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다시 노동법 개악 재수정안 논의가 불거지고

[철폐연대 연속기고](2) - 노동법개악 저지 투쟁의 경과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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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역사란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집필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 질 수밖에 없는데, 기록된 권력자의 정사(正史)만이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의 투쟁의 역사도 언제부터인가 협상위주의 사실을 적어놓은, 권력자들만의 기록들이 진실인양 받아들여지는 것을 목도하며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낀다. 노동자들의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가 기록되지 못하는 까닭일까. 이러한 기우(杞憂)로 이 글을 시작한다. 근 3년간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해 투쟁했던 우리의 기억들이 왜곡된 시선으로 기록되어 우리의 기억을 다시 구성하지 않아야 하기에 말이다.


2. 투쟁의 경과

노동법 개악을 둘러싼 투쟁의 경과에서 중요한 시점은 크게 다음과 같다. 04년 12월 총파업 철회 상황, 05년 4월 인권위안의 발표, 05년 12월 민주노동당의 수정안 발의, 06년 5월 이후의 법안 재수정 논의, 이렇게 4번의 국면이다. 이 국면마다 입장과 투쟁 전술이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계급적 역관계와 상황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며 우리의 기억을 다시 조망해 볼 필요가 있겠다.

(1) 비정규 주체들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시작된 개악저지 투쟁 (04년 7월부터 05년 3월까지)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점은 앞서 얘기한 정부의 유연화 공세의 완성으로 제기된 비정규 관련 노동법이 제도화하였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 의도가 바로 비정규노동자 주체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폭로되며 투쟁의 대립이 만들어 졌다는데 있다.

2004년 9월 발표된 정부안은 2000년부터 진행된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한 논의 속에서 가장 후퇴한 입장을 담았을 뿐 아니라, 비정규직을 정상적 고용형태로 간주하여 이에 맞춰 법제도를 정비하겠다는 구상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기간제와 파견제를 무제한적으로 허용하여 비정규직의 양산뿐 아니라 정규직 일자리의 비정규직 고용으로의 대체를 정당화시키는 것이었다. 파견법을 제정할 때도 그랬지만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관련한 법안이 필요하다는 끊임없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한 가운데 만들어 낸 결정체였다. 그래서 이 법안의 의미는 법안 자체가 아니라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이고, 신자유주의 유연화의 완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열린우리당 점거 농성은 선도투로 운동진영에 개악저지 투쟁에 나서게 한 공헌도 컸지만, 비정규직 당사자가 스스로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이 그야말로 개악안이요 허구임을 드러내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한다.

○ 정부의 개악안 발표와 열린우리당 점거 농성 (04년 7월부터 04년 9월까지)

▫ 7개 단체와 민주노동당과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 마련

2004년 7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함께 마련한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이 마련되었고, 그해 8월 입법안은 단병호 의원 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 입법안의 기초는 2000년에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마련한 입법청원안으로 2000년 청원안을 바탕으로 하면서 지난 6년간의 비정규직 투쟁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추가한 것이다. 매일노동뉴스의 오보처럼 그 당시 한 달 만에 뚝딱 만들어진 법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근로기준법 개정안, 노동조합법 개정안, 직업안정법 개정안과 함께 근로자파견법 폐지안이 제출되어 기간제 노동자, 간접고용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의 권리보장을 위한 노동운동진영의 권리보장 입법안이 마련된 것이다. 노동운동진영의 권리입법안의 핵심은 비정규직의 사용사유를 제한하고 간접고용을 금지함으로써 상시고용·직접고용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상시적으로 사용된 기간제 노동자를 정규직화하고, 불법적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한 직접고용 책임을 사용사업주에게 명확히 지우는 것이었다. 또한 노동법상 '근로자' 및 '사용자'의 개념을 현실에 맞게 확장하여 노동기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 정부의 개악안 발표와 열린우리당 점거

그러나 2004년 9월, 마침내 노동부가 비정규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비정규 노동자를 양산하는 노동법 개악안을 입법 예고했다. 2004년 발표된 정부안은 이제까지 논의과정에서 가장 후퇴한 입장이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분출해온 비정규직 조직화·투쟁의 성과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9월 16일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점거농성이 있었다. 이 점거 농성으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정부가 비정규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안이라며 당당하게 호언하던 비정규노동법이 실제 비정규노동자들에 의해 거짓말이라는 사실로 드러났다. 또한 정부의 개악안에 맞서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노동운동 진영의 여타 단위들이 정부의 안이 개악안임을 명확히 선을 긋게 하는 동시에,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던 제 운동진영에게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투쟁에 나서야 함을 일깨웠다.

이런 사실은 대의원대회에서의 총파업 결의안 통과와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한 공대위 구성에서 드러났고,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열린 21일에는 전북, 천안, 대구, 부산, 광주, 전남, 경기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우리당 점거 농성 혹은 열린우리당 앞 1인 시위나 집회에 들어가면서 제 운동 진영이 이 문제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내었다.

▫ 9월 2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총파업 결의안 통과

실제 비정규노조 대표자들의 열린우리당 점거라는 선도투는 의미가 있었고, 선도투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발휘했다. 그 결과로 9월 2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총파업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실제 이 당시 민주노총은 그다지 많은 고민이 없었다. 당시 민주노총 3차 대의원대회에서는 하반기 투쟁방침으로 “11월 24일 전조합원 오후 4시간 파업”을 예고해왔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농성, 열린우리당 앞에서 매일의 집회, 대의원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견법 개악 저지 및 비정규권리입법 쟁취를 위한 총파업’ 촉구 선전전 진행, 대의원인 비정규노조 대표자의 강력한 호소는 하반기 투쟁지침을 바꾸었다. 그 결과 대의원대회에서는 민주노총 총력투쟁의 날을 ‘강력한’ 총파업 돌입으로 수정하고 총파업 돌입 시점은 ‘비정규개악안 해당 상임위(환노위) 상정시’로 하여 만장일치 박수로 통과되었다. 물론 대의원대회 총파업 결의안은 ‘정부 개악안 강행통과시 총파업’ 이라는 한계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열린우리당 농성을 계기로 노동계가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투쟁의 지침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이러한 결의를 이끌어 내고, 농성은 그 다음날인 9월 22일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과의 면담에서 형식적인 반응이기는 하지만 정부입법안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노동계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확답을 받고 해산했다.

▫ 9월 22일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 발족

9월 22일 참여연대 느티나무 까페에서 101개 사회단체가 함께하는 '비정규직 노동법 개악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공대위(이하‘비정규직 개악저지 공대위’)'가 발족하여 노동법개악에 맞선 광범위한 전선을 형성했다. 이는 열린우리당 농성이 시작되자 비정규노조들의 뜻을 받아 노동법 개악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내고 이들의 투쟁에 지원, 연대하지는 취지로 시작된 14일의 노동사회단체 비상연석회의와 20일의 '비정규노동법 개악 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구성을 위한 간담회 등 공동 전선을 확보하고 확대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렇지만 노동계 내부에서도 입장의 차이들이 존재했는데, 노동계 내부의 견해 차이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중요한 관점 차이를 내포한 것이었으나 민주노총 주도로 그때그때마다 봉합되었고, 2004년 정부안이 발표되면서부터는 '노동법 개악안 저지'의 공동전선 속에 수면 아래로 잠복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꾸려진 ‘비정규직 개악저지 공대위’는 애초부터 그러한 불안함을 갖고 출범했고 이후에도 드러나게 되지만, 당시로는 노동운동 진영이 공동의 전선을 가진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지녔다.

○ 국회 타워크레인 농성과 총파업 철회 (04년 11월부터 12월까지)

▫ 국회 타워크레인 농성

11월 24일에 비정규노조 간부파업이 있었다. 이 날은 대표자들의 삭발도 있었고 투쟁의 결의도 다지는 날이었다. 간부파업이기는 했지만 당장 해고로 이어지는 현실 때문에 일하는 동안에는 파업조차 힘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날이었고, 주체들이 꿋꿋하게 투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틀 후 11월 26일에 11월 총파업을 앞두고 4인의 비정규 노동자들의 국회 타워크레인 고공 농성이 있었고, ‘비정규 노동법 개악 저지’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걸고 투쟁을 만들어 나갔다. 이는 정부가 내놓은 비정규 개악안은 반대하고, 7월에 제기했던 권리보장 입법안을 반드시 쟁취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두 가지는 비정규직 주체들이 투쟁의 전선을 유지하고, 주체들의 지치지 않는 투쟁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 총파업 철회

그러나 2004년 11월 26일 총파업은 그다지 힘이 없었다. 4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회 안 타워크레인을 점거했어도 무관심했다. 이러한 현실은 2004년 11월이 되면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거쳐 결의된 총파업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2004년 총파업의 철회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96, 97년 총파업을 떠올렸다. 기간제와 파견제 법안을 다룬다는데 정리해고제와 파견제를 날치기 통과시켰던 96, 97년처럼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바람으로 총파업은 더욱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달랐다. 96, 97년 총파업은 노동유연화와 제도화에 맞섰지만, 04년 총파업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2004년 11월 2일, 총파업이 철회되었다. 노동법 개악저지와 권리보장 입법 쟁취라는 기조로 총파업을 조직했지만 결국 당시 이수호 위원장의 “이제 권리보장 입법 쟁취를 향해 나아갑시다!” 라는 마지막 선언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총파업이 꺾인 것에 모두 힘이 빠졌지만, 그래도 이 마지막 말을 듣고 비정규직노조 대표자들은 드디어 우리가 그렇게 주장하던 바가 선언되었다는 데에 희망을 품었고, 그렇게 2004년 총파업은 끝났다.

그런데 이 선언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처음부터 비정규노동자들이 단병호의원의 이름으로 발의한 ‘권리보장입법안’을 원칙으로 내세웠던 그 의미를 모두 다르게 해석하며 갈등과 논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잠복해 있던 각자의 동상이몽은 이때부터 시작한다. 비정규노동자들은 이 의미를 수세적 요구가 아닌 공세적 요구이자 투쟁을 통한 노동기본권을 쟁취할 원칙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떤 이는 투쟁이 아니라 노사정교섭을 하자는 의미로 생각했고, 어떤 이는 국회 안에서 조금이라도 얻어서 입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묘하게 ‘정부의 개악안’ 과 단병호의원이 발의한 ‘권리보장입법안’이 분리되지 않은 채 권리보장을 하자는 말이 과연 누구의 안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지 쟁점이 섞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당시는 사회적 합의주의 관련한 논란이 한 축으로 등장하고 있었기에 이런 쟁점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이후에 상당한 문제로 발전한다.

그리고 12월 9일 정기국회 일정은 끝났다. 그러나 투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고, 비정규 관련 노동법 개악의 공격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결국 다음 해로 넘어가 2월, 4월 등등의 임시국회 일정 속에서 긴장과 대치의 상황은 계속 되고 만다.

○ 계속되는 투쟁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05년 1월부터 3월까지)

▫ 2월 투쟁을 예비하는 시기 (05년 1월)

2월 임시국회 일정을 앞두고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에 대해 1월부터 각 단위에서의 논의가 있었다. 전비연(준)은 1월 18일 수련회와 대표자회의를 통해 2월 16일에 ‘권리입법쟁취 하루 총파업’을 결의했고, 민주노총은 1월 20일 대의원대회 안건으로 2월 총파업을 다뤘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20일 속리산에서 있었던 33차 대의원대회에서 제출된 안은 총파업이 아닌 ‘2월 총력투쟁’이었다. 이 안이 상정되자마자 빗발치게 공세적인 발언들이 쏟아졌다. 지난 12월 법안이 유예된 것을 가지고 총파업을 철회하고 권리보장 쟁취를 하겠다는 민주노총이 총파업이라는 강력한 투쟁이 아니라 총력투쟁으로 수위를 낮춘 것은 무슨 의미냐, 공세적 교섭요청이라는 말과 함께 총력투쟁이 제출된 것은 결국 교섭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냐며 반발이 쏟아졌다. 결국 논쟁 끝에 ‘2월 총력투쟁’은 ‘2월 총파업’으로 바뀌고 만다. 그러나 여전히 ‘강행 처리 시’ 총파업이라는 단서는 빠지지 않은 채 였다.

▫ 2월 임시국회로 인한 긴장의 연속 (05년 2월)

16일 오후 3시 전국비정규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 소속 비정규노조는 일제히 간부파업에 돌입하였다. 전비연(준)은 이 날 집회 이후 17일부터 매일 국회 앞에서 촛불 집회를 진행했다. 민주노총 역시 2월 20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 "비정규 권리보장입법 쟁취 및 불법파견 분쇄 결의대회"를 열었다.

2월 임시국회에서는 18일에 환노위 법안심사소위를 열어 상정된 법안을 논의하고 23일에는 환노위 전체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23일 국회에서 법안 강행처리 입장 발표로 긴장의 연속이 된다. 초비상이 걸려 23, 24일 양 일간 국회 앞에서의 연이은 집중 투쟁도 있었지만, 당시 눈여겨 볼 것은 23일 있었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태도였다. 한국노총은 “오늘 오전 열린우리당이 강행처리 입장을 제출하고 법안 처리를 시도하고 있는데 2월 임시국회에서 강행처리 할 경우 한국노총은 노사정위를 탈퇴한다”고 잘라 말했다. 민주노총은 11시 기자회견에서 이수봉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마친 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정부가 비정규법안을 강행처리할 경우 사회적 교섭은 폐기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고, 4시 환노위 위원장실 입구에서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23일 법안심사소위 강행시 24일 08시 부로 민주노총은 전면 총파업에 즉각 돌입할 것을 결정했다” 고 투본회의 결과를 설명하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처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강경한 발언을 보인데 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비정규 개악안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투쟁이 여전히 존재했고, 투쟁 주체들의 투쟁의 의지도 꺾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이 비정규법안 저지를 위해서 교섭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이미 사회적 교섭과 비정규개악안이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폭력사태라 언론에 집중 공격된 2월 1일 영등포 구민회관에서의 대의원대회 등 교섭이 아니라 투쟁으로 돌파하자며 민주노총의 교섭 방침에 대한 내부의 투쟁이 존재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2월 임시국회에서도 사회적 교섭과 노동법 개악과 관련된 문제는 관련이 있었는데, 대의원대회 사태로 보인 이 당시의 중요 쟁점은 극좌 맹동주의 폭력성에 있지도 단순하게 사회적 합의에 대해 찬성이냐 반대냐에 있지도 않았다. 과연 비정규 노동자의 삶의 문제를 가져올 비정규 노동법 개악 안에 대해 어떻게 고민할 것인가에 있다. 이러한 직후 일어난 임시국회이기 때문에 민주노총에서도 강경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편, 이 당시 일각에서 2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다음과 같은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 그 우려는 22일 대의원 대회를 앞두고 사회적 교섭의 재개 안의 통과와 23일 국회에서 비정규 개악안의 통과라는 시나리오였다. 그렇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이든 노사정대표자교섭이든 교섭기구에 참가하기로 한 약속을 져 버리고 열린 우리당이 법안을 강행한 것은 모종의 약속을 깨버린 것이어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23일 환노위 강행처리라는 상황에서 분노의 표출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하듯 "여당으로서는 민주노총이 22일 교섭기구 참여를 결정했는데도, 이를 무시한 채 23일 법안을 처리하는 것은 너무 야속한 것 아닌가 하는 점에서 고려하는 것”이라는 이목희 발언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대의원대회는 3월로 연기되고 23일과 24일 양 이틀을 걸쳐 긴장으로 몰아넣던 강행처리 방침도 결국 4월 논의로 넘어간다.

(2) 국가인권위 의견 발표와 비정규 노동법 수정안의 등장 (05년 4월부터 05년 9월까지)

○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의 문제점 (05년 4월)

▫ 4월 12일 국가인권위 노동법 개악에 대한 의견 표명

2월 임시국회 일정도 끝나고 다시 법안의 문제가 불거진 것은 05년 4월부터였다. 4월 12일에 국가인권위에서 비정규직 법안 관련 의견을 내놓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정부의 비정규개악안에 대해 △기간제 남용방지를 위해 사용사유를 제한할 것△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명기할 것 △파견근로 허용대상 업종을 제한하고 있는 현행 포지티브 방식을 유지할 것 등과 함께 국회에 계류 중인 비정규 개악안이 “노동인권보호와 비정규직차별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부의 개악안에 대한 문제점을 의견으로 내놓으면서 정부의 입지는 좁아졌었지만, 정부의 강경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이목희 의원이나 김대환 노동부장관 등은 인권위의 의견이 월권이라며 “이 문제는 정책의 문제이지 인권의 문제는 아니” 라고 주장했고, 재계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민교협과 학단협 등 11개 단체에서도 김대환 노동부 장관의 제명까지 거론하며 망언과 무지함에 질타를 가했다.

▫ 이에 대한 각 단위 반응

인권위 의견이 나오자 민주노동당은 “인권위 의견 표명을 환영한다”며 “미흡하지만 인권위 의견 수준 정도로 입법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정부 입법에 대한 수정안을 내놓으며 인권위 의견에 환영을 비추었다. 민주노총은 4월 21일 중집에서 ‘개악안 저지’에서 ‘인권위안 존중, 권리보장 입법 쟁취’ 로 교섭방침을 전환하고 ‘4월 국회 인권위 입법’ 의 현실화를 최대목표로 전향적인 안을 끌어내 이후 입법과정에서 가이드라인이 상향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논의했다. 한국노총도 “인권위안으로 4월 처리한다”는 기조에 동의한다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단식과 함께 공조의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전국비정규대표자연대회의(준)은 성명을 통해 “국가인권위원회 의견서는 비정규권리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선일 뿐이며 비정규노조들과 노동계의 요구에 비하면 파견법 철폐 및 특수고용 노동3권 보장이 누락되어 있는 내용”이라 비판했고, 철폐연대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다.

인권위 의견이 전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권위 의견 자체도 문제는 있었다. 인권위 의견에서는 명백히 파견법 폐지가 아니라 파견법 허용의 메시지가 있었다. 그러나 더 문제는 인권위 의견을 빌미로 본격적으로 수정안이 등장했다는데 있다. 수정안의 등장이라는 말은 정부의 개악안을 인정한다는 연장선상에 있다. 다시 말해 비정규노동자의 삶을 권리보장입법안이 아니라 정부의 노동법 개악안을 바탕으로 구성한다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 노사정대표자교섭과 민주노총의 수정안 (05년 4월부터 5월까지)

▫ 민주노총의 수정안 등장

이때 여기서 다시 살펴볼 것은 ‘노사정대표자교섭’이다. 인권위가 의견을 내기 전인 4월 5일 8개월 만에 ‘노사정대표자교섭’이 재개된다. ‘노사정대표자교섭’의 주요 문제는 노사관계로드맵이고 비정규 노동법 개악안에 대해서는 별도의 틀로 논의하겠다고는 했지만, 이미 2월 환노위 처리 공방 당시와 3월 대의원대회 무산이후 위원장 직권으로 추진된 ‘노사정대표자교섭’ 은 비정규직 법안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었다. 즉, ‘노사정대표자교섭’은 비정규노동법 개악안과 분리되었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4월에 열린 '노사정대표자교섭'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수정안을 제출하면서부터 노동계의 동요는 본격화되었다. 기간제 고용에서 사유제한원칙을 포기하고, 파견법 철폐가 아닌 현행 파견법 유지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노동계 단일안’이 교섭석상에서 제안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4월 30일 전비연(준)은 민주노총 비정규실장과의 간담회를 통해 분명한 문제제기를 하였고, 5월 2일 노사정대표자교섭이 열리는 과정에서 비공식으로 긴급 제안된 민주노총 투본 대표자회의에서 전비연 등 비정규노조의 문제제기 역시 있었다. 그러나 5월 2일 노사정대표자교섭 과정에서 노동계가 제출한 ‘최종안’은 04년 7월 제기한 권리보장 입법안과는 다소 다른 후퇴한 입장이었다. 그 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간제와 관련하여 교섭석상에서 노동계 최종안으로 제출하였다는 이른바 ‘1년+1년’안은 사실상 2년까지 기간제고용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안으로서, 기간제를 사용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의 제한’ 이라는 권리입법요구안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파견제와 관련하여 ‘파견법 철폐-직업안정법 등 강화를 통한 직접고용 원칙의 확립’ 이라는 권리입법요구는 제대로 주장되지 않았고, 현행 파견법 유지에 급급하였다. 게다가 ‘파견허용업종 열거’(포지티브 방식)라는 현행 파견법의 틀을 유지하더라도 허용업종을 노사합의 및 의견수렴에 따라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여지마저 주었다. 다음으로 원청 ․ 사용사업주 등 사실상 사용자로서의 위치에 있는 자본에게 노동법 상 사용자책임을 확대하려는 권리입법요구는 노조법 상 부당노동행위 책임을 지는 사용자로 제한되었다. 마지막으로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에 관해서는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 중이므로 교섭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정부 입장을 뛰어넘지 못했다.

결국 이른바 ‘4월 교섭’ 은 5월 2일 노사정교섭 결렬이 되면서 마무리 된다. 경총의 견해 번복 및 정부의 강경입장으로 4월 교섭 자체가 파탄나면서 이 문제는 분명한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잠복된 ‘4월 교섭 내용’은 이후 11월에 와서 노사대표자교섭이 재개되면서 떠오른다.

○ 투쟁의 공백기? 그래도 쉬지 않는 투쟁들 (05년 6월부터 10월까지)

▫ 계속되는 투쟁들
인권위 권고안으로 수정안이 제기되고, 노사정대표자교섭이 결렬된 이후 다시 정기국회가 열려 쟁점이 부각되던 11월이 될 때까지 투쟁은 소강되고 만다. 그러나 이 시기 투쟁을 이어 나가기 위한 흐름은 여전히 존재했다.

전비연(준)은 6월 노동청 항의방문을 통해 다시금 노동법 개악의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등 30여개 현장조직과 사회단체는 다시 투쟁을 정비하고 계속하기 위해 중간평가 토론회를 개최한다. 6월에 열린 노동법 개악 저지 평가 토론회에서는 이후 어떻게 노동법 개악에 맞서 투쟁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또한 10월에는 류기혁 열사의 자결 등 현대자동차 원청사용자성 쟁취와 노동법 개악 문제 등을 문제제기하며 여러 노동 사회단체 및 학생운동 단위에서 노동법 개악 저지에 맞선 릴레이 1인 시위를 노동청 앞에서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작지만 끊임없는 투쟁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투쟁의 흐름은 계속 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상황에서 또 한 번 눈여겨 볼 것은 ‘비정규노동법 개악 저지 공대위’의 해소였다.

▫비정규노동법 개악 저지 공대위 해소 (9월)

04년 12월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부터 나오기 시작한 공대위의 분열은 결국 9월에 해소로 그 수명을 다 하였다. 05년 6월부터 나온 공대위 해소 안은 9월에 와서 매듭을 짓게 되는데, “양극화해소를 위한 대책기구가 만들어질 예정이므로 이 대책기구를 통해 비정규노동법 문제도 대응하도록 하고 공대위는 해산하자” 는 다소 황당한 해소 근거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몇 몇 단위의 문제제기로 공대위가 ‘사회양극화 국민연대’ 등으로 포괄되는 것은 일련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그 자자체로 해소를 결정하지만, 해소에서 공대위 활동의 문제점 역시 별달리 짚어지지 못하고 마무리 된다. 그러나 이 해소 과정에서 나온 해프닝은 단순한 해프닝만은 아니었다.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함께 공동대책위라는 것을 왜 만들었는지, 그 목적과 위상에 대해 심각한 의견차이가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운동진영 내부의 입장 차이의 핵심은 비정규직 철폐냐 차별철폐냐의 문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비정규직 노동기본권이냐 차별철폐냐의 문제인 것이다. 누구는 케케묵은 구분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문제는 비정규 문제의 근본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 시기 마다 등장한다. 더구나 정부가 노동법 개악을 발표한 상황이기에 ‘비정규직 철폐’는 단지 원론적인 구호가 아니라 정부의 개악안을 막아서야 한다는 현실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정세적 구호였다. 이처럼 운동진영 내부는 비정규직화 하는 제도에 반대하느냐, 일정정도 비정규직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에서 문제의 해법을 가지느냐의 차이를 가졌다. 일례로 2000년에 만든 ‘비정규노동자 기본권보장과 차별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이하 ‘비정규 공대위’)에서는 파견법 철폐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였던 한국노총과 전국여성노조는 ‘유사근로자 특별법’ 안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 까닭에 공대위의 분열과 해소는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는 이후 11월에 와서 더욱 노골화 된다.

그동안의 활동을 살펴보면 ‘비정규직 개악저지 공대위’는 매 시기마다 국회 앞 농성, 선전전, 각 부문단위 기자회견, 토론회 등을 가졌다. 표면적으로는 104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10여개 조직 정도가 회의 등에 참여했고, 민중운동 진영과 시민운동 진영을 함께 참여하면서 개악 저지를 넘어서는 방향성에 있어서는 합의되지 않았고 매 국면에서 각자 독자적인 행보를 하게 되었다. 특히 시민운동 진영의 경우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거나 여성운동 쪽은 개악 저지 방향 자체에 일정 부분 이견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한계들은 현실적으로 취약한 활동력으로 드러났고, 활동 역시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성명서 발표, 토론회, 기자회견, 선전전 등이 주된 활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잠복해있던 이러한 입장 차이는 공대위의 해소로 이후 표면에 바로 드러나게 되는데, 11월 한국노총의 최종안 발표가 그 차이를 작동케 하는데 불을 당긴다.

(3) 민주노동당의 수정안 발표 환경노동위 법안 통과 (05년 11월부터 06년 4월까지)

○ 국회 앞 농성투쟁 돌입 (05년 11월)

작지만 지속되는 노동법 개악 저지의 흐름이 있었기에 11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국회 앞 농성이 이루어 졌다. 특수고용 대책회의 중심으로 10월에 농성과 단식에 들어간 이후 11월이 되면서 각 단위에서 농성에 들어갔고 노동법개악 저지를 위한 실천들을 벌였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전비연 등을 중심으로 ‘비정규권리입법 쟁취와 투쟁사업장 승리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이후 ‘공투본’)가 꾸려졌고 실천단 중심으로 활동을 만들어 갔다. 지역과 현장조직 중심으로 ‘비정규직 철폐 현장투쟁단’ (이후 ‘현투단’)이 꾸려져 이 역시 단식 등과 함께 국회 앞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국회 앞 농성에 대해 국회 일정 중심의 투쟁 배치가 과연 옳은 것인지, 우리의 투쟁의 의미를 너무 좁히는 것은 아닌지 논란과 쟁점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사건으로 민주노총에 비대위가 구성되고, 두 차례 무산된 대의원대회 직후 첨예한 쟁점마저 직권으로 처리하면서 대중운동이 무력해지던 상황이라 그나마 국회 앞 농성이라도 하는 것이 투쟁의 의미를 지속하는 것이라는 데에 의미를 두며 투쟁을 지속했다.

○ 민주노동당의 수정안 등장 (05년 11월 29일부터 12월 9일까지)

지난 4월에 해결되지 못한 쟁점은 11월 노사대표자교섭이 재개되면서 다시 떠오르게 되었는데, 민주노총이 이른바 ‘4월 교섭내용’에 기초하여 교섭할 것을 주장하면서이다. 4월 교섭당시 제기하였다가 교섭결렬로 사라졌다던 수정안이 노동계의 공식요구로 재등장하였던 것이다.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및 공두본, 현투단 등 국회 앞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단위들이 이러저러한 통로를 통해 민주노총(비대위)에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역시 분명한 해결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1월 29일 한국노총이 ‘최종안’ (기간제 2년 사용 후 정규직화, 불법파견 고용의무, 특수고용 관련 내년 상반기 중 논의)을 발표한다. 열린우리당은 연내 조속한 처리를 통해 비정규노동법개악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와중에 한국노총이 노동계 최종안이라며 정부 여당의 개악안에 손들어 주었는데, 이를 녹색연합 ․ 민언련 ․ 참여연대 ․ 환경운동연합 ․ YMCA ․ 여성단체연합 ․ 함께하는 시민행동 등 7개 시민단체가 지지했다.

이 당시 11월 교섭은 파국에 이르고 있었는데, 이처럼 한국노총이 일방적인 양보안을 발표하면서야 비로소 민주노총은 ‘4월 교섭내용’의 내용이 아니라 원래의 권리입법요구가 민주노총의 입장임을 선언하였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의 권리보장 입법안을 촉구하며 민주노총과 50여개의 노동사회정치단체가 12월 2일 권리보장 입법안에 대해 지지 의사를 밝혔다.

12월 6일 한나라당은 재계안과 유사한 입장을 발표했고, 이로써 비정규 관련 법안을 둘러싸고 정부 ․ 여당 ․ 한국노총 ․ 7개 시민단체가 같은 입장을, 민주노동당 ․ 민주노총 ․ 50개 노동사회정치단체가 또 하나의 입장을, 나머지는 한나라당과 재계가 한 축을 차지하는 3개의 구도로 나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12월 6일 민주노동당이 차별시정을 중심으로 단계적 분리처리를 제안했고, 환경노동위 법안심사소위가 열리던 8일에 민주노동당은 기간제 사유제한 관련 수정안을 제시했다. 기간제 법안에서 핵심은 기간을 얼마로 하느냐보다는 ‘사유제한’에 있다. 그러나 기간제와 관련하여 6가지 사유가 더 추가되어 10개가 된 민주노동당의 사유제한 수정안은 ‘사유제한’ 을 도입하려는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사실상 기간제를 폭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문제는 각 항목의 내용이 상시적 업무에도 기간제를 확대할 수 있는 여지를 준 것에 있다. 애초 권리보장 입법안의 ‘사유제한’은 일상적으로 필요하고 정규직으로 쓸 수 있는 업무까지 비정규직으로 쓰는 것에 대한 반대의 의미이며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절대 비정규직을 쓰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수정안은 그런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던 전비연(공투본), 현투단 등은 민주노동당에 항의 간담회를, 그 외 단위들도 각종 성명서 등을 통해 문제제기를 계속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월 8일 법안심사소위 논의까지를 거치면서 정부·여당의 법안은 ‘몇 가지 쟁점’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통과되었다.

○ 노동법 개악안의 국회 환노위 통과 (06년 2월부터 06년 4월까지)

06년 2월 27일 국회 환노위에서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하며 노동법 개악안이 통과된다. 2월 임기국회가 열리면서 다시 긴장이 되었지만 민주노동당,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중심당 등 4개 야당 원내대표들이 2월 22일 회담을 갖고 비정규직 관련 법안의 차기 국회로의 이월 등을 합의했다. 이로써 06년 2월에도 국회에서 비정규노동법 개악안 통과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운동 진영에서도 잠시 긴장을 놓고 있었다. 그러던 중 2월 27일 갑작스레 환노위 통과가 진행된 것이다. 2년 여 가까이 오랫동안 매 시기마다 통과에 대한 긴장과 대치가 계속되었던 터라 이날의 환노위 통과는 많은 사람들을 허탈하게 했다. 미처 어떻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날치기 통과가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무기력은 더 심했다.

민주노총은 다음 날부터 총력투쟁으로 대응했지만, 그나마도 철도 파업으로 온 관심이 집중되어 비정규 법안 환노위 날치기 통과에 대한 분노는 이후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나마 전비연은 2월 28일 총력투쟁과 3월 2일에 국회의장 공관 앞에서 새벽 항의시위를 하는 등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움직임을 보였고, 철폐연대에서는 국회의장과 노무현에게 여러 사람들의 항의 엽서를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4) 비정규 노동법 관련 ‘재논의’ 안의 등장 (06년 5월부터 현재까지)

○ 다시 불거진 노동법 개악 재논의 안 (06년 4월부터 현재까지)

이 부분은 안타깝게도 현재 진행형이다. 추후에 글에서 더 보강되겠지만 비정규노동법 관련 재논의안이 기정사실화 되어 나오는 상황이다. 민주노총은 노동자대회를 통해 노동법 개악안에 대한 재논의 입장을 스리슬쩍 비추었고,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공조가 다시 얘기되고 있다. 6월에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여 어느새 노동법 개악 ‘재수정’은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다.

아직도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개악안이 통과된 이후 그 알량한 2년 이후 무기계약근로 간주를 피하기 위한 사용자들의 움직임에 기간제 노동자들은 벌써부터 계약해지 아니면 계약 변경을 강요받고 있고, 지난 7월 1일 파견법이 시행된 지 8년이 된 이래로 죽어나가는 파견노동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이를 질타하듯 6월 말 파견노동자의 설움을 폭로하며 방송사비정규노조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개악안을 바탕으로 하는 ‘재수정’은 이처럼 비정규 노동자들의 삶을 하나도 건질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

정지현 님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 이규석

    현대노조는반성해야하다고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