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똑같은 몸을 보고 똑같은 병을 치료하면서 한의학과 근대 서양의학은 왜 그렇게 다른가? 혹은 서로 합쳐질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 병을 보는 각 의학체계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두 체계의 관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동일한 것인지를 밝히지 않는다면 위의 질문에 적절하게 답할 수 없다.
모든 이론에는 그 이론이 탄생하고 실현되는 바탕이 되는 각자의 시대와 사회의 각인이 찍혀 있다. 이론의 사회 구속성이라는 말처럼 사회를 떠난 이론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볼 때 사회의 성질은 전근대와 근대를 경계로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근대 사회는 경제적으로 생산주체를 생산수단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사회적으로는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근대 사회가 완성한 근대적 분업은 생산과정에서 전체와 부분을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식체계를 포함하여 문화,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게 된다. 이제 봉건 사회를 유지시켰던 자기 완결적 구조나 유기적 총체라는 개념은 생산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성립될 수 없게 되었다.
근대 사회는 전체와 부분을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체와 대상도 분리시켰다. 생산주체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소유관계에서의 문제만은 아니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주체가 분리됨으로써 생산주체는 생산수단을 나와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보게 된다. 근대 사회는 우리의 인식 자체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차원에서 전근대 사회와 근대 사회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보통 내가 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동일한 어떤 정치적 사건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다른 것처럼, 언뜻 객관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람의 몸과 병에 대해서도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마치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보는 관점의 차이를 가져오듯이,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 하는 그 사람의 실천적 관점의 차이에서 온다. 본다는 것은 눈에 비치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한낱 돌멩이에 불과한 것을 아이들은 소중한 보물로 삼기도 하고, 스쳐가는 눈빛 하나에 짝사랑하는 상대는 큰 상처를 입기도 한다.
결국 본다는 것은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곧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 실천의 문제다. 그 실천적 관점은 사회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나 입장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이 탄생한 시대에 따라서도 변한다.
물론 관점의 차이가 대상 자체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와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관점과, 주체와 본원적으로 결합된 대상이라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상은 여전히 동일하다.
권력의 한 형태인 의학은 역사상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왔으며 오늘도 변하고 있다. 권력은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타인에 대한 배타적 지배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권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인정은 물론 그 사회와 그 사회의 바탕이 되는 자연에 대한 관계까지도 지배해야 한다. 정치가 자연에 대한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 권력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는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은 물론 자연과학까지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는다.
이런 전제하에 이 글은 동양의 전근대 사회에 ‘신경(神經, nerve)’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특히 ‘기(氣)’ 개념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의학(漢醫學)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