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체제의 자유화는 당연히 부자유스런 규제체제의 해체를 의미한다. 바로 고교평준화 해체다. 이렇게 되면 고교서열체제가 발생한다. 대학서열체제가 빚은 입시경쟁이 어떤 파국을 불러왔는지를 상기하면 고교서열체제가 부를 고교입시경쟁이 또 어떤 고통을 초래할 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지금보다 더 심한 경쟁에 시달릴 것이며 사교육비는 보다 일찍, 보다 많이 들어갈 것이다. 그 사교육비를 댈 힘이 없는 노동자는 피눈물을 흘릴 것이고,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노동자는 더욱 강력한 파업투쟁으로 사교육비를 확보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아무리 파업투쟁을 해도, 자식을 결코 일류대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증명됐다. 새롭게 형성되는 고교입시 전쟁에서도 노동자의 자식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패배가 예정된 사교육비 전쟁에 부모들은 더 일찍 뛰어들게 된다. 그 결과는 모두의 삶의 황폐화다.
단지 서열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명박 후보의 정책엔 학생선발의 자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등록금 정책의 자유화도 들어있다. 이명박 후보가 대대적으로 육성하겠다는 자사고의 등록금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일단은 천만 원 수준부터 시작하겠지만 그들끼리의 귀족화 경쟁이 개시되면 천정부지로 치솟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의 자식들은 조선시대에 동네 서당에서 명심보감, 소학이나 뗐던 상민들의 처지로 전락한다.
이명박 후보는 교육특구 내에 자율적인 영어특화 고등학교를 육성하겠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학교들은 학비가 2,000~3,000만 원 수준인 귀족기숙학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자의 자식들이 일반 고등학교 서열체제에서 아비규환으로 입시전쟁을 치르는 사이 부잣집 자식들은 부모 잘 만나서 수천만 원의 돈으로 귀족교육을 구매하게 된다.
대학에게도 자율권을 준다고 한다. 대학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쓸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틈만 나면 본고사와 고교등급제를 시행하려 하는 대학이다. 노동자의 자식이 다니는 학교들은 명문대들의 고교등급에선 아예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 고교등급은 일단은 등록금 순서로 매겨질 것이고, 그 다음 일반 고등학교 차례가 되면 고교서열체제 속에서 어차피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하위서열학교 진학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부잣집 자식들이 먹고 남은 찬밥이나 먹게 된다.
고교등급제까지 가지 않아도 본고사 등 대학의 자유로운 입시선발은 노동자의 자식들을 배제한다. 서울대가 볼 본고사나 특기적성에 자식을 통과시킬 생산직 노동자가 이 땅에 몇 명이나 있을까? 노동자의 자식이 영어경시대회에서 상을 받는가? 노동자의 자식이 조기유학을 다녀오겠는가?
수요자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준다는 것은 부자에겐 귀족학교를 가난뱅이에겐 천민학교를 선택할 자유를 준다는 말이다. 이런 식의 선택권은 고교평준화 체제에선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경쟁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학생간, 학교간 학업성취도 경쟁을 부추기고 더 나아가 교원평가 전면화까지 내걸고 있다. 교원평가는 수요자들의 선택권을 향상시키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민들이 교원평가에 찬성한다. 그러나 교원평가를 아무리 해도 노동자의 자식들이 볼 이익은 없다. 어차피 명문대는 돈 많은 사람이 가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원평가가 이 구조를 뒤집지 못한다.
교원평가는 단지 노조를 파괴할 뿐이다. 교사집단을 개인별 경쟁체제로 몰아넣어 전교조의 존립기반을 뒤흔들고 결국엔 성과급, 연봉제와 노동유연화가 교단에까지 침투하게 된다. 어차피 일류 강사들은 귀족학교가 독식할 것이고 노동자들은 공허한 평가만 하게 된다.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이 새로운가? 전혀 새롭지 않다. 우리가 그동안 당해온 교육개혁의 연장일 뿐이다. 교원평가는 참여정부가 기왕에도 추진하고 있었다. 대학자유화도 이미 실행되고 있다. 사실상의 본고사인 이른바 ‘대학별 고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고교체제의 자유화도 이미 실행중이다. 특목고, 자사고 등 일류고들이 버젓이 부잣집 자식들을 귀족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참여정부는 특목고의 폐해가 너무 심하니까 이름만 바꾼 ‘개방형 자율학교’를 추진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는 이름을 다른 말로 바꾸자고 할 뿐이다. 마이스터학교라나? 대놓고 영어다. 연 학비 2,000~3,000만 원이 드는 영어몰입교육의 학교도 이미 참여정부가 추진 중인 정책이다.
이명박 후보에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참여정부가 항상 주저주저하면서, 모호하게, 이리저리 우회하면서 조심조심 추진하던 정책들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겠다고 공언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책의 사고방식 자체는 양자가 같다. 그러므로 운동진영이 이명박 후보를 공격하면서 특목고 반대, 내신강화, 3불정책 고수, 이런 식의 전선을 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런 것들은 참여정부가 이미 내걸고 있는데 그런 구호들과 위에 설명한 자유화 개혁의 구조가 그다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증명됐다. 참여정부하에서 사교육비가 나날이 치솟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명박 후보 개인이나, 그의 교육정책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이명박 후보와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을 포괄하는 사고방식, 즉 자유화를 쳐야 한다.
고등학교 부문에서 자유화공세를 막아내도 상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노동자의 자식을 천민으로 만드는 핵심적인 자유시장은 바로 대학입시시장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후보와 참여정부의 공통점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기가 창끝을 찔러 넣을 급소다. 대학의 선발자율권을 몰수해 대학입시시장을 철폐해야 한다. 물론 수요자들도 대학선택권을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대학평준화다.
대학평준화야말로 이명박 후보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미래의 고통과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 등 3대 자유화 정권이 과거에 준 고통을 싸잡아 일망타진할 지점이다. 바로 여기가 깃발을 꽂을 곳이다. 자식들에게 고통의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면 여기에 전선을 쳐야 한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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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근 님은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 대변인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