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불혹의 절반을 넘은 저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그랬습니다. ‘피의 향연’을 통해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집권 기간 내내 대중을 개 패듯 두들기고 고문하고 심지어 강간까지 했습니다. 친구, 동료들의 얼굴에서, 그리고 양식 있는 모든 이들에게서 웃음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비록 때때로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아도 그것은 진정 웃음이 아니었지요. 요즘 말로 ‘썩소’였습니다. 그 수장인 전두환씨는 퇴임 후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의 불법비자금을 조성한 죄로 추징금을 선고 받았지만, 재산이 29만 원뿐이라고 하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는 지금도 전임 대통령으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번지르르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어떻게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있을까요. 물론 저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 만한 힘도 없습니다. 또 그들과 같은 극우파시스트가 아닌 한 어떻게 한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있나요. 그 어떤 근거를 갖다 대더라도 파시스트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양이 덜 된 저는 여전히 그들과는 한 하늘 아래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은 무력으로 최고의 공직을 차지하고 이른바 공권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그런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일들을 자행했습니다. 그것은 양아치만도 못한 군상들이나 할 수 있는 중대한 반인륜의 범죄이지요. 게다가 그들 가운데 누구도 진정성 있는 어떤 반성을 한 바 없으니 어찌 마음에서나마 그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들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진정 이런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공화국인가요"
▲ 참세상 자료사진 |
그런데 지금 민주주의가 과잉되었다고 말하는 이명박정권에 의해 그 과거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선혈이 낭자한 대중들의 모습이 다시 등장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나이 어린 여학생들도 보입니다. 공권력을 상징하는 ‘전투경찰’은 말합니다. “너희들 때문에 잠도 못자.” 그리고 입으로 옮기기 어려운 육두문자를 내뱉습니다. ‘공권력’을 편안히 잠자라고 만든 것인가요. 그러려면 왜 세금을 내고 금지옥엽, 천금같은 자식들을 군대에, 경찰에 보내겠습니까. 편히 잠자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애비, 어미, 형제, 동생 등 수 많은 대중의 생존과 삶을 지키라고 만든 것 아닌가요.
하지만 오히려 지금 그 공권력은 이명박정권의 파수꾼이 되어 물대포, 위압적인 방패, 몽둥이로 무장한 채 거리에서 그것이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과 대치중입니다. 시내에 모인 수만 명의 대중, 아니 먹고 살기 바빠 직접 동참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 촛불을 들고 함께 행진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밤잠을 설치고 있는 이유만으로도 이 권력은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요.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편안히 잠을 자야 할 사람들은 대중이고 그것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 ‘공권력’입니다. 상식이지요.
진정 이런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가요. 시청, 청계광장에 모인 모두가 헌법 제1조를 외칩니다. 어느 분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반문하더군요.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던가요?.” 여전히 이 시위에 배후조종자가 있을 거라 확신하며 그것을 찾아 헤매는 권력의 행태를 비판하는 것치고는 가볍지 않은 언술입니다. 기억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권력이 배후와 조종을 말하는 순간, ‘빨갱이’, ‘불순세력’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규율했던 과거 파시스트지배시대의 짙은 그림자가 아직도 그의 행보를 자유스럽지 않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었던 적이 있었나요. 아니 언제 권력이 민주주의를 대중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나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예는 단 한 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런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미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되는 온건한 제퍼슨조차도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하였겠습니까. 민주주의를 위한 이 사회의 생생한 투쟁의 역사는 그의 말을 증언하고도 남습니다.
"민주주의의 본령은 대중의 목소리, 요구, 그리고 행동"
확언하건데 선거를 통해 대의권력을 만들고 그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결코 민주주의의 본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피”로 상징되는 대중의 목소리, 요구, 그리고 행동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위임받은 권력을 끊임없이 보정할 수 있는 유일한 생동력의 원천인 것입니다. 따라서 위임받은 권력이 자신의 원천을 부정하고 그것과 대결하려 한다면 그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것인가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권, 건강권을 위협하는 미국산소고기 수입을 문제시하며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는 대중에게, 무슨 오락하듯이 무자비하게 물대포를 쏘아대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된 영문인가요. 온몸이 물에 젖어 차가운 새벽 공기 속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떨고 있는 그 모습들을 보며 과거 백골단의 무자비한 진압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연상인가요. 불혹의 반을 넘긴 지금, 노후계획을 짜야할 나이에 다시 운동화 끈을 묶고 거리에 나선 저 평범한 중년들을 보면서 콧등이 시려오는 것은 단지 그들과 어깨를 함께 한 좀 더 젊었던 시절의 추억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두들겨 맞고 고문으로 죽어나가는 그 고통의 시대를 ‘추억’이란 낭만적 말로 가벼이 그릴 수 있겠습니까. 과거와 같이 화염병과 연발최루탄이 등장하지 않는 상대적으로 ‘즐거운 집회와 시위’이지만, 그들의 속내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회를 만들자고 젊은 청춘을 거리에서 보낸 것은 아닙니다. 자식들, 손자손녀 뻘의 젊은이들과 어깨를 함께 하는 것은 새로운 문화적 경험일 수 있겠지만, 그들의 곤혹스런 심정을 저 권력의 화신들은 단 한 순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타인을 위해 자기의 삶을 던진 적이 없는, 혹은 과거에 그런 크고 작은 경험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의 역사가 아니라고 공언하는 저들이 진정 무엇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 고비만 넘기면 진정 모든 것이 잘 될까요”
지금 그들은 이 소고기수입정국만 잘 넘기면 이후 문제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중의 힘을 분산시킬 묘책 강구에 혈안이 되어 있겠지요. 아니 기우일지 모르지만, 그 이후의 반격을 위해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대중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권력이란 한 걸음 후퇴하면 꼭 그 이상 앞으로 나가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수장이 과도한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경계해야 할 시점입니다.
하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진정 모든 것이 잘 될까요. 여기 집권 100일을 맞은 이명박정권이 있습니다. 파시스트정치세력에 역사적 뿌리가 닿아 있는 그런 정권이지요. 그렇기에 대중을 여물만 찾는 배고픈 돼지 정도로 생각하는 그들의 발상이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전국토를 운하로 파 삶의 터전과 지역문화를 파괴해도, 생존에 기본적인 물과 의료(건강)보험 등을 사유화하여도, 부동산투기를 부추겨도 그저 그 무엇으로부터 ‘떡고물’이 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 심어주면 열광하는 그런 동물적 존재로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중이 이용해야 할 공유(공)재마저 글로벌 거대자본의 입에 고스란히 넣어주지 못해 저렇게 안달을 부리는 행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진정 이 정권이 자신이 공약한 대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대중을 배불리 먹일 수 있기는 한 것인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토지와 물, 의료(건강)보험과 같은 삶에 기본이 되는 공공재를 민영화시킨 권력치고 대중의 삶을 온전히 보전한 경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난과 병에 고통 받는 약자의 삶을 더욱 옥죄였지요. ‘강부자권력’인 그들이야 운하건설 예정지에 투기하여 천문학적인 불로소득을 거둘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그들의 과거 이력을 참조할 때, 이런저런 편법으로 이미 재테크하였기에 저토록 대운하에 집착하는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값이 비싸더라도 안전하고 맛난 소고기를 사서 먹으면 그만입니다. 좋은 수입산 심층암반수로 목을 축이고 모든 것이 보장되는 민영보험으로 안전한 노후를 설계하면 그 뿐입니다. 갖은 것이라곤 주체할 수 없는 부와 권력뿐인데 그들이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그런 그들이 한달 급여 60여만 원을 받아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비정규직 중년여성노동자들의 저 철탑 위 고공농성을, 1000일이 넘어가는 저 생존의 애끓는 외침을 과연 자기의 문제로 삼아 고민할 수 있을까요. 이런 그들이 어떻게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대중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한갓 미몽일 뿐입니다. 아니 병 주고 약 주는 식이지요. 지금 그들은 대중의 위세에 눌려 잠시 머리를 숙이는 척 하지만, 아직 무릎 꿇지 않았기에 대중을 그들의 꼭두각시놀이를 위한 희롱의 대상에서 놓아주려 하지 않습니다.
"무임승차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도 견제해야"
그렇지만 대중을 조롱하는 자들이 어디 그들뿐인가요. 여기 생동하는 대중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정치적 전리품을 챙기고자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와 같은 정치세력이 있습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신군부파시스트세력과 타협하며 권력과 부를 두루 맛본 자유주의정치세력이 그들이지요. 대중의 촛불이 사방으로 빛을 발산하고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그 이전 좌고우면하며 타협을 모색했던 이 정치세력은 이명박정권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성격을 지닌 존재인 것처럼 대립각을 세우고 대중의 대변인인양 슬며시 끼어들려 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무임승차자(free-rider)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누구입니까. 의미 있는 공청회는 물론 분신을 포함한 대중의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은 채 미국과 FTA를 체결한 그런 정치세력입니다. 물사유화 기본계획을 이명박정권이 만들었나요. 아닙니다. 이들이 그 장본인입니다. 호시탐탐 건강보험 민영화의 도입을 고민했던 그런 부류들입니다. 미국산소고기수입이 한미FTA와 무관한가요. 지금 이 세력은 마치 이 두 문제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대중을 호도하려 합니다. 이명박정권이 소고기수입문제를 양보하면 한미FTA를 깔끔하게 통과시켜주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그런 세력입니다.
지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들은 민주주의의 확장을 위한 대중의 결속과 투쟁을 자신들의 권력지분 확대를 위한 지렛대로만 이용해 왔습니다. 과거 노무현정권시절 탄핵정국을 경과하며 이들이 대중에게 보여준 그 생생한 배반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아마 기억이 뚜렷할 것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과 기대를 자신들의 의석수 증가로만 연결시켰을 뿐, 오히려 그것을 ‘무늬만의 개혁’으로 봉쇄시키는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하였지요. 그리고 지금 집권당이 된 한나라당에게 정치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없으니 대연정을 하자고 제안했던 그런 염치없는 정치세력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를 통해 이들이 한나라당과 오십 보 백 보인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를 자신의 영혼으로 생각하며 이처럼 대중을 희롱하는 사회정치세력들과는 과연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누구의 몫인가요.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회관계를 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시장의 논리에 의해 재단합니다. 그것을 유일한 척도로 하여 존재 의미를 부여하지요. 생산현장, 공공기관은 물론 학교조차 무한경쟁의 시장으로 내몰면서 경쟁력을 제고시키라고 채찍질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모든 것은 철저히 배제되어 주변으로 내몰리고 삶 자체를 위협받게 되지요. 환경, 생태는 어떤가요. 인간 삶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로 이해되지 않고 단지 성장의 수단으로 수탈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한반도대운하건설을 그토록 밀어붙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이윤에 굶주린 자들이 대중의 삶과 환경, 생태를 볼모삼아 무한경쟁의 투기를 벌이는 곳이 바로 신자유주의라는 링이지요.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진정 인간은 어느 경우에 삶의 절망에 빠지게 될까요. 그것은 현실의 고통보다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더욱 그렇게 됩니다. 이와 관련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자신 이외에 또 다른 대안과 삶은 있을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명박정권이, 아니 거슬러 올라가 이전의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 이외에 다른 대안과 삶이 있다고 말한 것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말합니다. 신자유주의만이 현존하는 유일한 사회관계이고 그것을 벗어나는 그 어떤 삶의 관계도 존재할 수 없다고요. 그렇기에 선택하라고 강요합니다. 잘 살고 싶으면 경쟁력을 기르라고요. 상위 10%에 들어가 신자유주의가 주는 행복을 누리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의 좌절을 먹고 사는 꿈이 미래가 될 수 있나"
그렇다면 언제나 남게 되는 그 나머지 90%는 어떻게 되나요. 지금 목도하듯이 그 10%의 안락한 삶을 위한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계속 존재해야 하는가요. 그들의 승리를 더욱 값어치 있고 돋보이게 만들 그런 장식물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하나요. 어떻게 어떤 이의 삶이 다른 이의 그것을 위한 수단, 장식물이 될 수 있나요. 다른 이의 좌절을 먹고 사는 꿈이 어떻게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나요. 다수의 대중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죽거나 또는 나쁘거나”의 삶만이 그들의 미래로 다가온다면, 그것이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면 어떻게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철저하게 대중의 삶은 물론 희망마저 짓밟는 체제는 그 동안 존재한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 삶의 희망을 멈출 수 있나요. 아닙니다. 그 어떤 권력이 있어 그것이 우리 대중의 삶을 위로하고 안락을 가져다주겠습니까. 결국 자본과 권력에 연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하는 바로 그 만큼만 자유로운 삶의 공간은 확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거리에서 그 새로운 삶을 향한 열정을 봅니다. 현재의 물신화된 삶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 없다는 외침과 몸짓이, 그런 희망이 존재하는데, 자기 이외의 삶의 관계가 존재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신자유주의의 독단에 어떻게 굴복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연대의 대열에 기꺼이 동참하여 진정한 정치적 주체임을 선언한 것이 저 권력자들이 말하듯 단지 소고기수입에 반대하기 때문인가요. 그리하여 이 문제가 어느 정도 타결되면 대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에 복귀할 것이라는 저들의 낙관적 언설을 그대로 믿어야 하나요. 진정 그런 것인가요. 서로의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다면,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저 엉성한듯하지만 질긴 연대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저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할 수 있을까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더불어 살수있는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시점"
그렇기에 이제 다시 묻습니다. 대중의 삶과는 무관한 권력 그 자체의 획득과 유지에 목적을 두며 사는 저들과 진정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쉴 수 있기는 한 것인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시청에서 촛불을 든 시민, 구로동 철탑 위에서 인간다운 권리를 달라고 외치는 여성노동자의 몫이 아닙니다. 언제 그들이 어떤 경계를 세우고 그 누군가를 수탈, 배제, 억압, 차별한 적이 있었나요. 그것은 그러한 경계를 세우고 고착시켜 그들의 삶을 고통으로 내 몰고 있는 권력과 자본이 대답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이 질문에 얼마나 진지하고 성의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서로의 삶에 대한 관심과 연대가 더욱 더 요구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입니다. 이명박정권 100일, 여전히 파시스트세력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 정권에게 진정 ‘한 하늘 아래 함께 숨 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숙고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요.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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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일 님은 성공회대 정치학과 연구교수입니다. 이 글은 민중언론 참세상과 함께 프레시안에도 동시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