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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정치의 전환: 어디로 가는가?

[특별기고] 갈림길에 선 대만의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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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대만에서 8년 만에 정권교체가 일어나자 한국의 언론은 압승을 거둔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총통 당선자와 이명박 대통령을 비교하기에 바빴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진당의 천쉐이볜이 민주화세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시민운동진영을 급격히 흡수하고 제도화 시켰던 점이나, 민진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둔 마잉주 당선자가 이명박의 실용노선과 유사하게 '633플랜'(성장률 6%, 국민소득 3만달러, 실업률 3% 이하 달성)을 내세우며 유권자들의 마음을 잡았다는 점도 비교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천씬싱(陳信行, 대만 세신대학) 교수는 2000년 대 들어 집권에 성공한 민진당에 일부 사회운동이 결합하면서 대중운동조직에서 입법청원운동으로 그 운동을 전환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마잉주의 당선이후, 약간의 개혁조치를 얻어내는 것 조차 요원한 상황에서 사회운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편집자 주


지난 3개월은 민진당이 국민당에게 완벽하게 패배하는 시기였다. 이는 대만 정치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적 전환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수년간 동아시아의 지정학과 미/중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이번 사건에 대해서 대만이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그 변화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8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어낸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 [출처: Taipei mesto]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으로부터 탄생하여, 그리고 스스로를 민주화운동의 적자라 생각하는 민진당에게, 이번 패배는 절멸과 같았다. 5월 20일 천쉐이볜으로부터 마잉주에게 정권이 이양되면, 그 정치적 영향력은 1989년의 수준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집권당이자 한번 의회에서 다수당인 적도 있었던 민진당이 겨우 25%의 의석수를 가진 소수 야당으로 전락한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당으로서의 민진당이 지난 20년간 얻고자 노력해왔던 호소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 적어도 60%의 대만 국민들은 그동안 공허한 이데올로기적 슬로건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부패, 오류, 정실주의, 철면피와 같은 뒷거래 및 정경유착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당이 반대세력에게 폭정으로 대응했던 부분만 제외하면, 현재의 민진당의 이미지는 2000년 이전 반세기 동안의 국민당과 거의 정확히 같다.

당연히 뒤따르게 될 질문은 이런 것이다. 국민당은 지난 8년 동안 바뀌었는가? 그리하여, 민진당이 잃어버린 모든 정치적 미덕들을 다시 제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국민당 캠프가 선전하는 것처럼, 반성하고 개혁된 새로운 정당이 정권을 쥐게 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는 1992년 실시된 국회의원 최초 전면직선제 이후, 국민당뿐만이 아니라 어떤 정당도 지금과 같은 막대한 권력을 쥐어 본적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긴급한 질문이다. 75%이라는 다수의 국회의석과 행정부를 동시에 장악한 것은 국민당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충분히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유명했던 부패사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민진당을 지지한 40%의 상당수의 대만인들(민진당을 상징하는 녹색에서 따와 ‘진녹’(deep green)이라고 불린다)은 5월 20일 이후의 군사정부 시절의 귀환에 대해서 초조해하고 있다. 게다가, 새 정부는 중국 공산당과 매우 우호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두 부패한 전제적인 정당이 연합하며 우리의 섬을 통치하는 것일 수도 있다.

국민당은 새로 태어났는가?

외양으로 판단할 때, 진녹에 속하는 사람들의 걱정은 단지 편집증적인 것이다. ‘미스터 마(마잉주-편집자)’는 배불뚝의 대머리 국민당 구 보스들이나, 그 뒤를 이었던 추악한 민진당 정치꾼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는 잘 생겼고, 육체적으로 건강하며, 우호적 성품을 가졌다. 또한, 하버드대 박사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자 매우 열심히 노력한다. 공금유용 사건(추후 면책됨)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섹스 또는 부패 스캔들과도 연루된 적이 없다. 그는 당선 이후에도 규칙적인 아침 조깅을 계속했으며, 그의 부인도 여전히 버스 출근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한 무리의 경호원들과 기자들이 뒤를 따르고 있긴 하다.

마잉주는 부패하지 않았다고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첫 번째 고위급 정치 직책은 1993년의 법무부장[법무부장관]이었으며, 철권을 통해 만연한 부패에 대한 척결(물론 국민당 정치인들에 대해)을 공언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와 같은 당 동료들이 부를 축적하는데 유해한 행동을 해서, 곧 교체되었다.

후보로서 마잉주의 가장 큰 장점,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국민당 내부에 그와 같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무결하다! 그가 당내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그의 캠페인이 범국민당 캠프 전체를 그렇게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던 정확한 이유는 그의 캠프가 어떤 스캔들 등에 연루된 적이 없는 같은 품질의 누군가를 내세울 수 없었던데 있다.

현재 입법원[국회]의 구성은 시사적이다. 전체의석이 113석이고, 그 중 지역구 73석중 1/3이 조직폭력과 관련되어있고, 나머지의 다수는 전통적 지역 파벌을 대표한다. 이러한 파벌들은 부동산 투기를 통해 수익을 얻기 위해, 지방 정부에 대한 통제를 통해 지역 경제 기구들을 장악하며, 그들 모두는 공공사업으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가로채는데 유능한 건설 기업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파벌들은 군사독재 시절 국민당의 기층 조직으로서 국민당에 의해 양성되었고, 복잡한 지역 네트워크를 통해 표를 얻을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당 내에서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민진당도 그런 전통적인 정치인들이 어느정도 내부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 국민당 캠프로부터 감염되거나, 국민당으로부터 어떻게 지역 정치 노름을 하는지를 성공적으로 배운 자들이다.

국회의원의 나머지는 정당명부제를 통해서 선출되었고, 그들은 정당의 가치와 혜택받지 못한 영역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하지만, 그들도 국민당의 구시대적 인물들보다 결코 덜 하지는 않다. 대다수가 역시 전통적 지역 파벌 지도자들이다.

국민당 캠프는 당내에서 깨끗하고 참신한 인물을 지명하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당이 지난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당명부 비례대표로 지명한 ‘노동부문 대표’ 호우차이펑(候彩鳳)은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회의 종신직 위원이었다. 그녀는 어느 전국적인 노동조합연맹 의장이라는 직함을 맡고 있다. 그 노동조합연맹은 특이하게도 민진당 정권 기간 조차도 대만 전체의 수출가공지역의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법적 독점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공업 도시인 까오슝에서 가장 큰 재력가 정치인 중 한 명이었다.

국민당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점은 호우가 이번 선거에서 지역구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대신하여 ‘노동부문 대표’로 나온 사람은 노동이나 노동조합 활동과는 일말의 관련도 없는 개발업자 출신 지역 정치인이었다. 그는 단지 국민당 비례대표로 지명되기 위해서 중화노동연맹의 직위를 매수했다.

결국, 마 정권은 과연 어떤 부류의 정권일 것인가? 한 무리의 하이에나를 이끌고 있는 천사인가? 게다가, ‘마’는 말 안 듣는 하이에나에게 벼락치듯 대할 수 있는 대천사는 아니다. 오히려 그는 멋쟁이이다. 상대적으로 엄격한 자기원칙에도 불구하고, 그가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인식된 이유는 바로 ‘타협’이다.

낙관적 범국민당 지지자들은 다른 곳에서 위안을 찾을 수도 있다. 소위 국민당의 기술관료적 전통이라는 것 말이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인 수십 년 동안 대만 경제를 이끌어왔던 것은 똑똑하고, 준법적이며, 이타주의적이고, 비전을 제시했던 관료들이라고 민진당 지지자들조차도 믿고 있다. 지금의 강력한 지역 파벌 보스들이 여전히 시골에서 정당의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을 때, 기술관료들은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고(왜냐하면 당시에 입법원은 허수아비였고 견제와 균형을 이룰 어떤 장치도 없었으므로), 그들의 개인적인 소득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훌륭한 투자환경을 조성해주는 데에만 그 권력을 사용했다.

리궈딩(李國鼎)과 같은 인물들은 미디어에 의해 폭넓은 지지를 받는데, 특히 경제관련 매체들이 그렇다. 그들은 당시 대만의 번영의 이면에는 그들과 같은 진정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역으로, 민진당 집권기간 8년 동안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최근 수년간의 경제침체를 설명하기 위해 이용될 수 있다. 이런 해석이 역사적으로 정확한지는 매우 논쟁적인데, 이런 해석은 그 시기에 대만 민중들에 의해 지불된 대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인권침해, 노동탄압, 도시 빈곤, 환경파괴 등등의 대가 말이다.

하지만, ‘마’의 이미지는 리궈딩과 같은 기술관료로 보인다. 그로 인해서 그가 과거처럼 효율적인 내각을 구성하고, 또 의회 내의 걱정스러운 상황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일까? 아마도,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사고는 스스로를 위안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특히, 20년 동안의 자본도피가 일어난 후인 지금...

이상의 것들이 실패하게 되더라도, 새로운 국민당 정부는 대만 경제의 고통을 해결하는 하나의 멍청한 근거에 기초한 해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중국이다. 민진당이 대만의 공식적 독립을 추구하며 중국을 자극하고 똑같이 미국을 애먹이느라 매우 바빴던 동안, 그리고 이로 인해 대만의 자본들이 대륙의 중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헛되이 막는 동안,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긴밀한 당대당 대화 채널을 구축했다. 무역, 관광, 투자 등 중국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개방하는 것이 ‘마’ 캠프의 의제 속에 두드러진다. 사실상 많은 국민당 지도자들(약간의 민진당 정치인들도 그렇지만)은 중국의 지역 주관단위와 함께 공적 자산의 대규모 사유화를 통해 이익을 나눠 갖는, 중국의 중요한 투자자들이었다. 그리고 국민당이 1990년에 스스로 하고 있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친숙할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중국은 대만인 경제인 또는 해직된 노동자들이 그 넓은 시장과 값싼 노동력을 가지고, 일확천금을 노려 볼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의미한다. 혹은, 부유한 중국인이 대만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들은 관광객 또는 부동산 및 주식시장의 투자자로서 환영 받을 것이며, 일자리를 제공하고 2인용 아파트의 가격과 일반 대만인들이 보유한 얼마 안 되는 주식들의 가격을 올려줄 것이다. 중국은 성장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망설임 없이 묻는다. 누구를 위한 성장인가?

그렇다면, 사회운동은...

결국, 민진당의 추락은 사회운동과 진보적 운동에 있어서 좋은가 나쁜가? 이는 자주 질문 되지만, 좀처럼 대만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토론되지 않는 질문이기도 하다. 대만의 활동가들은 일종의 경험주의적인 경향을 가지는데, 그들이 이전에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상상하는 것을 꺼린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비도덕화된 민진당이 지금 자기 비판의 과정 속에 있다. 민진당에 의해서 지금까지 제기된 모든 종류의 자기비판은 2000년 이후에 민진당이 진보적 색채를 포기해버림으로써 역사적 과오를 범했다는 것과 이로 인해 민족적 동일성과 관련된 문제를 제외하면, 국민당과의 차별성이 희석되었다고 주장되는 것들이다.

2000년 이전에 넓은 의미로 규정된 대만의 사회운동에서 가장 큰 분할은 "민진당 문제"였다. 운동에게 있어서 권력을 얻기 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당을 지원하고 그에 우리의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인가? 또는 주류 정당들은 단지 권력만을 원하기 때문에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옳은가? 8년동안의 민진당 집권기간은 후자가 옳았음을 증명한다. 천쉐이볜 정부는 2000년 당선 직후, 그들의 정당 프로그램과 선거공약 상에 있는 대부분의 진보적인 요소들을 폐기해 버렸다. 민진당은 종종 이를 국민당 의원들이 보이콧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또는 원자력 발전 중단과 같은 이유의 경우에 그들은 미국이 원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간단히 주장한다. 민진당 집권기간 동안, 대부분 현금지원이 방식을 취했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책적 조치들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공적 자산의 지속적인 사유화와 대기업으로의 이전은 훨씬 뚜렷하다.

친민진당적인 많은 활동가들이 지난 8년 동안 민진당 정부에 의해 고용되었다. 대부분 어떤 대단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고, 그들 스스로 주장해왔던 것들과도 모순되었다. 이와 같은 경력을 가지고, 그들의 이전 동맹들과 운동에 있어서의 지지자들의 신뢰를 다시 얻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일부 사회운동 그룹은 민진당 집권 기간 동안 활동방식이 대중조직에서 입법청원으로 전환되었다. 그 중 주요한 것이 친민진당이었던 대만노동전선(Taiwan Labor Front)이다. 한때 자율적인 노동조합운동의 분파였다가, 그들의 핵심 리더들이 민진당 정부 안에서 노동부의 관료가 되고, 편안히 퇴직한 후인 지금은 한 두명의 스탭만이 존재하는 작은 사무실이 되었다. 여성운동은 1990년대 중반에 매우 눈에 띄었는데, 자유주의적 경향들이 민진당과 결합하고, 급진적 경향들이 새로운 지반을 창출하는데 실패함으로 인해, 현재 매우 침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입법청원의 낡은 방식은 국민당 정부 하에서는 점점 더 쓸모없어질 것이다. 1992년 이후, 입법원이 전면 재선출된 이후, 노동단체부터 동물권보호단체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회운동 단체들이 정당대립구조를 이용해왔고, 자신의 의제를 법안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2000년 이후 때로는 이익단체들이 행정부와 국민당이 지배하는 의회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려 하기도 했다. 대중적 행동은 입법청원활동을 돕는 보조적인 압력수단으로만 눈에 띄었다.

때때로 운동들은 약간 늘어난 개혁조치를 얻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의회에서는 야당이 거의 의미 없는 소수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같은 당에서 대통령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유효한 정치개혁의 모든 가능성은 단지 국민당의 의지에 달려있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종국에는 건강한 발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년간 대만의 사회운동은 주류 정치권과 복잡한 정치 게임을 하느라 매우 바빴으며, 기층 조직화에는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은 강력한 일당 지배 하에서 스스로를 힘빠지게 하는 엄청난 선택지들과 선택지의 조합들은 사라질 것이다. 권력에 굴복하느냐, 아니면 조직하고 투쟁하느냐의 갈림길이다.

[번역] 연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