심 비서관을 통해 요직을 장악한 부패할 뿐 아니라 무능하기 짝이 없는 관료들 때문일까? 그래서 아직도(!) 대통령 이하 관리들이 어이없는 뻘소리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사태를 타개할 어떤 전략적 대책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래서 사태는 그들은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급박하다. 얼마 전 농반진반으로 “이명박 정부 이후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을 한 주간지에 쓴 적이 있지만, 이제 상황은 이걸 농담으로 해선 안 될 지점으로 넘어가고 있는 듯하다.
사안은 이미 쇠고기 문제를 넘어 모든 정책으로, 결국은 현 정부의 진퇴 문제 전체로까지 확대된 지 오래다. 사태의 심각성은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이미 가시화하고 있다. 정두언의 폭로성 발언과 그에 대한 여당 인사들의 지지는 그 분열이 공존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성장 지표’를 맞추려는 어이없는 단견 속에 취해진 경제정책으로 물가만 올려놓았고, 고용이나 성장 모두에서 실패하고 있으며, 이것은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의 파고에 더욱 위험하게 노출되어 있는 상태다. 오직 기업의 이익이나 일부 부유층의 이권을 위해 제안된 이명박 정부의 모든 정책은 대중의 전반적 저항에 직면해 갈 곳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그리고 대중의 흐름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노도가 되었고, 여기에 이명박이나 정부관리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염장을 지르는 발언으로 그 흐름의 형성속도를 가속하고 있다. 대중의 흐름이 거대해지면, 그것은 필경 포지티브 피드백의 방식으로 체증적으로 증가한다. 지금 보다시피 흐름이 거대해지면 일이 잘 되기 마련이고, 일이 잘되면 대중이 더 잘 모이며, 그건 다시 일을 더 급속하게 앞으로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중의 체증적 확대를 저지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대중이 공포로 개별화되는 것이다. 그러면 대중은 흩어지고 흩어짐은 대중을 더욱 공포에 빠지게 하여 더욱 빠른 속도로 흩어진다. 그러나 지금 그건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대중은 이미 공포를 잊은 지 오래다. “내가 주동자니 나를 잡아가라”고 각자가 나서는 상황, 권력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된 상황, 그리고 경찰의 폭력은 대중의 손에 들린 무수히 많은 카메라와 인터넷으로 무력화된 상황에서 무슨 수로 대중을 공포의 감정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것인가?
가정하기 힘들지만, 심지어 군대가 발포를 한다고 해도 지금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것 밖에 안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중의 불만을 무마하거나 해소할 수 있는 어떤 전격적인 타개책이 제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러한 전략적 고려도, 전략적 사고도 현 정부에게는 없는 듯하다. 가령 미국내 쇠고기 업자들의 ‘자율규제’를 미국정부가 보증하는 방안을 공식적인 문서로 얻어온다고 해서 대중의 분노가 가라앉고 운동이 해소될 거라고 믿는다면 그 역시 너무 사태를 안이하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은 어떠한 침로도 찾고 있지 못하다. 그저 바리케이트를 치고 방어전을 펼치면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들이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역시 불가능하다 고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보면 역관계의 기이한 균형에 의해 서로가 서 있는 지점에서 전진도 후퇴도 못하는 ‘긴장된 소강상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찰은 혹시 사고라도 생길까 경찰들과 대중의 접촉 자체를 피하면서 바리케이트의 물리학으로 버티고 있고, 대중 역시 전경차와 컨테이너 바리케이트 뒤에서 일종의 ‘해방구’를 형성하여 축제적인 성격의 집회와 행진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확실히 지금과 같은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는 없다. 이런 경우 대개 시간은 그들의 편이어서, 출로를 찾지 못한 대중들은 점차 힘이 약화되면서 흐름이 해소의 길로 접어들기 십상이다. 따라서 대중들이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는 것 역시 묵시적이나마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적 결과’를 기대한다면, 지금의 대중의 흐름을 너무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대중이 투쟁하려는 사안의 범위는 점차 확대되고 있고, 대중운동은 오르내림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여전히 상승과정에 있다. 게다가 참여하는 대중의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돌아가며 빠지면서 참여해도 3만 정도 되는 규모가 일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집회에 참여한 경험은 새로운 참여나 반복적인 참여를 쉽게 하고 있다(언제나 처음이 제일 어렵다). 그리고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들의 구심력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어서, 대중의 흐름이 제풀에 지쳐 해소되기는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정부가 재협상에 관한 어떤 결정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20일 이후 사태는 또 하나의 변곡점을 그리게 될 것이다(넘지 못한다면, 아마도 시간은 정부의 편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재의 ‘긴장된 소강상태’가 시간에 따라 대중운동이 제풀에 지쳐 해소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 않을까? 그에 비해 반대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감하게 그 극한을 상정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 극한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이 기이한 소강상태에서 출구를 찾는데 유용하지 않을까?
대중운동의 자동적 해소와 반대방향에 있는 극한값은 아마도 현 사태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는 형태로 현 정부가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일 게다. 가령 대통령의 신임과 연계된 국민투표에 지금 문제가 된 현안을 부친다든지 하는 식으로 퇴진의 길을 가는 것이 그것이다. 현 정부가 지금 만약 신임과 연계된 국민투표를 받아들이고, 그 이후 선거를 다시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대중의 승리를 뜻하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는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
현재의 상황을 끌고가며 결과를 권력으로 변환시킬 조직은 물론, 대중운동의 향방을 이끌 ‘지도부’조차 없는 상황, 그렇다고 두드러진 대중적 ‘후보’도 없는 상황에서 결과를, 선거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위기의식 속에서 이후의 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보수층들은 다시 급속히 힘을 모을 것이고, 그 결과 가령 노태우 처럼 박근혜가 다음 정부를 구성하게 되는 게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닐까?
대중은 흐름이어서 흐름은 범람하여 휩쓸고 지나가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어떤 안정적인 체제도 만들지 않는다. 대중의 흐름을 안정적인 어떤 체제로 구성하지 못하면, 대중의 흐름이 휩쓸고 지나간 그 자리엔 쓰레기처럼 남은 것들이 재빨리 그 빈 자리를 차지한다.
68년 5월 혁명이 그랬다. 대중의 거대한 파고에 의해 드골 정부는 근본적 위기에 처했지만, 그 흐름은 권력을 장악하여 새로운 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어떤 몰적인 구성체도 형성하지 못했고, 거기서 드골은 새로운 선거를 통해 재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을 체험했고 그것을 이론화하고자 했던 사람의 이야기: “분자적인 탈주와 운동은 몰적인 조직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성, 계급, 당의 이항적인 분포로, 그 선분들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1권, 227쪽) 6월 항쟁 역시 그랬다. 6월 29일 전두환 정부는 전면적인 항복을 선언했지만, 그 항복의 뒤에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노태우였다. 대중집회나 대중운동과 선거는 아주 다른 원리에 의해, 아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프랑스의 68혁명과 한국의 6월 항쟁이 공통적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결코 반갑지 않은 이러한 반복을 피하기 위해선 ‘지도부’는 그만두더라도 최소한 ‘이명박 이후’를 감당할 수 있는 느슨하지만 광범위한 협의적 조직이 만들어져야 하는 거 아닐까? 진보진영의 여러 조직들과 여러 정당들이 ‘연석회의’ 형식으로라도 모여, 이후 힘을 모을 구성적 틀을 만들어내고, 거기서 이명박 이후 선거에서 보수파와 대결할 후보를 대중적인 지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선발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 20일을 기점으로 이명박 퇴진을 겨냥한 새로운 차원이 국민적 항쟁에 개입하면서 ‘이후’를 준비하는, 진보진영의 협의체적 조직이 만들어져야 하는 거 아닐까?
아니,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정치’가 아니라 ‘운동’의 문제로 사유해야 한다. ‘정치’조차 운동이 ‘정치’로 전환되는 문제로 사유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형태로든 협의체적 조직이 만들어져야 하지만, 그것은 아직 다가오지도 않는 ‘선거’문제를 고민하는 조직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 대중운동이 확인하고 확보해야 할 과제를 정치적인 의제로 제기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부각시키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쇠고기 문제는 물론 대운하나 교육문제, 공기업 사유화 반대, 나아가 비정규직 문제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교체된 내각이든 아니면 교체된 이후의 정부든 해결하거나 확약해야 할 것들에 대해 대중적인 공감을 확산시키고 그것에 대한 대중적 의지를 분명하게 하는 운동이 진행되어야 한다. 이는 기이한 소강상태에 멈추어선 지금,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기만을 기다리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 정부에 대해서 대중운동이 새로운 주도성을 획득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싶다.
현 정부의 퇴진이라는 극한값을 상정해보면, 퇴진 그 자체로는 사실 더 난감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20일 이후 예고된 정부 퇴진 운동이 그 난감한 결과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려면, 퇴진 이후든 아니면 퇴진 이전이든 해결되어야 할 이 의제들을 명확하게 제기해야 한다. 그 경우 퇴진이 이루어지지 않는 때에도 우리가 지금까지의 운동을 명확한 성과로 변환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새로운 투쟁의 바탕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정말로 퇴진하게 된다면, 이러한 운동은 이명박 이후의 정부를 누가 맡아야 하는지, 그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대중적으로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운동이 대통령후보 선출이나 대통령 선거를 겨낭한 운동으로 전환될 때,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누구는 대통령이 되어선 안되는지가 분명하게 가시화될 수 있을 것이며, 이때에만 진보진영의 후보가 적절한 대안임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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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님은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이며, 서울산업대학교 기초교육학부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