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넘게 살던 부평의 최병은 씨 댁 옆집에서 이사하고 쓴 시처럼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를 맡고 있을 것만 같군요. 그곳에서도 설마 배고프진 않겠지요? 배고프다는 말, 춥다는 말, 외롭고 아프다는 말, 참 아프지요. 배고프고 추운 것이 일상인 자에게서 나오는 그 말 참 농담 같지요.
형을 마지막으로 만나서 달게 먹던 <가야>라는 식당의 해장국이 생각납니다. 옷 속에 뼈만 들어 있는 듯 무게감이 안 느껴지던 이미 다 비워버려 헐렁한 육신, 이미 어디로 가 버린 듯한 살집과 가벼운 혼이사 애써 모른 척 하며, 침묵 속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주 일상적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래기국을 뜨고, 우리는 거리로 나와 커피 집을 찾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 그것은 항상 먹는 것과 연루되어 있군요. 마치 당신이 차린 밥상이기라도 하듯 의기양양하게 데려간 5천원짜리 한식집도 생각납니다. 밥상 가득 채운 나물들과 여러 종류의 전라도 김치가 맛깔스럽게 놓인 부평의 그 집에서 하루 이틀에 한번씩 영양보충을 한다 했습니다. 아주 진한 육수를 아낌없이 퍼주던 설렁탕 위에 파를 듬뿍 올려 행복하게 밥숟갈을 뜨던 부평 예식장 골목집도 생각나는군요.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흐릿해도 함께 땀을 흘리며 열심히 밥을 먹던 모습은 선하게 남다니요. 커피를 마시고는 항상 챙겨온 시집을 내밀던, <클라크>라는 이름의 커피 집도 생각이 나는군요.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 형은 양말도 안 심고 허름한 잠바 차림으로 기침을 계속 해대며 커피를 마셨지요.
떠나기 한 달 전, 당신은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좋다 했습니다. 학생들이 지나다니는 대학교의 벤치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새를 몇 시간씩 바라보며, 해소 기침 때문에 생각도 끊어지고 말도 시도 다 잊혀지고, 그냥 숨만 쉰다 했습니다. 살아서 싱싱하게 움직이는 것들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 했습니다. 햇살 아래로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건강한 종아리가 하도 찬란히 빛나서 뼈저리게 부럽다 했습니다. 햇살과 기쁨이 세상에 그렇게 충만한데, 당신은 어쩌자고, 왜, 이번 생을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는 겨울산’처럼 통과해야만 했던 것입니까? ‘흉터와 외침 위에 얼음 저며 드는 벽화壁畵처럼 고통을 아로새겨야만 했습니까? (시, 「氷壁」) ‘배고프게 흘러가는 공장 굴뚝 연기 몇 모금 훔치고’ ‘흐린 하늘을 울‘며, ‘절벽 같은 허공을 찢어 피 묻은 부리에 쟁쟁한 햇살 물고’ 우짖으며, 외롭게 하늘을 흘러야만 했습니까? (시, 「폐업」중)
가난하고 가난했던 시인이여, 나이 오십 다 되도록 보험도 인감도 제 소유의 집도 어느새 사랑도 동지도 친구도 다 사라졌다 믿으며, 넘쳐나는 부재와 결핍 속에서, 잔액 없는 통장과 천이백 만원 전셋집과 이승에서 괴로웠던 육신이라는 껍데기를 남기고 떠나간 당신 뒤에 남은 것은 당신이 다 놓고도, 다 떠나보낼 준비를 끝내고도, “시를 못 쓰는 게 괴롭다”, 마지막까지도 끈을 놓지 못하던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당신의 시뿐이군요.
누군가는 당신의 시에 전투성이 없다 합니다. 누구는 당신의 시에 세상을 뒤엎을 해방의 에너지가 없다 했습니다. 혹자는 당신의 시를 지배하는 정서가 위대한 노동자의 혼 대신 연민과 애상과 민중적 감상주의라 했습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삶에 건강한 노동의 흔적이 없다 했습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시에 삶의 실체가 없다 했습니다. 분명한 존재의 육질 대신, 흐릿하여 잡을 수 없는 이미지만 남아 있다 했습니다. 낙관과 희망 대신 비애와 감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했습니다.
모두가 맞습니다. 그러나 다 맞진 않습니다. 참다운 전투성은 자신의 내면 깊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존재의 외침입니다. 당신은 치열하게 당신 스스로의 모순과 갈등에 우선적으로 대면했습니다. 존재라는 이름의 전투, 아무것도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밝혀주지 못하는 소외되고 물화된 이 세계 속에서 어느 노동자가 당신만큼 스스로를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부서진 존재를 부정하며, 그 억눌린 세계에서 벗어나오려 안간힘 쓰며, 피 흘리며, 솟구쳐 날고자 했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이, 노동자의 정신이, 비천하게 찢겨지고 병들고 즉물화 된 이 세계에서 세상을 구원하겠다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슬픔과 고통을 씹으며 취해서 소리치다 울다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 짓뭉개진 존재의 바닥에서 어느새 흰 빛으로 안아주던, 그것이 바로 당신의 시이자 노래가 되었을 터인데...... 고통의 한가운데 있으되, 고통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방편이자 길이 시이고, 고통의 어둔 터널을 피하지 않고 감당함으로써, 그 끝 환히 터오는 한줄기 빛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당신이 지닌 삶의 태도이자 시의 전략이었을 터인데......
때로 끔찍할 만치 지독하고 집요해서 미워하기도 했던 형, 당신을 참 많이 미워하고 처절하게 사랑하였습니다. 당신은 집요하게 요구하고 철저하게 주었습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욕망하고 진실로 비웠습니다. 진흙탕인가 하면 연꽃이었고, 치사량의 독이면서 약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와 인간의 마음 속 그림자와 빛을 다 토했습니다. 정면과 반면을, 양극과 음극을, 그 사이 처절하게 분열되었을 아픔과 갈등과 하나 됨의 소망을 詩의 집에 담았습니다.
절단기에 잡아먹힌 헐렁한 친구의 팔소매를 끌고 술을 마시며 원직 복직을 외치는 그의 쉰 목소리를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자문하는 당신에겐 그것이 정직한, 희망의 맨얼굴이었습니다. 지하도 어둑한 계단에 동전 하나 걷어차는 노숙을 보다가도 거렁뱅이를 보다가도 지나가는 비구니 스님의 미소를 보다가도 눈물 흘리던 당신에겐, 연민이 눈물 속에서 낳고 키운 비애가 자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알 수도 없는 곳에서 눈물이 솟는데// 내 안에도/ 나도 몰래/ 나를 키우고/ 나를 살리는 것 있다는데// 나 태어나기 전에도/죽은 후에도’ (시 「눈물」) 비애를 넘어서는 곳에 온전한 생명, 깨어지기 이전의 전일한 존재가 숨 쉬고 있을 터인데, 그것이 이 세계의 관계와 사랑 속에선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얼마나 아프게 찢어져야 그 틈새로 그 온전한 생명의 원융을 만날 수 있는 것인지요.
당신에겐 병영 같은 공장도, 컨베어벨트에 실려 하루하루를 탕진하는 피로하고 아픈 어린 노동자의 현실도, 몽둥이와 쇠파이프와 투쟁과 전쟁이 난무하는 이 세계도 빠르게 지나쳐가는 이 도시의 속도도 죄다 감옥이었고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밥을 벌어먹는 일이 치욕인, 아니 물신화되고 계산에 의해 굴러가는 세상에서 사는 것 자체가 치욕인, 삶을 바라보는 것, 철저하게 자기 내면의 치욕과 모멸을 견디는 것, 그것이 형의 생존법이자 시의 전략이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때가 없는 가진 것 없는 존재들과 노동자들 주정뱅이 노숙자들이 당신이고 그들이 당신의 거울이었을 겁니다. 그것이 고통 속에서만 형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었던, 실감나게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당신에게 있어 실체감을 주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존재보다 확실한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고통만이 당신에게 적나라한 진실이었고 존재를 확인하는 증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프지만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지향으로서가 아닌 존재로서의 슬픔, 타인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비루하지만, 사실은 그것만이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까? 스스로의 슬픔과 고통이 위대하긴 커녕 비루하고 거덜나고 세상을 향해 뭐라 주장할 것도 없는 못난 생애들에 대한 연민으로 일치되어 확장되는 것, 이것이 혹 큰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존재도 사랑도 온전하지 못한 세계에서 온전한 세계를 꿈꾸는 자가 부정과 광기 없이 어찌 견딜 수 있었겠습니까. 깨어지고 부서지기 쉬운 이 무상한 세계에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집이 세상 안에 어디 있었겠습니까. 지금 이곳엔 늘 없기 마련인, 흰 빛......
믿어야 할 것은 바람과
우리가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침묵
그리고 그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
이렇게 우리 헤어져서
너도 나도 없이 흩날리는
눈송이들 속에서
그래, 이제 詩는 그만두기로 하자
그 숱한 비유들이 그치고
흰 빛, 흰 빛만 남을 때까지
(「흰빛」)
햇빛과 공기와 물과 흙이 있는 지상의 시간은 육체의 시간. 아이스크림에 폭 빠진 아이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나가고, 짐을 싣고 질주하는 오토바이 땀 냄새가 지나가고 살아있는 모든 육체가 지상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부러운 듯 흐믓한 듯 지상의 양식을 바라보던 아픈 형, 이제는 부서져 아프지 않고 온전하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을 무한허공의 흰 빛에게 보냅니다.
그대는 가고 여름은 오고
먼 나라 죄 모르는 아이들은
가마솥 바닥에 붙은 누룽지처럼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고
사흘 내내 비는 내리고
평양에도 서울에도 죽어라고 비는 내리고
사방의 길은 다 끊기고
아현동 높다란 석벽 청청한 담쟁이 사이
본대에서 떨어져나간 담쟁이덩굴 몇 마디
벽에 묶인 채 젖고 있다
문득 투드득 실이 끊어지는 소리 내내 한 몸
이어주던 혈관 터지는 소리 환청처럼 들리는데
미라가 되어서도 벽 움켜잡은 손이여
너는 칼바람 함께 맞으며 어깨를 겯던
선 끊긴 빨치산이다 그의 얼음 박힌 수족이다
살아남아, 다시 수직의 벽 솟구쳐 오르는
어린 담쟁이 이파리들 간절히 손 뻗어
떨어져 나간 주검 청청히 덮어주는데
지난 겨울 수화기를 울려대던 해소기침 소리여
끝내 놓쳐버린 그대 작은 손이여
(「놓친 손」)
故박영근 시인의 삶
전북 부안읍 마포리. “들쭉날쭉한 갯가를 메워 드문드문 간사지 논이 있었고 대부분은 비탈진 산밭을 일구거나, 갯가에 나가 조개를 줍고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동네 “평생 기차 구경 한번 못해보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던 오지. 돈이 없어 계란 두 개를 가지고 가” “석유 4홉들이 1병을”사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 그곳에 꿈 많고 여린 한 아이가 있었다.
1974년 열 여섯. 전주고. 『사상계』등을 탐독한 후, 쏘비에뜨 혁명을 빗댄 창작시를 써서 경찰 조사와 가택수색을 당하고, 김지하의 『오적』을 소지한 혐의로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은 어린 학생 하나가 있었다. 더 이상 억압적인 학교 생활이 불필요하다고 자퇴한 어린 학생 하나 있었다.
1976년. 열여덟 이후. 민청학련을 만나고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만나고,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만나며 역사와 사회에 눈 뜬 청년이 있었다. 청계피복과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만나며 노동운동에 눈 뜬 청년이 있었다. 구로공단 ‘취업공고판 앞에서’ 갈 길을 묻던 청년이 있었다. 제본공장, 곤로회사에서 잔업 철야로 분노를 삭이고, 서정을 담금질 하던 젊은 시인이 있었다. ‘대열’을 꿈꾸던 노동해방 투사가 있었다.
1984년. 스물 여섯 이후.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민요연구회, 미술패 두렁,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노동문화예술운동연합, 민예총, 작가회의..로 쉬지 않고 내달리던 한 시인이 있었다. 구로동과 인천에서 취업하며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맞던 한 시인이 있었다. 그에게 “민중, 혹은 문학은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이며, 가야 할 미래로서의 새로움”이었다.
▲ 故 박영근 시인 [출처: 민족문학작가회의]
1990년대. 서른 즈음. 인천민예총을 세우고, 인천작가회의를 만들고 『김미순전』을 쓰고 수많은 시를 썼지만, 가슴 한 구석이 휑해져 왔다. 혁명을 꿈꾸던 불의 시대가 가고, 쓸쓸한 자본의 가을이 왔다. 전선은 해체되고 냉해가 몰려왔다.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물어보았고, 나는 나를, 우리를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했다. 스스로 자신을 혹독하게 채찍질하며 차라리 외로운 길로 유배시켜 간 한 시인이 있었다.
2000년대. 마흔 즈음. 할 말이 많지 않았다. 뜨거운 눈물만 자꾸자꾸 흘러 나왔다. 아름다운 세상이었지만 세상은 제 빛깔과 자유를 찾지 못하고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속으로 더 어둡고 암울했다. 민주주의는 더 나아가지 못했고, 비루한 자본의 일상 속으로 빠져든 사람들은 꿈을 잃어갔다. 낭만도 결기도 사랑도 연대도 정당한 분노도 사라진 각진 세상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사랑과 상처를 남기고, 2006년 5월 11일. 마흔 여덟. 저 하늘의 자유를 향해 비상해 간 한 마리 외로운 새가 있었다. 고 박영근이었다.(송경동 시인 정리)
그의 2주기 추도식이 5월 10일 토요일 6시에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에서 조촐하게 열렸다. 그를 기리는 추모글과 시인 삶의 대략을 김해자 시인과 송경동 시인이 보내와 실는다. 박영근 시인은 저항의 노래였다가 지금은 국민가요가 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