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12일 경북 구미에서 코오롱 창사 50주년 행사가 열렸다. 수백 명의 용역 경비와 경찰 병력 20개 중대가 하루 전부터 행사장을 숲처럼 둘러쌌다. 무장 병력의 삼엄한 호위를 받는 가운데, 코오롱 자본은 방송국 기자를 불러 노사 화합의 마당을 그럴싸하게 연출했다. 2천 명 남짓 되는 사원들을 로봇처럼 세워 놓고서, ‘새로운 전환기’를 자축했다.
코오롱 자본의 벽은 너무 높았다. 우리 코오롱 정투위(정리해고 분쇄투쟁위원회)는 이 날을 ‘정리해고 8백일 투쟁을 끝장내는 날’로 삼자고, 한 달에 걸쳐 주변의 동참을 호소하고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까지 ‘함께 해주십사’ 모셔 왔지만 집회에는 고작 삼백 남짓의 노동자들만이 와 주었을 뿐이다. ‘숫자에 연연할 필요 없다’고 아무리 자위한다 한들 ‘쪽수’는 무시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석행 위원장이 투쟁을 다짐했지만 정투위 35명의 동지들을 위로해줄 수는 없었다. 우리의 투쟁이 코오롱 자본에게 별다른 압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짓밟히고 깨질수록 더 굳세어지는 것이 노동자의 깡다구라 했던가. 그 나흘 뒤 우리는 날밤을 새우는 수련회를 열고 다시 뜻을 모았다. 호주머니가 말라붙어 생계를 꾸리면서 투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코오롱 노조의 발자취
구미 코오롱 노동자들은 1988년에 처음 노동조합을 세웠다. 사측의 방해공작으로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낮은 임금과 낙후된 복지의 개선을 바라는 욕구를 꺾을 수 없었다. 노동조합이 나선 뒤로 조금씩 임금이 올랐고 97년 민주화 바람도 타서 조합원들이 민주노총 가입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때만 해도 조합원이 3천 명을 웃돌았다. 하지만 해마다 임단협 교섭에서 ‘임금 인상’에만 관심을 팔다 보니 그 대신에 조합원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막지 못했다. 보이지 않게 구조조정이 벌어졌는데도 이를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설비가 낡아가니 구조조정이 당연하다’고 회사측의 조치를 수긍하는 판이었다. 심지어 98년 5대 집행부 때는 쟁의행위 찬반 투표가 회사의 방해와 조합원의 무관심으로 사흘간 진통을 겪다 결국 무산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2000년, 조합원 수가 천 5백으로 줄어들고 나서야 우리는 노조의 위기를 깨달았다. 부랴부랴 조합원 교육에 들어가 ‘고용 안정’의 절박함을 일깨우고 임단협 요구안도 ‘임금 인상’에서 ‘신규 투자에 의한 고용 창출’로 바꾸었다. 코오롱 자본은 신규 투자보다 노후 설비를 없애고 노동자를 줄이는 식으로 이윤을 추구해 왔던 터라 난색을 표명했고 노조는 강고한 파업으로 맞섰다. 노조의 조직력을 얕보고 안이하게 대응했던 코오롱 자본이 파업 열기에 당황해 했다. 파업 17일 만에 ‘신규 투자’를 쟁취하여 조합원들은 승리감을 만끽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긴장하고 자본에 맞서야 한다’는 막중한 원칙을 잊기 시작했다. 우리 세상이 온 것으로 착각하여 현장 활동이 느슨해졌다. 회사가 부드러운 얼굴로 나오자 조합원들이 노조의 존재를 잊어갔다. “노조 집행부가 알아서 하고, 우리 조합원들은 불러내지 마라.” 동종 업체인 울산의 효성과 태광이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무참하게 깨졌는데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할 만큼 노조와 현장 조직력이 무너졌다. 코오롱 자본의 ‘회유책’을 알아채지 못하고 폭풍 전야의 고요함을 즐겼던 것이다.
2004년의 파업은 현장이 무너진 상태에서 벌인 것이라 돌이켜보면 ‘도박’ 같은 짓이었다. ‘이 파업은 회사가 부추기는 파업’이라는 소문이 파업이 시작도 되기 전에 나돌았고, 이를 증명하듯 회사는 파업 참가자들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2000년 파업때는 회사 관리자들이 조합원 집까지 일일이 찾아가 사정했는데 그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오죽했으면 ‘회사의 앞잡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조합원이 ‘파업에 계속 참여해도 좋으냐’고 여러 차례 확인 전화까지 했겠는가. 이것이 조합원이 100% 참석한 64일 파업의 실체였다.
2004년 8월, 노조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며 그 대신 64일 파업 무노동 무임금과 실질임금 20%를 삭감한다’는 후퇴된 내용의 노사 합의서에 도장을 찍으며 임단협을 마무리 하였다. 영남권에 있는 경찰이 모두 몰려와 정문과 후문을 새까맣게 뒤덮고 우리를 위협했다. 불안해진 조합원들이 뿔뿔이 갈리고 집행부는 밀어붙일 배짱도 없어서 파업 대오가 흐트러졌다. 결국 상부 단체가 중재를 서고 양보 교섭으로 끝났는데 파업의 후유증이 너무 컸다. 상집 간부들은 풀이 죽었고 조합원들이 노조 집행부를 외면했다. 투쟁 결과를 차분히 따져보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노조 조직력이 무너져 버린 상태에서 합의서는 한낱 휴지 조각에 불과했으므로 코오롱 자본은 더 큰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합의한지 불과 석 달도 지나지 않아서 회사는 ? ?ㅈ?해고’의 협박 카드까지 빼들고 구조조정을 시작했고 노조는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결국 힘에서 밀린 노동조합은 2005년 2월 1일, 이미 강제 퇴직한 450명 남짓의 ‘희망 퇴직’을 인정하고 임금을 15%나 삭감하는 굴욕적인 합의서에 서명했다. 정리해고는 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만 믿고!...
하지만 문서로 합의한 것도 묵살해버린 회사가 무슨 ‘구두’ 약속을 지킬까. 2월 21일에는 노조 간부를 지냈거나 조합 지침에 충실히 따른 조합원들을 78명 가려내서 ‘짤라’ 버렸다! 재계 순위 23위의 거대 자본이 ‘경영 악화’를 구실로 대면서.
정리해고 된 78명 중에 투쟁을 결의한 50명이 2월 23일 ‘정리해고 분쇄 투쟁위원회(정투위)’를 세우고 원직 복직과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일어섰다. 과천 본사 앞 천막 농성과 노숙투쟁 → 구미 코오롱 정문에서 시청까지 삼보 일 배 투쟁 → 지도부 18일 단식 투쟁 → 정투위 전원 삭발 및 단식 투쟁 → 코오롱 구미 공장 내에 있는 15만 4천 볼트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에서 세 명의 동지가 35일간 목숨 건 투쟁 → 과천 본사를 점거하고 사흘 동안 경찰과 맞서는 강고한 투쟁 → 성북동 이웅열 회장집 기습항의 방문으로 경찰과 대치 끝에 10명 전원이 체포되고(체포되기 전 위원장 손목 자해) 위원장과 부위원장 구속 → 청와대 앞 크레인 위에서 세 명의 동지가 사흘 간 고공 농성 끝에 경찰 특공대에 강제 진압되어 부위원장 구속....
투쟁의 성과도 있었다. 2005년 7월 코오롱 노동조합 10대 임원선거에 출마하여 정리해고자의 신분으로 현장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악조건 속에서 당당히 당선되는 기적을 만들었다. 구조조정을 저지 하겠다는 공약에 조합원들이 희망의 표를 던져 준 결과였지만 결국 2006년 4월 중노위 판정에서 지면서 조합원 자격이 상실되고 말았다.
지금은.... 생계 때문에 35명의 동지 중 23명이 생업 전선에 나가서 다달이 20만원을 투쟁기금으로 낸다. 실제 투쟁은 7명이 두 개 조로 나뉘어 일주일씩 번갈아 상경 투쟁을 벌인다. 구미 코오롱 정문과 과천 본사 앞에서 출퇴근 선전전과 1인 시위와 연대 투쟁을 곁들인다. 미약하지만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어디로 갈까?
뒤돌아 보자면.... “저들은 귀족 노동자라서 6개월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회사의 예측을 뛰어넘어 끈질긴 싸움을 벌이기는 했지만 코오롱 자본에게 후퇴를 강요해내지 못했다. 무엇을 되돌아 봐야 할까?
첫째, 자본의 논리에 말려 들어서는 안 되었다. 코오롱 자본은 툭하면 ‘경영 악화로 말미암은 위기’를 들먹였다. 흘려 듣기는 했으나 그 논리가 어느 새 우리의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구조조정 불가피론’을 대차게 받아치지 못하고 수긍하게 되니 노조가 무기력해졌다. 희망 퇴직을 강요하는 회사의 압박에 조합원들이 움츠러들고, 저마다 ‘제 살 궁리’에 빠져들었다. 서로 단결하기는커녕 ‘옆의 동료가 사표를 써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착각에 빠져 동료가 떠나가는 것을 멀거니 구경만 했다. 아니, 근무 연수가 오래 된 선배 노동자에게 “후배를 위해 그만 나가지 않겠냐.”고 옆구리를 찌르거나 여성 노동자에게 “남편만 다니면 되는데 왜 버티느냐?”고 면박을 주는 일마저 서슴지 않았다.
다음에 소개하는 사업장은 반드시 구조조정을 당하기 마련이니 경각심을 품어야 한다. “조합원들이 불평불만을 품지 않도록 회사가 알아서 다 해준다. 조합원들은 점점 노조를 잊어버리고 노조의 지침을 귀찮아한다. 간부들은 조합원 핑계를 대면서 현장 활동을 게을리 한다. 조합원들이 간부(특히 대의원) 되기를 꺼려서 공석이 많아진다. 결국 조합원은 없고 간부만 남은 반쪽짜리 조합으로 추락하고 간부들은 제 앞가림에만 몰두한다.”
둘째, 노동자의 단결을 깊이 숙고했어야 한다. 조합원이 천 명이 넘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에게 비정규직의 문제와 연대(공동) 투쟁은 ‘남의 이야기’요, 잘못했다가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구미에서 한국합섬과 금강화섬과 코오롱이 함께 대열을 이룬다면 작은 노조들 때문에 우리 코오롱이 손해볼지 모른다는 집단 이기주의적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공동투쟁을 변변히 해내지 못했다. 회사는 노조들의 공조를 깨려고 갖은 유언비어를 다 퍼뜨리는데 우리 노조만으로 자본과 넉넉히 맞설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셋째, 노조도 바뀌어야 한다. 코오롱노조는 해마다 임단협 철에는 단결력을 높이려고 조합원들에게 빨간 투쟁 조끼를 입혔다. 그런데 시민들은 그 조끼만 보면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줄 안다. 실제로 파업은 2000년, 2004년 두 번 뿐이었는데도 해마다 파업을 한 것으로 오해한 시민들이 코오롱의 부당한 구조조정을 응원했다. “매년 파업을 하는데 어떻게 회사가 살아남겠느냐”는 정서였다. 굳어버린 생각도 풀어야 하고 공장 담벼락을 넘어 시민들과 소통할 여러 사업도 벌여야 노조가 살아남는다.
넷째, ‘연대’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 코오롱 노동자들은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치듯이 뒤늦게서야 ‘연대’에 나섰다. 어려운 형편에서 힘들게 싸움을 이어가는 비정규직 영세사업장에 들렀을 때에는 부끄러워서 고개를 수그리기도 했다. 노조 만들었다고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것도 억울한데 조합비가 없어 상경할 때마다 7명이 개인 주머니를 털어야 했던 강원도의 우진 지회 동지들, 용역 깡패들에게 온갖 치욕과 수모까지 겪으며 처절하게 싸운 기륭전자의 여성 동지들, 천막도 없어 차가운 맨 땅바닥에 몸을 맡기고 노숙 투쟁을 벌인 노동해방 철거민연대 동지들, 노조 말살과 직장폐쇄에도 무릎 꿇지 않은 대구의 정안농산 동지들....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고 위로해 주었다!
연대투쟁을 다니며 동료 정규직들에게 “귀족 노동자라고 주변의 노동자들을 외면하지 말라. 우리처럼 당한 뒤에 뉘우치지 말라”고 호소하고 비정규직 동지들에게는 배부른 귀족 노동자의 과거를 뼈저리게 뉘우친다고 울부짖었다. 이렇게 발품을 판 덕분에 투쟁사업장끼리는 업종과 연맹을 뛰어넘는 연대투쟁의 고리도 만들어냈지만, 투쟁이 없는 특히 대공장 정규직의 사업장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조합원 교육시간에 강사로 나서게 해달라’고 능동적으로 나섰어야 하는데 그저 노조 사무실에 들러 간부 몇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예전의 코오롱처럼 조합 간부들이 현장을 조직하지 못하고 조합원 핑계만 대면서 나태해져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또 다른 코오롱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무겁고 안타까웠다. 왜 우리는 주변의! 숱한 패배에서 교훈을 받아 안지 못할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왜 눈 앞의 일에만 고개를 파묻고 살까?
최근의 장기 투쟁은 기본이 1년이 되었다. 우리는 ‘질긴 자가 승리한다’고 수없이 구호를 외쳤건만 요즘은 오히려 자본이 더 독하게 노동자를 괴롭히고 있다. 예전에는 지도부가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고 나서기만 하면 얼마쯤 문제가 풀렸는데 요즘은 웬만큼 덤벼들어서는 자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목숨까지 바치는 처절한 투쟁에도 언론 보도만 잠깐 나올 뿐 쉽게 묻혀 버린다.
하이닉스 매그나칩 사내 하청지회 동지들의 투쟁 결과를 전해 들을 때 우리는 아, 가슴이 내려앉는다. 결국 주저앉는 사람들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웃 대공장 정규직들은 장기투쟁 사업장을 ‘소 닭 보듯’ 바라본다.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이웃 노조를 찾아갔을 때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귀찮게 또 왔어?’ 하는 것으로 느껴져서 한없이 비참해진 일도 있었다. 보험을 해약하고 아이들 학원도 끊고 은행 빚을 얻어서까지 버티고 있지만, 귀가하여 가족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렵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만 둬야지’ 하는 유혹이 찾아온다. 세월이 얼마쯤 흐르고 나면 장기투쟁 사업장은 외톨이가 된다. 동료들도 ‘그만 정리하는 게 어때?’ 하는 눈길을 보내오고 가족과 친지의 압박이 심해진다.
그러므로 하이닉스의 패배는 누구를 탓하기 전에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외톨이 사업장 하나의 싸움을 내버려두면 결국 패배하기 때문이다. 장기투쟁 사업장이 어찌해야 버틸까?
정투위 동지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다달이 80만에서 백만 원만 꼬박꼬박 들어와도 절대로 투쟁을 포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입에 풀칠하고 그래서 목숨을 잇게만 해다오. 그러면 싸운다! 문제는 돈이요, 생계다. 한때 벌이는 재정 사업이나 투쟁기금 지원으로는 뻔하다. 조합원 전체가 다달이 일정 금액(2,000원)의 투쟁기금을 투쟁이 끝날 때까지 낸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지금 구미 지역에서 이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재정도 든든해질 뿐아니라 끈끈한 연대의 정도 싹터서 투쟁의 활력도 일으킨다. 이 소식을 듣는 자본도 마음의 압박을 느끼지 않겠는가.
우리 정투위 동지들은 기나긴 싸움을 결의하면서 ‘학습’도 시작했다. 틈틈이 좋은 강연을 찾아가 듣고 온라인에도 들른다. 자세히 따져서 말하라고 하면 좀 버겁지만 ‘신자유주의를 끝장낼 길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우리가 투쟁가 노래로 끊임없이 다짐했던 ‘노동해방 세상’을 더디더라도 우리 손으로 일굴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도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같은 자본의 천국도 언젠가는 분명히 바뀔 수 밖에 없다. 들불처럼 일었던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또다시 조직해 낸다면 우리는 이 땅의 당당한 주인이 될 것이다.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오는 증거라고 했던가? 자본의 천국이 정점에 달했다. 이제는 노동자의 세상이 다가올 차례다. 희망을 잃지 말고 노동자 하나 되는 통 큰 투쟁을 만들어 가자. 배부른 정규? 汰?철거민 동지들과 투쟁을 함께하고 있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총 단결하는 것이 결코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덧붙이는 말 : 이 글을 다 쓰고 난 뒤에, 하이닉스 노동자 20명이 다시 일어설 것을 결의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투쟁! (2007. 6. 2).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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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배 님은 코오롱노조 10대 위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