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의 말대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데 있어 자본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다기보다 그 안에서 억압 기제를 갖고 있는 소수자 코드를 사용하고, 소수자를 멸시하는 위험한 발상을 했다는 것.
2. 김홍석이 사용한 소수성에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했을 때,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변론하기보다 회피, 변명, 차단 행위를 하여 책임을 전가했다는 것.
3. <밖에서 안으로>라는 의도와 다르게 국제 갤러리에서 정말 소수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국제 갤러리와 담합하여 갤러리 문을 닫았다는 것.
이 전시는 김홍석 스스로 자본주의 예술가임을 커밍아웃하고,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인간의 야만성을 화이트박스에 그대로 풀어낸 것이다. 즉, 본 전시는 상업화랑인 국제갤러리에서 전시하면서 그 스스로가 자본주의 예술가가 되고 있는 상황을 풀어내고 있기에, 그 안에서 ‘자본주의 비판의식을 읽는다’ 또는 ‘김홍석의 인간의 소수자 적 성찰적 메시지’를 읽는다는 것은 오류이며 불가능하다.
오프닝에서
▲ 사진/ 김연호 |
일단 김홍석의 이번 전시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예술이 죽었다’는 구시대의 헤겔의 말을 인용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행동주의 길거리 예술 퍼포먼스를 진행한 것은 구시대 발상의 김홍석의 전시가 자본주의 뻥튀기처럼 똑같은 논리로 사람들에게 읽혀질 수 있다는 위험 때문이다. 서구의 어느 시대이건 화이트박스가 갖고 있는 권력은 대단했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예술 안에서 예술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의 권력은 예술의 정신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밖으로 들어가기>가 나쁜 전시인 것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전시라고 해놓고, 자본주의자들을 비판하기는 커녕, 자본주의 안에서 살고 있는 약자와 소수자들을 대상화하고, 소재화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조롱을 ‘창녀 찾기 퍼포먼스’로 현실화한 부분에서 그 야만적 예술의 끝을 보는 듯하다.
우려하는 부분은 자본주의 예술 안에서 수많은 약자와 소수자들을 언제든지 이용 가능할 수 있고, 소재화할 수 있다는 씨앗을 세상에 회자 될 만큼 김홍석이라는 공인의 예술가가 뿌렸다는 것이다. 이 전시가 좋은 예술로 미술계에서 인정된다면,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은 김홍석과 비슷한 논리로 제2의 김홍석이 되어 화이트 박스에서 야만적인 예술행태를 보여줄 것이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공식적인 입장과 공개적인 사과를 해야 한다.
행동주의 길거리 예술 퍼포먼스인 <인간말종 퍼포먼스>는 김홍석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국제갤러리 앞에서 진행되었다. 약 한 시간동안 약 40여 명의 프로슈머적인 행동주의 시민 예술가들이 모여서 행위예술을 진행하였다. 김홍석이 잘나서라기보다, 그 야만성에 놀라서 ‘진짜’와 ‘가짜’ 사이에 감춰진 김홍석의 인권감수성, 젠더감수성을 드러내기 위한 예술 퍼포먼스였다. 행동주의 시민 예술가가 주체가 되어 진행된 본 퍼포먼스는 김홍석에게 집중하기보다,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 게릴라 형식으로 진행한 이 퍼포먼스는 다양한 관점과 생각을 갖고 있는 여성들이 웹2.0의 다양한 과정을 통해 함께 공유하며 진행되었다.
▲ 성명서 낭독 [사진/ 김연호] |
▲ 인간말종 퍼포먼스 [사진/ 김연호] |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고급 예술가들과 갤러리의 횡포에 반기를 들고, 화이트박스에서 나와 대안 장소에서 낙선전을 진행했던 것처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고급예술에 반기를 들고,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카페와 대안공간 및 길거리에서 진행했던 것처럼, 행동주의 예술가들이 길거리에서 예술을 보여준 것처럼, 우리 역시 행동주의 예술 퍼포먼스로 길거리에서 목소리를 내었다.
어느 시대이든지, 예술 속의 아비투스, 투쟁의 장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 중요한 것은 대안의 예술 형태가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미 어떤 특권계층의 예술가들만 향유할 수 있다는 예술 논리가 없어진지 오래다. 그 기득권을 놓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행해지는 예술을 새로운 예술, 작가의 자율권으로 인정하는 틀에 갇힌다면, 그 시대의 예술은 성숙할 수 없다.
▲ 국제갤러리는 문을 잠궜다. [사진/ 김연호] |
김홍석의 예술이 화이트박스에서 죽어 있음을 공포하였다면, 우리는 길거리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살아있음을 예술로 보여주었다. 우리의 피날레는 김홍석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국제갤러리를 도는 것이었다. 국제갤러리 측에서 문을 닫았다. 그 시각이 오후 2시 30분 정도였다. 우리의 작은 행동과 목소리가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큐레이터가 말했다. 약간의 설전 끝에 우리는 국제 갤러리에 들어가 ‘김홍석을 찾으면 120원을 드립니다’를 진행하였고, 몇 가지 상황이 해프닝처럼 진행되었다.
▲ 김홍석을 찾으면 120원을 드립니다.[사진/ 김연호] |
▲ 작품을 보호하고 있는 큐레이터의 손[사진/ 김연호] |
국제갤러리 측의 큐레이터에게 말했다.
우리 왈: 내가 창녀이니 60만 원을 주고, 이 사람이 찾았으니 120만 원을 주세요.
큐레이터 왈: 그것은 오프닝 때 퍼포먼스였습니다.
우리 왈: 주지 않을 거면, 저 벽에 붙어있는 저
큐레이터 왈: 작품이기 때문에 손을 댈 수도 뗄 수도 없습니다.
왜 나의 귀에는 이 말이 ‘우리는 인권보다도 작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들릴까.
살아있는 인간을 화이트박스 갤러리에서 살해하고 난도질해 놓고, '어떻게 인간을 그렇게 죽일 수가 있느냐고’ 항변하면, 김홍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인간의 생명보다 나의 예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전시는 인간의 야만성을 비판하기 위해 진행된 퍼포먼스입니다’
더 늦기 전에 김홍석과 김홍석과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작품을 소개한 국제 갤러리의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