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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칼럼] 권력자들에 의해 덧칠된 숭례문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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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건축은 정도 1년 뒤인 1395년 태조 때다. 반세기 뒤 세종 29년(1447) 크게 새로 지었다. 전라도 완주의 목수와 석수 등 인부 6천8백 명은 당시 영문도 모른 채 동원됐다. 8월에 시작한 공사는 이듬해 5월까지 이어졌다. 집에도 못가고 끌려온 7천여 조선 민중은 한 겨울을 타지에서 보내야 했다. 세종은 이때 절대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로 땅을 돋워 숭례문을 들어설 때 오르막길을 오르게 했다. 이후 성종 10년(1479)과 고종 때도 크게 보수 공사했다. 정사(正史)는 아니지만 임진왜란 때는 현판을 잃었고, 몇 년 뒤 광해군 때 청파동 한 도랑에서 찾았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숭례문은 한일 양군의 첫 전장이었다. 1907년 8월 우리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조선 군인들은 무기를 탈취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숭례문 벽 위에 기관총 2문을 설치하여 조선군을 사살했다. 두 달 뒤 일본은 황태자의 서울 방문을 빌미로 철거를 시도했다가 조선 민중의 반발로 실패했다. 대신 숭례문을 잇는 성곽을 부숴 인천항 축조에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숭례문의 보호석축은 지면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우리의 전통 석축법과는 달리 안쪽으로 완만한 곡선인 일본식이다. 숭례문은 일본 색 물씬 풍기는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전쟁 때도 위층의 일부가 포화에 날아갔다.

이쯤 되면 숭례문이 560년 넘게 웅장한 모습을 지탱해온 한국인의 자존심이라는 언론의 미사여구는 엉터리다.

현판 글을 쓴 사람도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부터 태종 때 명필로 공조참판을 지낸 암헌 신색이라는 이도 있고, 중종 때 공조판서였던 죽당 유진동,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다.

그런 현판을 화마에서 건졌다고, 몸통은 잃었지만 심장은 그나마 지켜냈다고 떠들어대는 언론의 허풍 앞에선 말문이 막힌다.

숭례문은 1956년과 1962년에도 두 차례 크게 보수했다. 불국사는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복원됐다. 이 나라 국보 가운데 상당수가 박정희 독재정권 때 새로 지어졌다. 정통성이 약한 정부는 언제나 역사에 기대려 한다. 박정희 정권은 유독 ‘민족주의’란 말을 부각시켰다. ‘10월 유신’을 설명할 때면 ‘우리식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들이댔다. 이런 박 정권 밑에서 입만 열었다하면 “민족중흥의 역사를” 주워섬기던 보수주의자들이 최근엔 글로벌 시대에 무슨 민족주의 타령이냐며 세계화를 주창하고 있다.

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이미 옛 것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지 오래 됐다. 일조한 이에는 350억 원을 들여 숭례문 아래로 시멘트 길을 만든 이명박 전 서울시장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난 1999년 고건 서울시장 때는 밤마다 숭례문에다 색 조명을 비춰놓고 제17회 서울시 건축상 야간경관조명 부문 동상을 주기도 했다.

굳이 이번 불이 아니어도 숭례문은 이미 조선 민중의 손으로 만들어진 전통 건축의 묘미도, 아픈 역사의 흔적도 찾을 수 없을 흉물처럼 태평로 2가 빌딩 숲에서 섬처럼 찌그러져 있었다. 태평로 2가에 늘어선 삼성생명빌딩, 삼성본관, 태평로빌딩, 신한은행사옥은 숭례문과 함께 찍혀 외국의 관광안내 책에 단골 모델이 된 지 오래다. 검붉은 화강석 옷을 입은 삼성생명빌딩만큼은 유독 몸을 비튼 채 숭례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왕조의 정기라도 느끼고 싶었나 보다. 태평로의 옆 건물들도, 길 건너 북창동 건물들도 모두 길에 나란히 서 있겠다는데 혼자만 비틀어져 있다.
덧붙이는 말

이정호 님은 공공노조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 불씨

    이틀간 회사에 나가지 않고 빈둥빈둥 하고 있다.
    새해라서 특별히 마음을 새롭게 먹고 뭔가 잘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보다 일할수록 성실히 할수록 새로운 봄이 오는것 같지 않다.(사회적 불만이라면 불만이라 할수 있겠다! )

    놀며 일하며 봄을 맞이하겠다.허리만 졸라메다가 인생을 보내고 있지만 상처뿐이 산업용사 훈장도 소득도 보험도 그렇다고 명예도 없다.돌아오는 것은 비정규직으로 전락하는 것 뿐이다. 아직도 2만불은 피부에 와 닿지않는 먼나라의 말인것 같다.

    조금 있으면 정월 대보름이라 묵은것 낡은것을 태우고 새로운 날을 맞기 위한 "불놀이"도 있을 것이다.

    어렸을때 불꽃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눈 앞에서 타는 불꽃이 연기를 내며 불이 훨훨 타오르면 언몸을 녹이고 방안 가득히 따신 기운을 돌며 노동과 배고픈 겨우살이의 몸을 녹일수 있게 불은 불꽃의 여러 종류로 변하며 따오르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불은 이렇게 타는 과정이 아름다우면서 타고나서 재로 변하여 어디 버릴것 없다.바로 텃밭이나 거름으로 봄과 가을의 기운과 풍요로움의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숭례문을 태웠던 불도 국민다수에게는 큰 상처를 주며 국보 제일을 불태웠다.그 불을 보면서 절을 하는 국민도 보았고 너무나 아쉬운 사람들의 표정도 드러났다.

    나 역시 문화재가 손실되는 입장 숭례문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현재적 의미와 실존을 망각하더라도 사실은 많은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런데 불을 원망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사람이 문제요 권력의 문제라고 본다.

    사람은 불처럼 변하여 불보다 못한 쓰지 못할 재를 만들지만 불은 사람처럼 변하여 버릴것은 확실히 태워고 다시 쓰야할 것은 자연적 관계로 순환하는 재로 만든다.그것이 불이타는 의미로써 재이다.

    숭례문의 재는 한마디로 쓰레기이다.어디 쓸곳도 없는 재이다.이것은 그야말로 버려서 수백년이 지나서 저절로 썩어서 불이아닌 흙이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흙이 되었을때 자연적 관계의 례를 알게될 것이라고 보며 인간의 례 자연의 순리를 숭상하는 례를 알게될 것이라고 본다.

    불을 원망하지 말고 사람들의 삐뚤어진 례를 숭상하는 불을 원망했으면 좋겠다.

    불이 물을 만났을때 불이 꺼지는가 오히려 물을 만났을때 불이 더욱 잘 타더라
    ..................

    舊사람들아 新사람들아 불을 보면서 예를 각성하자!
    -이번일로 혹시라도 권력들이 민중들이 공공건물에 접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하는 정치적 활용이나 제도를 만든다면 민중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민중을 숭상해라 그것이 제일의 예이다.
    -글자고침

  • 강씨

    이번 불도 숭례문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불탄 건 이제 어쩔 도리가 없죠. 하지만 4시간의 속보 내내 타오르는 불을 보면서 저 불이 참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여러분 일본사람들이 다 타버린 숭례문 앞에서 기념사진 찍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신난다지만 자존심까지 건드려도 됩니까? 이 원숭이놈들... 나중에 우리도 복수하죠. 후지산이 폭발해서 일본이 뜨거워지면 오천만명이 사우나가서 모피코트입고 라면먹으면서 한마디 날려주는겁니다. 아 추워일본인들은 말합니다. 세계의 97%의 지도가 '일본해'라고 표기하니 포기하라고. 그러나 한국인들은 말합니다. 세계의 3% 지도가 '동해'라고 표기하니까 이제 시작이라고.이런 거 돌리는 거 20초도 안 걸립니다. 아주 잠깐만 시간을 투자하세요. 일본에게 한국 네티즌의 힘을 보여 줍시다The Japanese people say, 97% of the world map marks' Sea of Japan ' so give up. But Korean people say, 3% of the world map marks ' East Sea'so we will start fighting.It doesn't take even 20 seconds to turn this. Just sacrifice a little time. Let's show the power of the Korean netizen to Japan日本の人?は話す。世界の97% の地?はそれに印を付けて?念すると同時に' 日本海' 。しかし韓?の人?は話す。示す世界の開始' 東海' の3% の地?はこれをよく好むこと! それは回り、湧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