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발련 출신 보수학자의 KBS 이사장 추천, ‘민영 미디어랩’의 도입, 10조 규모 거대재벌의 지상파 진출기회 확대, 언론재단과 YTN에 대한 인사압박 등이 모두 이러한 기획에 해당된다. 매우 조직적이고 노골적이다. 6월 10일 대회전으로 접어드는 국면에서 우리가 이기고 있다고 속단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일 수 있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 등 미디어 전반을 장악코자 하는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의 의도가 관철된다면, 이후는 절대 장담할 수 없다.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작업은 지금 한참 진행 중이다.
따라서 KBS와 MBC의 사영화 문제, 공영방송체제 해체의 문제, 미디어공공성 위기의 문제를 인터넷 공적공간 표현자유의 문제와 더불어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시급한 과제가 제기된다. 무관심과 냉소, 심지어 적대의 대중 정서를 공영방송과 미디어공공성 위기 일반에 대한 적극적 여론으로 전환시키는 게 문제다. 다행스러운 것은 MBC에 대한 대중들의 열렬한 성원이다. MBC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어떻게 공영방송과 미디어공공성 전체에 대한 보편적 관심으로 확대시킬 것인가? 언론·미디어운동 진영의 고민일 수밖에 없다.
답은 결코 쉽지 않다. 언론의 기능, 여론의 역할, 저널리즘의 책무를 지상파 채널, 공영방송, 주류매체에 일방적으로 위임하던 시기가 급격하게 막을 내리고 있다. 말 그대로의 대중교통의 빅뱅, 디지털다중저널리즘의 혁명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조·중·동의 추락은 똑같이 KBS와 MBC 등 주류TV의 위기를 동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MBC는 대중들의 애정과 신뢰를 유지 혹은 회복할 수 있었는가? 공영방송 복구 및 미디어공공성 보호 투쟁의 열쇠가 이 질문에 내포되어 있다. 잠시 MBC의 궤적을 되돌아보자.
“공영방송 MBC는 그 사이에 완전히 진화를 멈춘 듯하다. 진보의 노선은커녕, 개혁의 길조차 제대로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부동의 자세, 보다 정확히 말해 수구화의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다중의 삶과 밀접 연관된 진실을 채취·발굴함으로써 표피적 사실, 즉 선전의 벽을 뚫어내는 힘을 상실한 채, MBC는 대체 어디로 무력하게 표류하고 있는가? MBC는 더 이상 진실과 마주치기를 중지하고, 선전배후의 권력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는 듯하다.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공영방송의 위기이자 MBC의 위기에 다름 아니다.”
2년 전 이때 쯤 <미디어오늘>의 한 칼럼을 통해서였다. 그랬다. 그때 MBC는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평택주민들부터 철저하게 불신 당하는 상황이었다. 시청률을 쫓아 이른 아침부터 “아무리 봐주려고 해도 정말 너무하는” 드라마를 틀어대고 있었다. 서글프고 안타깝고 또 화났다. 그래도 '이제 사랑은 끝났다!'라 절교 선언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련이 남았다. 언론과 여론을 책임지고 그럼으로써 다중/사회의 이익을 보호하는 공영방송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구했다. “당찬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자본의 눈치나 보고 축구흥행이나 노리거나 얄팍한 뉴스로 우리의 눈과 귀를 덮고자 한다면, 공영성과 알 권리를 선정적 메시지로 대체하려든다면, 그때는 정말 모든 게 끝장이다”라고. 진실의 억압에 허접한 뉴스로 서비스하고, 대중들의 평화로운 삶에 대한 국가테러를 방임하며,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에 어물쩍 편승한다면 절교가 불가피하다고 위협했다. 수행성의 래디컬한 개조를 당부했다. 의미 있는 채널로, 가치 있는 매체로 재 평가받는 게 살길이라고 조언했다.
신뢰를 회복하라. 사회로부터 절대 소외·고립되지 말라. 신자유주의 자본국가는 그런 빈틈을 파고들며, 그렇게 해서 MBC 공영방송과 대중들의 삶을 공멸시킨다. 그러하니 선택하라. “어떻게 민주적 가치로 무장된 공영방송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할 것인지, 재탄생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내부 반개혁적 흐름을 방임하고 외부 수구·보수의 코드와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내·외부 진보의 의지, 진화의 욕망을 고수할 것인가? 의지를 집단행동으로 옮길 것인가? 아니면 지금과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말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당시 MBC는 충고를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먹고 사는 게 급하고, 시장 동향이 더 중요하다는 갑갑한 답변이 들려왔다. 시청률을 회복하고, 광고주를 확보하는 게 살길이라며 시큰둥했다. 납작하게 엎드려 위기 국면을 넘겨야 하니,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후진 뉴스, 지리멸렬한 시사프로그램, 통쾌하나 지나고 나면 남는 것 없는 말 풍선의 토론프로그램이 계속되었다. MBC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존재감 없는 방송사로 전락했다. 2년간의 답답하고 서먹서먹한 별거(?)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2008년 6월, MBC는 내 곁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있다. 집회현장에서 모두가 MBC를 아주 특별한 방송사로 대우한다. 애정을 듬뿍 표시하고, 사랑의 메시지를 팍팍 보낸다. 개인적으로도 그렇다. MBC를 다시 보게 된다. 대체 이 화려한 복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내가 잘못 판단했나? 기회를 엿보며 한 칼 갈고 있었는데, 결정적 한방을 날리려 준비 중이었는데, 내가 너무 성급했었던가? 오히려 내가 사랑에 충실치 못하였었나? <피디수첩>은 사회를 책임지는 공영방송의 구체적 표식이 아닌가?
맞다. MBC가 최소한 현재로서는 대중들의 품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 사회 보살핌, 정의의 편에 귀의해 있다. 진실 보도, 선전 해체라는 저널리즘의 기본정신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공영방송의 근본책무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으며, 그 공익서비스 수행성의 수준은 상업채널인 SBS는 말할 것도 없고 KBS와도 현격하게 차별된다. 조·중·동 수구신문의 권력선전/선전권력과 철저하게 대비되면서, 여론대의·사회보호의 공적영역을 확실하게 구축하고 있다. 그래서 확실하게 선하다. 어찌 된 일인가? 당연한 일인가?
아니다. 모든 게 대중들 덕택이다. 진실에 대한 기대, 선전에 대한 회의를 고수하다가 <피디수첩>의 한방에 즉각적이고 열화같이 응답한, 옳은 저널리즘과 악한 보도를 분별할 줄 아는 지능적 대중의 활약 탓이다. 2MB와 정부, 조·중·동, 그리고 이와 부합한 가짜 ‘전문가들’의 조직적·강압적 선전에 대항해 진실 발견의 자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가, <피디수첩>의 너무나 상식적인 서비스에 폭발적으로 응답해 결과적으로 MBC 자체를 진실교통의 시공간으로 견인해 낼 줄 아는 대중지성이 공영방송 재구축의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 요컨대 MBC는 뒤늦게야 다수 대중들의 의견을 쫓음으로써 자기살림의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정의와 진실에 관한 대중적 공통감각에 승복함으로써, 공영방송으로서의 자격을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권력이 아닌 역능, 정권이 아닌 대중들, 선전이 아닌 여론의 너무나 마땅한 길을 택함으로써 가능한 성과였다. 사실 MBC가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권력을 비판하고 진실을 소개하는 공영방송의 상식적 기대에 귀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성원과 애정을 끌었을 따름이다. 대중의 공감을 얻은 것이다.
결국 공영방송 존재의 전망, 공영방송으로서의 살길도 분명해졌다. 진실언론의 절대적 가치를 견지하면서, 상식의 저널리즘, 양식의 교통 서비스를 다하는 것이다.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와 조·중·동의 동맹에 맞서, 대중들과 언론자유/자유언론의 연합관계를 맺는 것이다. 폭발하는 대중교통의 역능과 함께 하면서, 진실억압·권력선전의 악한 세력에 진실해방·언론구제의 선한 진영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전을 통해 의미 있는 존재·가치 있는 주체로 평가받는 게 MBC를 비롯한 공영방송 생존의 미래비전이다.
바로 이러한 2008년 촛불집회 100일의 메시지를 공영방송과 그 구성원들이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MBC는 대중들의 애정에 우쭐거리지 말 것이다. 사랑은 주고받음으로써 깊어지는 법. 오늘의 사랑이 언제 또 불화와 냉정으로 이어질 줄 모른다. 그러면 끝이다. 애정에 금가면,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 그러하니 촛불소녀를 포함한 수십만 청계광장, 광화문의 증인들과 <아고라> 등지의 수백만 대중들 앞에, 그리고 텔레비전으로 직접 대면하고 있는 수천만 시청자들 앞에 진지하게 약속해야 한다. ‘더 이상의 배신은 없습니다!’
KBS가 해야 할 일은 훨씬 더 많다. 갈 길이 멀다. 아직까지 애정은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있다. 적대와 냉소, 걱정이 KBS를 바라보는 시선의 주된 내용이다. 이 불만과 불안을 애정과 신뢰의 관계로 바꾸어 놓을 것인지, 제작자·노동자들이 고심하고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그램으로 확실히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추호도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권력과 야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구제 가능성은 없어짐을, 더 이상의 연대와 협력 관계는 불가능해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KBS 노조의 획기적인 태도전환이 요구된다.
분명 아직까지 마음에 차지 않는 MBC와 KBS다. 공영방송에 대한 사랑은 그래서 불안하다. 그러나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찌 하겠는가? 대중들이 그 입증된 역능으로 끊임없이 압박하고, 그래서 외부의 비판을 통해 내부를 추동시키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 MBC와 KBS의 명백한 한계점 때문에 그 대중교통적 잠재성까지 포기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위험한 좌파 정치의 실패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에 반(대)하는 진보전략이란 최소한의 잠재성조차 최대한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개입·전유의 전략이 아니겠는가?
공영방송은 여전히 사이버스페이스, <경향신문> 등 비판적 신문과 더불어 미디어공공성의 핵심 보루에 해당한다. 농성전·공성전에 긴요한 보루다. 공영방송과 민주사회는 오직 더불어 대회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며, 이 제휴의 전략에 한 치 빈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공공성을 주류의 가치로 간주하는 것은, 마치 민주주의를 권력의 이념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은 인식적, 운동적 오류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영방송의 민주화 혹은 민주주의를 위한 공영방송의 사회화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진보전략의 핵심이 된다.
이러한 상황인식은 공영방송과 민주사회에 싹튼 애정과 신뢰 관계를 깨고 틈입코자 하는, 서두에 언급한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의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고려할 때 더욱 명백해진다. 우정의 연대를 누가 깨려 하는가? 2MB가? 최시중이? 방통위가? 재벌이? 조·중·동이? 뉴라이트가? 정확한 판단, 유연한 전략이 절실하다. 공영방송은 사회를 책임지고, 사회는 공영방송을 지키는 윈윈전략이 필요하다. 광우병에 올인한 대중들을 미디어공공성 위기의 장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대중과 공영방송 사이/중간에서 운동권이 할 일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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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규찬 님은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소장'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