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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사랑의 마지막 지점을 묻다

[김규종의 살아가는이야기] 사랑도 사람의 일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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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영화 가운데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처럼 사회 드라마적인 요소를 짙게 풍기는 영화는 찾기 어렵다.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사랑영화에서 종당에 보여주려는 것은 비극적이거나 처절한 사랑의 방식이다.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가와 질시를 뚫고 진행되는 애처롭고 비장한 사랑의 양상을 가지고 인간존재의 중요한 문제 하나를 제기하는 것이다.

왕가위는 그런 사랑영화의 공식을 담담하게 깨뜨린다. 그가 창조하는 사랑영화의 인물은 자기가 맞닥뜨리는 시간과 공간에 능동적으로 반응한다. <동사서독> 같은 영화는 예외인데, 그것은 영화의 주제와 본질이 사랑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사랑영화는 개인과 사회, 사랑과 인생을 촘촘한 시공간 속에서 능숙하게 잡아낸다.

존 커란 감독은 독립영화와 음악비디오를 전문적으로 찍었으며, 2004년에 상업영화 <우리는 더 이상 여기 살지 않는다>로 입지를 세웠다고 한다. 그의 신작 <페인티드 베일>은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서머셋 모옴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소설 번역본 제목은 <인생의 베일>인데, 이 제목이 작품을 이해하기에는 더 적절해 보인다.)

키티, 타성에 젖은 사랑과 삶의 방식을 던지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그렇게 자상하거나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찬찬히, 가능하면 오래 반추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왜 저런 장면과 상황이 영화 속에서 만들어지는가, 그런 의문을 품고 영화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부부가 되었지만, 아직은 어색하고 낯선 남녀가 침대에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다. 정사를 앞에 두고 전등을 끌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태도가 엇갈린 것이다. 모옴은 단편소설 <빨강머리 Red>에서 적극적인 여성상을 제시한 적이 있다. 신작영화에서도 여주인공 키티는 불을 켜두라고 한다. 거리낄 것이 무엇인가,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자의식과 독립심이 강한 키티는 단조로운 일상생활을 견디는 힘이 약하다. 지적인 호기심이나,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어떤 자세도 없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 등장하는 철학과 출신 여주인공 샬롯의 바닥 모를 수동성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인물에게 출구는 사랑의 완전한 포기이거나, 과감한 일탈이거나, 둘 중 하나다. 제3의 가능성은 없다.

모옴은 출구 하나를 여벌로 마련해둔다. 그것은 세상과 만나는 일이다. 다소 지루해 보이는 영화 <페인티드 베일>이 마지막 장면까지 내적인 긴장과 동력을 유지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사랑과 삶의 양상에 대한 주인공의 관점과 기준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그녀는 타성과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눈길로 자신과 남편과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키티는 생애 처음으로 커다란 희열을 경험한다. 세상과 능동적으로 소통하고 자기를 헌신함으로써 그녀는 기쁨과 풍요로 넘치는 사회화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만으로 세상과 남편을 재단했던 그녀가 홀연히 대면하는 너르고 복잡한 바깥세상의 의미는 얼마나 복잡다단한 것인가.

삶의 의미를 오래도록 묻는 월터

세균 학자이자 의사인 월터는 사교모임에서 키티를 보고 순식간에 청혼하기에 이른다. 차분하고 지적이며 풍부한 교양으로 무장된 인텔리 월터. 그는 활달하고 적극적이며 역동적인 키티에게서 자신에게 필요한 면모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쉽고 허무하게 남의 남자와 사통하는 키티를 보고 절망한 월터는 그녀를 인간 이하로 대한다.

교육 받은 성숙한 영국남자의 기품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자세는 놀랄 만한 것이다. 인간적인 감정보다 신사의 덕목을 앞세우는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과 절제로 아내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키티를 데리고 콜레라가 창궐하는 중국의 오지 메이탄푸로 떠나가는 월터. 거기서 그가 구하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점은 끝내 수수께끼로 남는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제목이 풍기는 것처럼 암시와 은유의 허방다리가 곳곳에서 관객의 발목을 잡는다. 허름하다 못해 누추한 작업실에서 월터는 도대체 늦은 밤까지 무엇을 쓰고 있었을까. 세균 실험결과인가. 키티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인생의 비의를 깨닫기 위한 각고의 기록인가. 존 커란 감독도 키티도 월터도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은 월터의 변화를 조금씩 포착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에 상해가 아니라, 야만적으로 비칠 만큼 후미진 메이탄푸에서 벌이는 사랑의 장면에서 그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성과 지성과 기품이 아니라, 감성과 야성과 본능에서 비롯하는 육체의 향연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불을 켜둔 채로. 키티를 징벌하면서 스스로를 벌한 인간 월터.

수녀원에 딸린 병원에서 일을 보다가 키티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장면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아내를 바라보는 월터. 원장수녀의 부탁으로 차분하게 풍금을 연주하는 여인이자 아내 키티를 바라보는 월터의 표정과 눈길은 참으로 따사롭다. 더디지만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서는 두 사람의 내면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들에게 다가오는 1920년대 중국사회와 풍광

서머셋 모옴은 왜 영국남녀를 거칠고 황량하며 야만상태에 있던 메이탄푸를 결정적인 사건장소로 선택한 것일까. 런던과 상해를 거쳐 메이탄푸를 경유하여 다시 런던으로 회귀하는 장소변경의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 <페인티드 베일>의 매력이자 생각거리다.

1920년대 중반, 열강의 각축장 중국. 여러 나라에서 조차하여 조각난 도시가 되어버린 상해. 상해에서 영화의 주인공들은 런던보다 못하지만 상당한 자유를 향수한다. 그러나 외국인, 특히 영국인을 적대시하는 농촌 메이탄푸는 그들에게 내면세계를 응시하도록 인도한다. 여기서 무엇이 어떻게 가능하고, 왜 여기인지를 그들은 생각해야 한다.

재미난 점은 수녀원을 바라보는 모옴의 시선이다. 가난하고 헐벗은 중국 아이들을 돌보며 헌신하는 수녀들을 해석하는 월터의 비판적인 관점이 흥미롭다는 것이다. 일찍부터 아이들을 천주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이들을 돈으로 사온다는 월터의 이야기는 얼마나 놀라운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통렬한 반박 아니겠는가.

군벌의 폭력적인 탐욕과 무지몽매한 민중 살아가는 모습이 수려한 풍광의 메이탄푸와 너무도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저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인간의 욕망과 무지의 마지막 지점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은 끔찍할 지경이다. 그런 대조와 엇갈림의 한가운데서 주인공들은 삶과 사랑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해가는 것이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에서 보여주는 풍광 가운데 수차로 물을 끌어오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다. 대나무로 물길을 만들어 깨끗한 물을 중국인들에게 제공하려는 월터의 노력이 성공하는 장면 말이다. 맑은 강에서 수차가 돌아가는 장면을 바라보는 키티의 해맑은 얼굴표정은 그녀가 앞으로 월터와 함께 할 교감의 시간을 무언중에 약속하는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소설이나 희곡을 영화로 각색하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 같은 문학영화는 참으로 허망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원작을 읽지 않는 것이 영화감독과 소설가 모두에게 적절한 예의표시일지도 모르겠다.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소설을 빼어난 영화로 만들 수 있겠는가!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로맨스’라는 장르규정이 붙어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로맨스에 국한되어 있는가. 사회 드라마적인 성격을 가진 멜로드라마 아니던가. 덧붙여 영화의 인물들은 지속적인 진화와 성장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들은 고집스레 간직했던 지난날의 습관이나 자세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시선과 자세로 다가오는 삶과 운명을 맞이한다.

그래서다. 격정적이지도 않고, 오래도록 뇌리를 후려치는 기막힌 대사도 없는 영화에 내가 스스럼없이 동의하기로 한 까닭은. 사랑과 사람과 관계를 바라보는 영화감독의 시선은 수묵화처럼 담담하고 유장하다. 사랑의 어느 한 단면을 딱 부러지게 잘라서 온갖 양념으로 버무려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을 느릿하고 헐겁게 영사기에 담아내는 것이다.

우리의 시인 만해 한용운도 이별의 슬픔을 절절하게 노래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만해의 슬픔을 딛고, 사랑과 이별의 서정을 서사형식으로 담아낸 사랑영화로 오래 기억될 듯하다.

덧붙이는 글

‘베일’은 무엇인가를 가리고 은폐하기 위해 쓰이는 천이나 장막을 일컫는다. 거기에는 그것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보는 베일의 주인과 대상 사이의 거리가 이미 설정되어 있다. 양자 사이를 차단하는 구체적이며 물적인 존재로서 베일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영화와 소설에서 만나는 베일은 단순한 베일이 아니라, 페인트가 칠해진 베일이다. 베일의 재질과 페인트의 성질은 양립 가능하지 않다. 얇고 성기며, 부드럽고 하늘거리는 질감의 베일과 둔탁하고 질퍽하며, 끈적이며 검질긴 페인트라니!

서머셋 모옴은 이런 형용모순적인 표현을 거리낌 없이 소설 제목으로 가져다 썼다. 영국인다운 고집스러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여기까지 오다보니 원작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이 일을 어쩔 것인가!
덧붙이는 말

김규종 님은 경북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