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 이후 숭례문은 한일 양군의 첫 전장이었다. 1907년 8월 우리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조선 군인들은 무기를 탈취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숭례문 벽 위에 기관총 2문을 설치하여 조선군을 사살했다. 두 달 뒤 일본은 황태자의 서울 방문을 빌미로 철거를 시도했다가 조선 민중의 반발로 실패했다. 대신 숭례문을 잇는 성곽을 부숴 인천항 축조에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숭례문의 보호석축은 지면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우리의 전통 석축법과는 달리 안쪽으로 완만한 곡선인 일본식이다. 숭례문은 일본 색 물씬 풍기는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전쟁 때도 위층의 일부가 포화에 날아갔다.
이쯤 되면 숭례문이 560년 넘게 웅장한 모습을 지탱해온 한국인의 자존심이라는 언론의 미사여구는 엉터리다.
현판 글을 쓴 사람도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부터 태종 때 명필로 공조참판을 지낸 암헌 신색이라는 이도 있고, 중종 때 공조판서였던 죽당 유진동,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다.
그런 현판을 화마에서 건졌다고, 몸통은 잃었지만 심장은 그나마 지켜냈다고 떠들어대는 언론의 허풍 앞에선 말문이 막힌다.
숭례문은 1956년과 1962년에도 두 차례 크게 보수했다. 불국사는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복원됐다. 이 나라 국보 가운데 상당수가 박정희 독재정권 때 새로 지어졌다. 정통성이 약한 정부는 언제나 역사에 기대려 한다. 박정희 정권은 유독 ‘민족주의’란 말을 부각시켰다. ‘10월 유신’을 설명할 때면 ‘우리식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들이댔다. 이런 박 정권 밑에서 입만 열었다하면 “민족중흥의 역사를” 주워섬기던 보수주의자들이 최근엔 글로벌 시대에 무슨 민족주의 타령이냐며 세계화를 주창하고 있다.
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이미 옛 것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됐다. 일조한 이에는 350억 원을 들여 숭례문 아래로 시멘트 길을 만든 이명박 전 서울시장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난 1999년 고건 서울시장 때는 밤마다 숭례문에다 색 조명을 비춰놓고 제17회 서울시 건축상 야간경관조명 부문 동상을 주기도 했다.
굳이 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이미 조선 민중의 손으로 만들어진 전통 건축의 묘미도, 아픈 역사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 흉물처럼 태평로 2가 빌딩 숲에서 섬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태평로 2가에 늘어선 삼성생명빌딩, 삼성본관, 태평로빌딩, 신한은행사옥은 숭례문과 함께 찍혀 외국의 관광안내 책에 단골 모델이 된 지 오래다. 검붉은 화강석 옷을 입은 삼성생명빌딩만큼은 유독 몸을 비튼 채 숭례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왕조의 정기라도 느끼고 싶었나 보다. 태평로의 옆 건물들도, 길 건너 북창동 건물들도 모두 길에 나란히 서 있겠다는데 혼자만 비틀어져 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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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님은 공공노조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