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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혁적 노동운동의 등장
1) 정치조직운동의 형성과정
o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사회주의운동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이념과 운동에서 일정한 단절을 겪었다. 한국전쟁 이후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표출되었다가 1970년대 들어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외화 되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수위가 어떠하든 사회주의 이념을 가슴 속에 간직한 학출활동가들이 개별적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o 사회주의 이념과 운동의 복원은 1980년대 들어 변혁지향적 노동운동의 형성으로, 그리고 그 주체형성을 위한 정치조직운동으로 등장하였다. 1980년대 정치조직운동은 학생운동가들의 집단적 노동현장 투신으로 인해 양적으로 팽창한 인적 조건이 기반이 되었고, 일부 마르크스·레닌 원전의 출간, 특히 레닌의 당이론을 받아들이면서 급속하게 변화했다. 각 정치조직들은 형성과정에서 차이가 있었고 발전 정도에서도 불균등한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대부분 1985~7년을 기점으로 하여 조직의 정체성을 형성하거나 형성되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o 1980년 목적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운동의 시도는 1980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전민노련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 학출활동가들의 활동방식, 남민전의 조직방식과 정치노선 등에 대한 비판 위에,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조직적 결합을 바탕으로 제2노총건설을 지향하는 전국조직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1980년 정치상황의 변화와 주체역량의 한계 속에서 추진한 무리한 전국 조직결성은 1981년 신군부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이후 학출활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은 소그룹활동을 통해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고, 동시에 노동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o 유화국면 시기 대중운동의 일시적 고양, 특히 1985년 대우자동차투쟁과 구로동맹파업(구로동파)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의 등장으로 노동운동은 빠르게 정치화되면서 정치조직운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치조직운동은 크게 세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1) 우선 선도적 정치투쟁을 주장하던 서노련은 결성에서부터 시작하여 1년 여의 활동기간 내내 조직 균열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선도적 정치투쟁의 문제 및 조직구조, 조직운영방식 등에서 비롯된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이보다는 서노련의 대중관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즉, 정치선동을 하면 노동자 대중이 정치투쟁에 나설 거라고 대중을 대상화시킨 것이었다. 한편 서노련을 비판하며 대중운동을 강조하던 서울남부지역노동자연합(남노련)은 노동현장과 지역에 대중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조직체계를 구축해나가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NL노선으로 전환을 준비하던 중 조직탄압사건으로 산개하게 되었고, 결국 그 활동성과는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2) 1986년 하반기 조직논쟁이 벌어졌고 학생·청년운동진영에서 벌어진 사회성격과 혁명론을 둘러싼 논쟁의 여파가 노동운동에도 불어왔다. 그 결과 정치노선에 따른 조직분립으로 NL세력과 제헌의회 그룹이 등장해 노선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이 세력들은 대중과의 결합정도나 조직력에 맞지 않는 정치조직건설을 시도하다 1년도 되지 않아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또 서·인노련 해체 이후 독자적 문제의식을 갖는 집단들이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서·인노련의 실패 원인을 이론 결핍과 노선 문제로 판단한 점에서 동일하다. 이후 이들은 이론정립을 위한 학습과 세력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일부는 비주체사상파인 '일동그룹'으로, 다른 일부는 '삼민동맹'으로 재건되었다.
(3) 이들과는 달리 노동현장과의 결합을 중요시 여기던 정치서클들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정치노선을 정립하지는 않았지만 NL-CA 노선에 반대하는 서클들이 통합하여 1986년 결성된 투쟁동맹은 1987년 고양되는 투쟁국면을 통해 NL세력과 통합하여 정치적 대중조직인 '인민노련'을 결성했다. 그러나 긴박한 국면의 필요에 따른 조직결성은 그 국면이 해소되자 노선차이로 다시 분열을 했다.
이와 달리 학생운동세력을 조직화하여 그룹 전체적으로 사상학습을 통해 노동현장 이전팀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던 다산보임그룹은 1984년 이후 구성원들을 각 지역의 노동현장으로 분산 배치해 지역근거지를 확보하려 했다. 그 과정 속에서 1986년 조직탄압사건으로 중심역할을 하던 다산과 보임이 해소되었으나, 이 그룹은 각 지역에서는 현장활동 역량을 보존한 채 노동현장과의 결합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였다.
o 이처럼 초기 형성된 정치조직/서클/들은 대중운동과의 강한 결합력을 통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일부는 학생운동에서 형성된 이론을 받아들이는 이념적 정치서클에서부터 정치조직을 건설하려 했고, 다른 일부는 독자적인 이론형성을 중심으로 조직결성을 하였으며, 또 다른 세력은 현장운동 및 대중적 결합을 중요시하는 조직형성과정을 보여주었다.
2) NLPDR그룹의 형성과 분화
(1) 주체사상의 보급과정
o 학생운동세력에게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둘러싼 민족문제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미국의 책임문제를 계기로 등장하였다.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미국의 지배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고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1980년 10월 광주 미공보관 방화투쟁, 19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투쟁과 4월 강원대생들의 성조기 소각사건 등으로 전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80년대 초의 자료에서도 반(反)외세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83년 초에 나온 팸플릿인 「인식과 전략」에서는 “한국사회를 기본적으로 신식민지 사회로 규정한다.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가 미·일 제국주의와 한국 민중간의 민족적 모순에서 파생되는 것이며 이러한 적대적 모순은 민족해방투쟁을 통해 극복된다”고 언급했다.
o 학생운동에서는 1985년 5월 미문화원점거투쟁을 기점으로 반(反)제국주의론이 제기되었다.2이어 제국주의의 본질과 대중노선이 강조되면서 민족민중혁명론을 위한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 1986.4.11.)가 결성되었다. 이에 반해 NDR론의 흐름을 이어받은 민민투(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윈회, 1986.4.11.)가 분립하여 나타났다. 이들이 당시 학생운동의 정치노선을 중심으로 한 변혁론 논쟁을 주도했다.
o 당시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서노련은 학생운동의 이러한 논쟁을 ‘관념적이고 계급적 입장에 불철저한 것’으로 비판하였고, 대부분의 활동가들도 대체로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학생운동의 반제론(反帝論)은 노동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1986년 2월의 ‘반제반파쇼 민족민중혁명론(NPR)’을 표방하는 문건이 나와 논쟁을 촉발시켰다. 거기에 1986년 4월경부터 노동운동의 분파적 양상을 비난하며 사상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김영환의 『강철서신』이란 문건이 등장하였다. 김영환은 1986년 3월 말부터 부평에 거주하면서 5월까지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후배들에게 조직정비와 운동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5건의 강철시리즈를 썼다고 했다. 강철시리즈는 운동권 특유의 어려운 문투를 쉬운 문체로 바꾸었기에 사람들에게 쉽게 읽히게 되었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특히 ‘품성론’은 당시 정치서클들의 분파주의와 권위주의에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던 활동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였다. 그 뒤 ‘구국의 소리’ 방송을 듣는 이들이 생겨났고 방송녹취문도 노동운동 내에 돌기 시작했다. 이처럼 제국주의 문제인식과 강철시리즈의 품성론 등은 주체사상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 또 주체사상의 특징인 ‘간단 명료’한 내용도 그것의 확산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o 이어 1986년의 5.3인천투쟁에서 본격적으로 반미(反美)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5월 말에는 이를 평가하는 『5.3투쟁을 생각하며』(당시 ‘5.3문건’으로 불림)라는 문건이 등장했다. 이 문건은 당시 상황을 ‘결정적 시기’를 대비하여 힘을 축적시켜 나가야 할 준비기로 보고 주체역량의 축적을 강조했다. 또 NLPDR론의 핵심적인 투쟁영역, 즉, 반미자주화투쟁, 반파쇼민주화, 조국통일투쟁을 최초로 제시했다. 노동운동에 있어서 대중조직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투쟁노선에서도 노동자대중의 경제투쟁을 광범하게 조직해야 할 시기라고 주장했다. 이 문건은 노선논쟁을 당면 실천문제와 연관시켰고, 정치·조직·투쟁노선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설명하여 NL세력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2) NLPDR그룹의 형성과정
o 인천지역에서 NL노선에 입각한 본격적인 조직의 형성은 5개 서클 연계구조(네트워크)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서클들이 초기부터 NL노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학맥, 인맥 등을 중심으로 서클로 모여 그 구성원들은 노동현장 활동을 하였다. 이 서클 중에 주도적인 서클은 1983년 인천지역에 내려와 1985년에 동흥전기에서 노조결성을 시도하다 실패한 동국대 77학번 안재환을 중심으로 한 서클이었다. 이 서클은 1983, 4년 경 인천으로 온 77학번, 78학번, 79학번들을 중심으로 20여 명의 인원이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에 이 서클원들이 우연히 비슷한 시기 인천에 노동운동을 하러 내려온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여러 대학의 학출활동가들과 만남을 매개로 이들이 참여하면서 서클 규모가 커졌다. 당시 학출활동가들은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대학 간 연계활동을 통해서, 또 감옥을 통해서 등을 통한 관계형성이 꽤 넓게 있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학출활동가 중심으로 시작된 서클은 1985년에서 1986년경부터 학출활동가들이 현장활동 과정에서 조직한 선진노동자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학출활동가들은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가톨릭 단체나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반공개 형태로 진행한 정치학습을 하거나 지역 집회 및 행사에 참여하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선진노동자들의 참여로 이 서클은 점차 현장성을 강화해갔다(안재환 구술).
o 이들은 1986년부터 노동운동 내부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노선논쟁 과정에서 민족문제·미국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강철서신』, 팜플렛, 방송녹취록 등을 통해 NL노선을 받아들였다. 5개 서클 간 연계구조에서 지도부들이 먼저 노선을 정리한 뒤에 각 서클의 교육담당자들을 학습시켜서 이들이 각 서클마다 조직원들을 교육시키면서 NL노선을 이 그룹의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한편 서클 네트워크에서는 학습과 교육만이 아니라 1986년 5.3인천 항쟁 때 처음으로 ‘반미’의 입장을 드러내는 선전물을 배포하였고, 부평 미군부대 타격투쟁을 시도하면서 자신들의 조직력을 점검하기도 했다.
o 이러한 실천을 시도하던 과정에서 노동운동에서 최초의 NL조직사건으로 볼 수 있는 ‘반제동맹(反帝同盟)그룹’사건이 일어났다. 이 그룹은 서울대 80학번인 박충렬을 중심으로 서울대 경제법학회 및 여러 서클의 구성원인 80, 81, 82학번의 학생운동가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노동운동에 대한 기초 학습을 한 뒤 1984년부터 인천지역의 노동현장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85년 말에서 1986년 들어 서클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를 했다. 여러 혁명론을 검토한 결과 NLPDR론을 받아들였다. 이 그룹은 조직문제에 대해서는 전위조직과 대중적인 정치적 조직체, 노동조합 등으로 구분하였다. 전위조직은 핵심역량이 실제로 준비된 정도나 상태에 맞게 적절한 형태와 방법으로 꾸려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 그룹은 지역실천 활동으로 1986년 5월 3일 인천투쟁에서 “미일외세 몰아내고 민중정권 수립하자”, “속지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 놈”이라고 쓴 두 개의 플래카드를 들고 「일어서자 노동자여! 투쟁하자 노동자여!」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이날 시위에서 처음으로 이들에 의해 ‘미제축출, 파쇼타도’ 등의 구호들이 외쳐졌다. 이어 이들은 1986년 8월 17일 인천 가톨릭회관에서 개최된 ‘민족해방을 위한 노동자 웅변대회’와 대회 이후에 부평역 앞의 거리 에서 “핵무기 철거, 주한미군 철수, 민족해방,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후 「빼앗긴 조국을 되찾자」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했다. 9월 28일 아시안게임반대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시위 장소에 동원된 경찰에게 주동자가 검거되면서 무산되었다. 이 서클은 정권이 노동운동탄압의 방식으로 활용하던 통·반장들의 호구조사로 인해 1986년 하반기에 조직원의 자취방이 드러나게 되면서 조직사건으로 와해되었다.
o 반제동맹그룹과 유사한 정치서클인 ‘지역현장조직그룹’(일명 마르크스·레닌당사건=ML당 사건)이 구로·영등포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기존의 서클적이고 느슨한 인간관계를 청산하고 단일한 ‘지역현장조직’으로 통일시켜 나가려는 활동방식을 모색했다. 『지역현장운동론』이라는 문건을 지침삼아 6개월에 걸친 논의과정을 통해 1986년 6월 조직을 구성했다.
이들은 서클적 구조에서 벗어나 조직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해 나감과 동시에 정치·사상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변혁론을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그 결과를 「NLPDR테제」와 「조직상의 과제(1)~(4)」라는 문건을 통해 정리하며 기본입장을 밝혔다. 조직노선은 ‘지역현장조직’이 지역전위조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당적 구조를 가진 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3 이 과정에서 이론·실천적인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협의적 중앙을 두었다. 그러나 이 그룹은 성급하게 조직을 우선시하는 사업방식으로, 조직화가 진전될수록 초기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론학습에 매몰되었다. 더욱이 무리한 조직 확장으로 비밀활동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시켜, 결국 조직이 탄압을 받아 해체됐다.(『동아일보』, 1986.10.24)
o 이처럼 노동운동 내부에는 제국주의 규정성 및 대중노선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NL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NL세력은 초기에는 조직문제에 대한 입장이 정립되지 않아 그룹마다 서로 다른 방향을 설정해 나가다가 1986년 반제동맹그룹사건과 ML당 사건을 겪으면서 ‘산개론’을 주장하였다. 대중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무리하게 하향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기 때문에 당국의 수사망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그 근거였다. 그러므로 대중기반을 강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큰 조직을 만들 것이 아니라 10~20명 단위로 각기 흩어져서 대중조직 활동과 의식화 활동을 하면서 사상적 토대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각 지역의 NL세력은 소그룹으로 산개하여 활동을 벌였다.
3) NDR론과 제헌의회그룹의 형성
o 1986년 3월 이후 NL론의 등장과 확산 속에서 이를 비판하는 ‘제헌의회그룹’이 등장하였다. 1985년 2.12총선을 전후로 ‘제헌의회소집’을 주장하면서 NL세력의 ‘직선제 개헌론’을 기회주의, 개량주의적 운동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제헌의회그룹은 NL노선과 정면으로 대립하여, 민족민주혁명(NDR)론을 정립하며 대통령 선거전까지 줄곧 이론 논쟁을 전개했다. 특히 학생운동에서는 NL노선의 조직인 자민투에 대립하여 민민투조직을 통하여 투쟁을 선도하였다.
o 제헌의회그룹은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몇몇 맑스·레닌 원전학습을 매개로 정치노선을 중심으로 주체들을 조직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이 그룹의 구성원은 과거 전국민주학생연맹,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관련자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그에 따라 NDR노선을 견지하였다. 여기에 구로, 독산동 지역의 노동운동세력, 안양·성남지역의 노동운동세력, 학생운동세력 등이 참여하였다. 또한 이들은 개헌국면에서 헌법문제에 대해 비타협적인 입장을 갖고 있던 여러 세력들을 조직에 합류시켜서 일정하게 조직의 틀을 갖추어 갔다. 특히 1986년 5월~6월경 최민이 『혁명운동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이하 ‘기수’)와 『무엇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고 있는가』(이하 ‘진군’)라는 팸플릿을 쓰면서 예비조직원은 레닌의 혁명이론과 이 팸플릿들을 교재로 삼았다.
o 조직원칙은 조직의 보안성 및 이념으로 무장한 혁명적 소수정예주의를 강조하였다. 그에 따라 조직원 자격은 “직업적 혁명가가 되기 위해 맑스·레닌주의의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무장되고 혁명에 대한 헌신성과 책임성이 있으며 대중에 대한 지도력과 투쟁력을 갖추거나 비밀활동 수행 능력 등을 겸비한 자” 중에서 선발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런 기준에서 어긋날 때는 조직원이라도 재교육시켰다.
o 한국사회를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규정 속에서 성장한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도 낮은 생산력과 민족분단 상황을 근거로 하여 NDR론을 혁명론으로 정했다. 이들은 당시를 ‘혁명적 정세’로 파악, 즉 ‘혁명을 예고하는 상황’ 또는 ‘혁명적 정세기로 나아가는 고양기’이며, 개헌을 둘러싼 정국은 대중들의 변혁 열망이 헌법을 매개로 해서 터져 나올 것이라고 파악하였다. 그 때문에 개헌국면 시기에 자신들의 전략을 응집하여 ‘제헌의회소집’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o 이러한 정세관에 따라 이들은 조직과제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전위조직건설이 긴급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레닌의 조직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전국적 정치신문’을 수단으로 각계의 전위역량을 한데 모아 사상과 조직의 통일을 제고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이들은 전위조직의 ‘항상성’을 강조하면서 전체 운동의 통일적인 지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조건과 무관하게 선진적 인자들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바로 전위조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o 이와 같이 제헌의회그룹은 사상적 통일을 통한 전위조직건설의 필요성을 노동운동에 제기했다. 그러나 이 그룹은 목적의식적 전위의 역할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관념적 급진성을 드러냈고 대중운동과 정치운동의 긴장 및 상호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대중과의 결합에 실패하고 탄압으로 조직은 와해되었다.
4)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삼민동맹)의 형성과정
o 서노련이 해체된 이후 조직원들이 분화되었듯이, 인노련도 일부는 NL세력으로 흡수되거나 ‘일동그룹’으로 결집했고, 잔류 세력들이 새로운 조직건설을 위한 활동을 재개했다. 당시 인노련은 5.3항쟁 이후 서노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직침탈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노련의 지도부였던 김진국, 이용선 등이 중심이 되어 서노련의 잔류세력과 안양지역의 세력 등을 모았다. 이 때 참여한 인원은 대략 80∼100여 명 안팎이었다.
o 이들은 우선 서·인노련의 활동에 대해 평가하고 반성했다. 이들은 서·인노련의 활동에 있어 활동가들의 헌신성과 투쟁성을 높이 평가하고, 노동운동에 투쟁적 전통의 기운을 세워낸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조직이념과 조직성격의 모호성, 조직운영의 비민주성 등의 문제로 인해 서·인노련 해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다. 동시에 전위당 건설의 필요성을 이후의 과제로 인식하기도 했다.
o 이런 평가에 기초해 이들이 착수한 것은 정치노선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출발할 때부터 이들은 당시 부상하던 NL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NL론은 결코 남한 사회의 현실과 운동의 방도를 옳게 설명하고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현실적 조건의 어려움을 이유로 ‘조직해체 사상’이나 다름없는 산개를 주장하는 것은 그동안 노동운동이 소그룹적 한계를 극복해온 성과를 무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점을 비판했다. 1년에 걸친 이론작업 결과 이들은 ‘민족통일·민주주의·민중해방’을 내세운 삼민혁명론을 정립하였다.
o 이처럼 변혁론을 정립하면서 한편에서는 조직원들을 모아 조직체계를 구축해 갔다. 이 그룹은 지도 중심으로 중앙을 세워내고 인천, 안양, 서울 등의 지역체계를 갖추었다. 동시에 1987년 말부터 기관지의 성격을 띤 『노동자의 깃발』 준비호를 발간하였다. 1988년 10월 부천 작은자리에서 서울, 인천, 경기남부 등 각 지역 대표자들 30여 명이 참여해 창립대회를 가졌고 그 자리에서 기본노선을 발표해 합의를 보았다. 이로써 서·인노련의 잔류세력들은 삼민혁명론을 좀 더 체계화하여 정치조직으로의 재건에 성공하였다.
o 삼민동맹은 결성 이후 주요활동은 기관지를 통한 강령의 선전작업을 중심으로 공장활동의 지원과 선진적 노동자의 교육활동 등을 벌였다. 그러나 이 그룹은 창립 1년 6개월만인 1990년 4월 25일 이후 조직탄압사건으로 17명이 구속되어 활동이 정체되었다.
5) 정치서클통합과 초기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① 반(反)NL-CA의 인천노동자계급투쟁동맹의 결성
o 1986년 NL-CA의 노선논쟁으로 노동운동 내부가 혼란에 휩싸인 상황에서도 인천지역에서는 노동현장에 기반을 둔 정치서클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o 우선 주안·하인천 지역의 그룹은 노회찬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 그룹은 현장활동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지역 정치활동의 일환으로 선전물 배포 등의 활동도 진행했다. 구성원들은 대부분 노동현장에서 활동하였고 일부 선진노동자들이 참여해 구성원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o 이런 주안·하인천의 서클과 비슷한 방식으로 활동을 하던 부평의 서클, 부천의 서클이 운동 전망을 둘러싸고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의 출발은 부평서클의 정태윤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논의를 통해 NL세력과 제헌의회그룹의 등장으로 노동운동 내부에 사상의 혼란이 심하다고 판단하여 ‘반(反)교조주의, 반(反)NL과 반(反)CA’를 내세우며 공동으로 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 그룹도 그 이상의 이념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이 모임에서는 서클 수준을 뛰어넘는 지역 조직을 건설하는 것에 합의하고, 이를 위해 서클간의 통합추진과 정치조직건설의 선결 과제로서 대중운동의 활성화 및 조직기반을 형성하기로 했다. 이후 서클을 통합하여 '투쟁동맹'을 건설했는데, 이는 1986년에 1년 여 간의 중심적 인물들이 내부 비밀토론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전체 참여자 수는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o 투쟁동맹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국민적 분노 속에 투쟁의 분위기가 형성되자 ‘살인강간고문정권타도투쟁위원회’(이하 ‘타투’)라는 공개투쟁조직을 결성하여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타투는 1987년 2월 5일 「장기집권 획책하는 살인강간고문정권 타도하자」라는 선전물을 통해 그 목적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심형성에 부분적으로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대중에 뿌리내린 반(反)군사독재 민주주의 연합전선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서 “범국민적 저항운동을 광범위하게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②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결성과 분열
o 1986년 하반기 노동운동의 침체상태에 들어감에 따라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을 선도하는 조직이 부재하였다. 특히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투쟁의 열기가 높아지고 6월 민중항쟁으로 전환되자,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세력은 공동투쟁체를 만들어 투쟁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공동실천을 통해 1987년 4월경부터 투쟁동맹은 인천지역의 NL서클들과 연계하여 정치조직결성을 논의하였다. 특히 6월 민중항쟁이 진행됨에 따라 노동운동세력을 중심으로 노동자의 조직적 진출과 정치적 입장의 표명, 일관적인 투쟁계획과 지도가 긴박하게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투쟁동맹과 NL그룹이 동거하는 ‘정치적 대중조직’인 인민노련이 1987년 6월 26일 부평역 가두시위과정에서 공개적으로 결성되었다.(초기 인민노련 결성)
o 그러나 인민노련 결성 직후에 있었던 6.29선언은 고양되던 국면을 빠르게 이완시켰다. 인민노련은 한국사회의 성격, 정세인식 등에서 비롯된 견해차이, 조직의 위상, 투쟁방침 등을 둘러싸고 내부논쟁을 거듭했다. ‘정치적 대중조직’으로서의 인민노련의 위상과 관련해서 NL그룹은 그것을 노동자의 대중조직인 노동조합과 같은 위상을 가지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와 달리 투쟁동맹은 전위조직과 대중조직의 중간쯤에 위치하면서 전위조직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또 대선전술 및 투쟁방향에 대해서는 NL그룹은 직선제 개헌 및 과도정부수립을 주장하였고, 투쟁동맹은 독자후보전술을 주장하였다. 결국 1987년 10월 대의원대회에서 장시간의 토론 끝에 정치조직이라는 조직성격 규정과 민중민주정부 수립을 전략목표로 설정하는 투쟁동맹 쪽의 입장이 강령개정에 기본방향으로 채택되었다. 이에 NL그룹은 조직을 탈퇴했고, 남은 투쟁동맹은 정치조직건설을 목표로 조직의 성격전환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조직결성 이후 3개월 동안의 논쟁 때문에 제대로 된 공동실천을 하지도 못한 점이었다. 바로 노동자대투쟁이 발전되는 시점에 대중투쟁을 방기했던 것이다.
6) 다산보임그룹의 형성과 조직탄압사건
o 다산보임그룹은 1970년대 각 대학에 탈춤반, 전통문화연구회 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기독교청년회의 문화활동인 ‘대학연합 탈춤팀’의 움직임으로 시작됐다. 연합탈춤팀은 초기부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결하여 활동을 했다. 그 결실로 1978년 말에 민주노조인 반도상사 노조에 탈춤반을 결성하였고, 뒤이어 원풍모방노조, 동광모방노조에도 탈춤반을 만들었다. 노동조합에 탈춤반을 구성하는 것과 동시에 1980년대 들어 모임체계를 갖추면서 대학연합 농촌활동과 공장활동을 추진하면서 학생운동가들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시도했다. 이런 활동을 기반으로 1983~84년에는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는 팀(노티)을 서울대, 서울교대, 연세대, 한신대 등에 구성하여 학생운동 내부에 점차 세력을 넓혀 갔다.
o 연합단위에서는 조직관계를 이원화시켜 비공개 학습그룹인 ‘진영’과 문화활동 중심의 ‘화자’를 구성했고, 여러 대학에서 다수 참여한 80학번들이 모임의 중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그룹의 노동운동에 대한 참여방식의 논리는 OF(Out field)-LM(Labor Movement)론과 IF(In field)-LM(Labor Movement)론이었다. OF-LM은 학생운동가들이 노동운동에 수평적 이동을 해서 현장 외곽에서 정치선전과 선동을 하기 위한 체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이 그룹은 다산기획과 보임을 두어 학생운동가들의 노동현장 이전구조를 구축하였고, 이전팀을 마친 이들을 지역과 현장으로 이전시키기 시작했다. IF-LM은 학생운동가들이 노동현장으로 완전한 존재이전을 해서 철저히 노동자가 되고 현장에서부터 노동자 권력을 형성해 소비에트 방식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o 이들은 독특한 개념을 사용하였고 독자적인 실천을 모색했기 때문에 당시 노동운동 내부에서 그 개념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이들은 변혁론을 정립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노동운동 논리와 역사를 검토하고 현실을 분석하면서 독자 개념을 만들어 나갔다. 예를 들면 혁명론에서는 러시아의 ‘소비에트 혁명’과 프랑스의 ‘코뮨 혁명’을 사유하면서 한국 상황에 맞는 혁명론을 세워나가려 노력하였다. 그 때문에 당시 노동현장론과 준비론, 무림·학림논쟁 등의 운동논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독자적 전위당건설’을 조직활동의 과제로 삼았다(박성인 구술).
o 이 그룹은 1982년 하반기부터 학생운동을 노동현장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노동현장 이전팀을 구성하였다. 이전팀들은 노동운동 또는 변혁론의 바탕이 되는 이론학습, 특히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의 노동운동사 및 사회주의운동사 등의 학습을 방대하게 진행한 것이 특징이었다. 1982년 하반기부터 이전 팀을 구성하여 성원들을 노동현장으로 진입시켰다. 이전팀 운영은 1986년 다산보임 사건으로 타격을 받았으나, 1988년 정도까지는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공장에 진입하는 방식이 좀 더 체계화되어 한국산업의 구성을 파악해 전략산업을 선정하기도 했고, 1985년경에는 서울, 인천, 안양, 성남 등의 수도권만이 아니라 소수이지만 남부 지역인 울산, 마산, 창원 그리고 부산으로 내려가 현장 진입을 시도했다(유길종 구술).
o 이처럼 조직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와 동시에 각 지역에 구성원들이 노동현장에 진입하던 중에, 1986년 3월 25일 ‘다산보임 사건’으로 이 그룹은 중앙지도력에 타격을 받았다. 이는 1987년 이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조직운동 방향을 둘러싼 갈등과 그 과정에서 전국을 아우르는 공동의 지도력을 세워내지 못하는 주요 요인이 되기도 했다.
2. 변혁적 노동운동의 분화
▲ [그림1] 1980년대 정치조직운동의 분화 |
1) 변혁적 노동운동의 조직노선에 따른 분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중운동의 발전과 맞물려 여러 정치세력들의 활동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86년 하반기부터 전개된 조직노선 논쟁을 통해 제기된 다양한 방식의 조직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o 우선 아래 <표 1>에서 ‘정치조직론’을 주장한 세력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노동자계급의 전위당건설을 지향한다는 공통성을 갖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사상통일을 중심에 둔 ‘위로부터의 전위당건설’을 추진하는 경향과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강화하는 가운데 지역정치조직을 형성해 전국화를 추구하려는 경향으로 나눠진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입장에서 조직운동을 벌인 경우는 선전그룹을 중심으로 전국적 정치조직결성을 시도한 사노맹, ‘노동계급’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노동현장에 기반을 둔 지역정치조직을 형성하면서 전위당건설을 지향한 인민노련, 삼민동맹, 제파PD, 안산민주노동자연맹(이하 ‘안산노련’)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안산노련은 1987년 이전에 안산지역을 근거로 ‘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로 활동하던 그룹이 1988년 5월에 결성한 조직이었다. 안산노련을 주도한 전성은 10여명의 주위 사람들과 1985년에 안산으로 노동현장 이전을 했다. 이들은 1987년까지 ‘현장에 뿌리 내린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모두 노동현장에 들어갔다. 이 그룹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겪으면서 선진노동자들의 참여가 늘어났고, ‘안산 노동자의 집’과 ‘노동사랑’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개적인 지역활동을 하였다. 1988년 60여 명의 조직원들이 참여해서 결성된 안산노련은 반합법 정치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안산노련은 『노동자의 길잡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지만, 결성이후에도 현장중심성이 강하고 정치노선을 정하지 않고 있다가 점차 PD적 경향으로 기울었다.(전성 구술)
이와 달리 ‘노동계급’은 서울대 이념서클인 ‘농업경제연구회’ 구성원인 안민규와 박태호(이진경)가 1987년 5월부터 학생운동가들 40~50명을 모아 PDR론에 따라 조직강령과 규약을 만들어 1989년 4월에 결성한 조직이다. 기관지로 「노동계급」을 5호까지 발간했고, 조직원들을 서울, 인천, 울산 등에 파견했으며, 서울대 등의 학생운동에도 조직을 확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1990년 1월 15일 박태호가 구속되고, 1월 23일에는 안민규가 구속되면서 활동이 정체되었다.
▲ <표 1> 1987년 이후 변혁적 노동운동의 유형 |
인민노련, 노동계급, 안산노련, 삼민동맹은 1989년 말부터 조직탄압을 받으면서 활동이 침체됐다. 그 결과 이들 조직은 인민노련과 함께 1991년 한사노당건설을 추진했다.
o 다음으로 ‘정치조직론’을 비판하며 등장한 ‘정치적 대중조직론’은 1986년 12월경에 「현정세와 제 임무」라는 팸플릿을 통해 그 입장을 드러냈다. 이 문건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임무수행과 투쟁을 위한 조직으로서 ‘지역노동자정치투쟁위원회’(이하 ‘지역정투위’)를 제안하였다. 지역정투위는 전위적 지도를 일정 정도 수행하면서 노동자들과의 결합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조직과는 다름을 강조했다. 이어 ‘정치적 대중조직론’은 NL세력과 반(反)NL세력이 공동으로 결성한 초기 인민노련의 조직위상을 둘러싼 논쟁과정에서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는 초보적인 정치의식을 갖고 있는 광범한 노동자대중을 조직적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대중정치단체의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후 공식적으로 「현 시기 남한 혁명운동의 조직적 임무에 대하여」(1987.4)라는 문건으로 다시 그 입장을 드러내었다. 이 입장은 당시 상황을 ‘준비기’라는 판단 아래 대중노선을 강조하고, 전위적 요소는 대중투쟁 속에서 엄격한 단련을 거쳐야 하며, 이들이 전위로 결집되기 위해서는 당의 사상적 기초를 닦는 것이 1차적으로 요구된다는 내용이었다.4 이런 주장을 펼친 이들은 1988년에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이하 ‘인노회’)와 안산민주노동자회(이상 ‘안노회’) 등을 결성했다.
안노회는 1986년 안양지역의 공동임투를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서 NL성향의 비합법서클로 시작되었다. 이 그룹은 김현덕(총괄역할), 노세극(교육), 정성희(조직), 최창남(연대)이 지도부를 맡아 활동하다가 1988년에 안노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노세극이 소장인 안산노동상담소를 통해 지역 대중활동을 벌였으나 1990년대 초까지 안양지역에서는 소수파였다.
o 이와 달리 일부의 NL세력은 전위조직건설을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혁명적 대중조직론’을 주장하였다. 혁명적 대중조직론은 비공개노조론을 보다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 주장은 노동조합의 기본 형태로 혁명적 노동조합(또는 자주적 노동조합)을 제시하였다. 전위조직은 이론이 아닌 투쟁을 통해 양성된 선진노동자들이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조직활동을 통한 집단주의를 훈련하고, 노동자 대중과의 공고한 결합을 통해 전국적 단결을 꾀하는 순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입장은 대중운동을 지도하는 혁명적 대중조직을 통해 투쟁 속에서 전위조직의 발전과 대중조직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또 대중과의 결합이 운동 승패의 핵심 문제이며, 대중과의 결합은 ‘혁명적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경제투쟁과 민주노조라면 무조건 탄압받고 파괴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노동자계급의 구심은 비합법·반합법 조직, 개별사업장을 기초로 하고 지역 수준에서는 조직의 골간을 담보하는 조직의 형태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혁명적 노동조합을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통일적으로 수행하는 대중조직으로 보았다.
이 입장은 1987년 11월 1일 서울노동조합운동연합(서울노련)의 결성으로 가시화되었다. 서울노련은 “노동운동의 방향에 대해 노동조합운동은 투쟁적이고 민주적이며 강력하고 더 나아가 진보적(자주적)이어야 한다”고 밝히고, 그런데 “합법노조는 주체적 역량과 법적 제도적 제약 때문에 투쟁적이고 진보적인 역량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는 반합법 노동조합 운동조직을 포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비공개 사업장 조직, 지역활동가들, 해고자들이 노동조합적 대중조직으로 모여서 자주적 노동조합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서울노련은 반합법 노동조합조직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려 했다.
o 이런 조직론들과 달리 1987년 처음 등장한 ‘선진노동자론’은 선진노동자를 변혁적 관점에서 노조활동을 전개하려는 노동자로 규정하면서, 조직성격은 ‘노조보다 한발 앞선 변혁적 입장(민족해방, 노동해방)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조직은 첫째 민족민주운동에서 노조가 수행할 수 없는 투쟁을 선도적으로 수행하는 것, 둘째 노동조합에 대한 사상적이고 실천적인 지도·지원을 수행하는 것, 셋째 이러한 실천을 기초로 사상적 내용을 확보해 가는 것을 임무로 설정했다. 그 중에서도 선도적 실천을 당면한 주요 임무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런 ‘선진노동자론’은 조직성격에 노동해방이 추가되고 대중운동에 대한 지원·지도보다 선도적 실천이 주요하게 부각되었을 뿐 기본적인 조직사상은 ‘혁명적 대중조직론’과 유사했다. 이들은 투쟁을 통하여 올바른 사상의식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 가장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방도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조직론은 노동조합이 수행할 수 없는 선도적 실천을 통해 대중운동에 대한 사상적, 실천적 지도내용을 확보하며, 그리하여 대중운동에 대한 지도력의 축적을 통해 혁명적 정치조직으로 성장·전화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결성된 경수노련은 경기남부 지역에서 노조운동의 주류로 부상했다. 이 조직은 1985년 가을부터 김승호의 지도하에 경기남부 차원의 모임을 갖기 시작해 ‘노동자권익투쟁위원회’로 활동하다가 1987년 8월 초 ‘노동자권익쟁취전진대회’를 주최하면서 처음으로 공개집회에 경수노련이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했다. 경수노련은 ‘반월공단노동상담소’와 ‘밝은 자리’라는 문화공간을 지역 대중활동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기관지로는 『전진하는 노동자』(1988년)를 발행했다.
정치조직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방식
한편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사업장에서 지역과 업종으로 나아가 전국으로 발전해가자 변혁적 노동운동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변혁적 노동운동세력의 활동공간이 대중운동의 전국적 발전 추세와 맞물려 전국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과 학생운동가들의 노동현장 투신은 주로 서울과 인천지역이 중심이었다면, 1980년대 학생운동가들의 노동현장 투신은 서울, 인천, 안양, 성남지역 등 수도권으로 넓혀졌다. 대중투쟁도 1985년 구로공단의 동맹파업과 인천지역의 대우자동차투쟁처럼 수도권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 때문에 1985년 직후 초기 정치조직들의 등장 역시 수도권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노동자대투쟁 이후에는 전국에 민주노조운동이 뿌리내리면서 학생운동가들의 노동현장 투신이나 정치조직들의 활동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다산보임그룹 활동가들은 부산, 마산, 울산으로 진출했고, 사노맹은 전국적인 진출을 시도했으며, 인민노련은 울산, 거제, 마창 등에, 그리고 ‘노동계급’ 그룹이 울산, 마창 등에 진출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나타난 변화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1986년 하반기부터 대두된 조직노선에 따라 실질적인 정치조직을 형성한 점이다. 특히 이전 시기와 다른 것은 정치적 이념성을 강화함으로써, 대중운동과의 결합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점이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레닌의 원전이 출판되어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정치조직의 형성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었다.5 이런 조건을 반영하여 정치조직들은 학출활동가들과 선진 노동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학습시켰다.
이러한 변화를 보이는 이 시기의 정치조직들이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높여나가기 위해 꾀했던 공통된 활동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단위사업장에서의 민주노조결성과 노조활동에 조직원들이 결합을 하였고, 선진적 노동자층과의 결합 비율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즉 정치조직들은 민주노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켜나가면서 동시에 선진적 노동자층을 조직원으로 참여시켜갔다. 또한 미조직 사업장의 경우는 민주노조결성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둘째, 1987년 6월 민중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대와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전국에 민주노조운동이 뿌리내린 힘에 근거해서 정치조직들은 지역마다 노조운동을 지원·지도하기 위해 상담소라는 공개적 노동운동단체를 설립했다. 노동운동단체는 단위사업장 민주노조와 지노협의 활동을 지원·지도하면서 한편에서는 선진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초보적 정치교육과 정세교육 등을 진행했고, 또한 노동자들이 사회문제를 구조적이고 계급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을 벌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노동단체들은 지역과 전국의 공동투쟁체인 지역노운협과 전국노운협으로 결집하여 정치문제에 대해 공동투쟁으로 대응하려 했다. 셋째, 정치조직들은 민주노조운동을 지원하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각 지노협의 건설부터 전노협건설 및 그 운영을 위해 조직원들을 파견하였다. 실제 지노협과 전노협의 실무력과 전문력을 갖춘 상근자들은 대부분 각 정치조직에서 파견한 학출활동가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정치조직들이 대중운동과 결합하는 방식은 다음의 [그림 2]와 같다.
▲ [그림2] 1987년 이후 정치조직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방식 |
2) 정치적 대중조직과 분회활동(인노회)
1987년 10월 대의원대회 이후 인민노련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NL세력, 부천과 인천의 NL세력, 일동그룹 등이 모여 새로운 조직결성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조직력을 총결집하여 반공개 조직을 건설하자는 입장으로 정리하여 인노회를 결성했다.
인노회는 ‘자주 민주 통일’의 정치적 이념과 노조와는 다른 역할을 갖는 대중정치단체라는 조직노선을 제기하였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는, 우선 ‘노동자를 조직의 주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에 학출활동가들이 들어와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높인 긍정적 역할을 한 반면, 노동자들을 주체로 세우기보다는 대상화시킨 부정적인 면도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극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노동운동권의 낡은 풍토를 쇄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당시 노동운동의 분위기는 선진적인 이론이나 학생운동의 경험에 기반을 둔 수많은 ‘서클’들을 결성하고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지도를 자처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실업자 노동운동’으로서, 공장생활을 하지 않고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과는 거리가 먼 논쟁이나 선도적인 투쟁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은 이런 풍토와 서클의 음모적 체계를 깨고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했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인노회는 선진적 노동자들과 학출활동가들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 학출활동가들은 회원 자격규정에 ‘현장경험이 10개월 이상인 자’라는 규정을 두고 있었다 (「회칙」제3조2.회원) 이런 규정은 회원들이 현장활동의 경험을 충실히 갖출 것을 강제하기 위한 것이었다(안재환 구술).
인노회의 조직체계 대의원대회와 상집위원회, 회장과 사무국장 체계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조직부 밑에 주안, 부평, 부천지역에 지구위원회를 두고 지구위원장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벌였다. 지구위원회 산하에는 5~6명 단위의 ‘분회’가 각 지구당 10여 개 안팎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인노회의 모든 회원은 ‘분회’라는 정치소모임에 배치되었고, 노동자들은 이 분회 활동 속에서 단련되었다. 전체 조직원은 200여 명 안팎이었다.
결성 후 1년도 채 안된 1989년 1월부터 6월에 걸친 조직탄압으로 주요 지도부가 구속되고 남아 있던 구성원들은 인천사회운동연합(이하 ‘인사련’)의 노동분과로 들어갔다. 인사련은 일반 시민, 노동자 등이 참여하는 곳으로 노동단체의 성격은 약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노동분과에서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인사련의 다른 회원들처럼 지역운동을 벌였다.
o 이처럼 1987년 전후 NL세력은 산개론에 근거해서 공장을 근거지로 한 채 활동가들이 소규모로 모여서 정치역량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운동의 발전과정에 개입하기 위해 산개해 있던 NL세력들은 정치활동을 위한 정치적 대중조직을 결성했지만, 위의 활동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개활동의 영역과 비합법적 조직활동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런 조직방식은 실재 대중운동과의 결합을 강화시키지는 못한 채 공안당국의 주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비공개 조직원들조차 공개된 속에서 조직의 보위를 지킬 수 없는 조건이었다. 결국 인노회는 결성 이후 1년도 채 안되어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3) ‘위로부터의 전위조직’건설과 공장소조(사노맹)
o 노동해방투쟁동맹(노해동)은 제헌의회 재건그룹으로 불릴 만큼 제헌의회와 이념적 노선을 계승했다. 그러나 노해동은 1987년 대선과정에서 내부 분열을 겪었다. 노해동의 다수파는 주로 조직국 성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소수파는 주로 「선봉」 편집부 성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노해동 내부의 다수파와 소수파의 대립은 1987년 대선투쟁 과정과 1988년 제13대 총선투쟁 과정에서의 대응방안을 둘러싸고 첨예화되었다. 1987년 대선 시기 다수파(박종운 등)는 민주연립정부론을 주장하였고, 소수파(백태웅, 박기평 등)는 민중집권론을 주장하며 대립하였다. 의견대립은 1988년 제13대 총선시기에도 지속되었다. 총선을 앞두고 당면 정세에 대한 판단 및 전략전술적 대응방법을 둘러싸고 다수파는 ‘민주국회 확보’를 주장하였고, 소수파는 이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건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조직 내부의 대립은 결국 소수파의 탈퇴로까지 이어졌다.(김철수 구술)
전위정당건설을 주장했던 소수파는 1988년 4월 1일 「왜 우리는 ‘선봉 그룹’에서 분리선언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노해동에서 분리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분리선언」에서는 “노동계급 전위정당건설을 구체적인 일정으로 올려놓는 일, 당면 계급투쟁 전선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영도를 부인하는 기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비판, 사회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목적의식적인 선전선동계획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였다. 당시 소수파는 분리선언 때 200여 명으로부터 위임서와 서약서(조직체계 구성 및 새로운 조직화의 위임)를 받았다. 이때 합의사항은 “본격적인 혁명적 사회조직을 건설한다(전위조직과 대중조직을 명확히 구분하고 강고한 지도부를 갖는 조직)는 내용·대중적 전위조직·전국적 체계·4개월간의 지옥훈련” 등이었다. 이들은 이후 사회주의노동자동맹출범준비위(당시의 명칭은 노동조합지도자대회준비위)를 결성하고, 1988년 6월 조직 활동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준비위의 당면임무」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사노맹의 조직방향을 정리했다.
o ‘사준위’는 1988년 4월경부터 시작하여 1989년 11월 사노맹이 정식 출범하는 시기까지 1년 7개월 동안 조직결성을 준비하였다.
우선 1989년 초까지 사준위는 조직원 확보와 조직의 물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조직체계를 재구축해 갔다. 구체적으로 조직원 확보를 위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자격요건을 확보하기 위한 ‘지옥훈련’과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할 조직사업, 물적 조건 확보 및 선동 등의 ‘필수실천’ 등을 주요 사업으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1988년 6월부터 10월경까지 중앙 및 지방의 핵심조직원 50여 명이 사상교육, 체력단련, 무술습득 등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사준위는 조직 체계를 재정비하면서 제헌의회 시기를 뛰어넘는 새로운 조직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했다. 각 지역에 기초적인 인적 배치가 완료된 후에 본격적으로 대중사업을 시작했다. 그 기본방향을 정식화한 것은 『일대전환』이라는 팸플릿으로, 대중사업 방식, 노조활동 방식, 비합법 정파활동 방식 등의 대중적 전환을 표방했다. 사준위는 사노맹 결성 직전까지 중앙골간조직의 분화와 지방조직의 분화, 외곽조직 및 프랙션조직 건설을 위해 각 운동단체의 파견망을 구축하고 각계 영역에서 활동가들의 조직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사준위 시기를 거쳐 1989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 장소에서 사노맹의 출범을 선언했다.
o 사노맹의 결성이후 조직활동은 다음과 같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 시기는 출범 및 조직의 성장기(1989.11.∼91. 2차 사노맹 사건 직전까지)라 할 수 있는데, 1989년 11월 공식출범한 뒤 『일대전환』에 기초하여 1990년까지 활동한 시기를 일컫는다. 1차 사노맹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전면적인 대중활동으로의 전환 및 체계 정립을 시도했다. 두 번째 시기는 조직사수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모색시기(1991∼92.4. 3차 사노맹 사건 직전까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우선 1991년 3대 혁신의 제안인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및 사회주의운동의 새로운 모색 필요에 기초하여 이념혁신, 조직체계혁신, 조직활동 혁신” 등을 추구했다. 그 뒤 2차 사노맹 사건으로 박노해, 김진주 등이 구속되면서 조직혁신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진행됐다. 한편 이 시기에 인민노련으로부터 한사노당건설에 참여할 것을 제의받으면서 전위정당 결성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그 결과 사노맹은 한국노동당으로의 불참을 결정하고 합법·비합법 동시결성론으로 그 입장을 정리했다. 세 번째 시기는 사노맹의 붕괴 및 재건투쟁의 실패(1992. 4.~1995) 시기다. 1992년 4월 3차 사노맹 사건이 터지고 9인 중앙위원 전원과 500여 명의 조직원들이 구속을 당하면서 조직의 지도력이 붕괴되었다. 또한 30여 곳에 달하는 합법적인 재정사업을 벌이던 곳들이 붕괴되면서 조직의 재정적 기초도 무너졌다. 이런 타격 이외에도 내부자료 등 조직적 자원의 90%이상이 안기부에 의해 파악되었다. 그 와중에 재건중앙을 결성하여 조직재건활동을 펼쳤으나 지속되는 구속으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하였고, 대중적 기반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그 결과 사노맹 해소론이 제기되면서 이를 둘러싼 갈등이 야기되었고, 반합법적 영역으로의 이전을 결정하였다. 그 뒤에 민중정치연합을 결성했다가 진보정치연합과 통합하였으나, 1995년 실질적 해소를 했다.
4) 지역정치조직과 대중선전지의 발간(인민노련)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조직으로의 재조직화
o NL세력이 분리해 나가면서 남은 투쟁동맹그룹은 인민노련을 노동자계급에 대한 정치적 지도를 기본임무로 수행하는 정치조직으로 명확히 규정하려 했다. 인민노련은 궁극적으로 지역 노동자계급의 조직화를 임무로 하는 ‘정치적 구심’으로 그 역할을 규정하였다.
o 1988년 10월 2일 제2차 대의원대회는 인민노련 활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 핵심내용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강령제정 준비를 결정했고 동시에 조직원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사상적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는 방향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는 인민노련이 전위당 건설을 위한 정치조직으로 조직을 재정립할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위해 대회에서는 1988년 10월부터 1989년 9월까지 다음의 네 가지 사업 계획에 집중하기로 했다. 첫째는 노조운동에서의 지도력을 확립하고 대공장 분회를 집중적으로 건설하는 것, 둘째로 조직원의 교양사업을 강화하고 훈련을 체계화하기 위한 정치학교를 설립해 마르크스·레닌의 원전을 학습하고 혁명운동의 전략전술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교양하며 선전가를 배양하는 것, 셋째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치사상 유파를 형성하는 것, 마지막으로 전국노운협, 민중정당,민족민주운동협의회 등과 함께 정치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간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o 이런 전환은 조직원 확보방식과 교육방식에 빠르게 반영되어 나타났다. 1987년 말에는 인민노련이 NL그룹과 분리하면서 정치조직으로 전환하던 초기여서 조직원 가입방식은 오동렬의 경우처럼 인민노련 강령에 대해 동의를 표명하는 것으로 가입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1988년 말경 인민노련에 참여하는 노현기의 경우는 조직체계가 정비되면서 강령을 중심으로 한 정치교육을 집중해서 받아야 했다. 이 시기의 조직 가입기준은 상당히 엄격하여 조직원이 되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예비과정=예비조직원’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예비조직원은 다음 <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자의 길』 등 기관지와 마르크스·레닌의 저작을 학습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해 인식을 하고 그에 기초한 현실 분석능력을 배우는 과정을 거쳤다.
▲ <표 2> 조직원의 사회주의 이념학습 과정 - 치안본부, 「인민노련사건의 전말」, 1989.11.15. 참조 작성. |
특히 인민노련은 조직원의 반수 이상을 노동자 출신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그 때문에 학생출신들은 견습기간이 노동자보다 훨씬 길었다. 그러나 인민노련의 최고 지도부에 노동자들은 없었다. 이를 놓고 보면 노동자들을 우대한다는 의미는 이들의 대중적 지도역량과 대중운동의 경험을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통해 노동현장에 기반을 형성하려던 의도로 파악된다.
o 현장 노동자소모임에서도 정치교육을 시도했다. 예로 아래 <표3>의 00산업(경동산업) 노동자들에게 『공산당 선언』을 학습시킨 것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 <표 3> 00산업의 선진 노동자들과 『공산당 선언』 학습 사례 |
o 지역상담소 활동 ; 상담소는 초기에는 노조지원과 노동조합에 대한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1988년 10월 이후에는 노조간부들의 초보적인 정치의식화를 위한 정치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표4>와 같은 내용의 정치학교는 사회주의에 대한 학습의 입문으로서 노조 실천을 뛰어 넘는 정치적 실천에 대한 안내를 목표로 하였다.
▲ <표 4> 인천 민교연의 정치교육 프로그램 - 인천 민중교육연구소, 『새로운 정치교육』, 1992. |
정치교육은 위의 <표4>에서 알 수 있듯이 4개 강좌 총16회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강좌는 상대적 독립성을 가지고 운영됐다. 강좌시행 이전에 상담소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노동자 상태, 교육 경험, 의식수준에 대해 일차적으로 분석하여 교육과정에 반영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 교육은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총 7회 실시했다.
전국정치 조직화의 시도와 인민노련 탄압사건
o 이와 같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중운동의 성장 속에 인민노련이 조직 내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정치조직으로 전환하기 위한 이론학습을 벌이면서 동시에 대중운동에 적극 개입했다. 이처럼 조직 안팎의 사업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자 인민노련은 전국 조직건설을 위해 조직을 이원화했다. 1989년 여름 주대환, 노회찬, 최봉근, 황광우 등의 지도부가 인민노련을 나가고 오동렬, 윤철호, 정광필 등으로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됐다. 이는 인민노련이 조직활동 방향을 “과학적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전파하는 것, 혁명적 노동자 그룹을 각 지역에 건설·강화하는 것, 전국적 정치신문을 통해 폭로를 조직하는 것, 그리고 이 세 가지 활동의 통일적인 전개야말로 1989년, 독자적인 조직을 창건하는 가장 올바른 접근”이라고 정리한 것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이어 인민노련을 나간 구(舊)지도부는 다른 그룹에서 합류한 유인렬 등과 함께 ‘전국적 정치신문’을 표방한 『사회주의자』를 1989년 8월 25일 창간했다. 「사회주의」 창간을 통해 인민노련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당건설 사업을 일정에 올렸다. 그러나 1989년 10월 인민노련 조직탄압사건이 터지고, 이어 노회찬 등이 검거되면서 「사회주의자」 발간은 4호로 중단되었다.
o 인민노련은 1980년대 전반기부터 인천지역에 형성되었던 정치서클들이 통합하여 노동현장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조직으로 성장했다. 인민노련의 조직관은 레닌의 당건설론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주체역량의 정도에 따라 조직건설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인민노련의 전위당건설론은 여러 정치조직운동의 경험과 세력이 결합하여 지역 차원의 정치조직운동과는 다른 질로 형성된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인민노련 초기에는 대중운동에 집중하였고 대중운동의 발전과 조직역량이 확대되자 이론작업을 통해 기관지를 발간했다. 이런 활동결과 인민노련은 당시 인천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파로 성장했다. 1989년 하반기에는 인민노련과 별도로 다른 운동세력들과 소통하면서 당건설을 시도했다.
4) 지역분산형 정치조직운동과 대중활동(제파PD)
o 1980년대 전반기에 정치이념을 공유한 뒤 그 역량을 여러 지역에 분산하여 독자적으로 전위당건설을 지향하던 정치세력인 제파PD그룹도 1987년 이후 그 활동이 가시화되었다. 다산보임그룹 또는 제파PD그룹은 1980년대 정치조직건설의 흐름인 ‘위로부터의 당건설운동’ 방식과 ‘아래로부터의 당건설’ 방식이 조직 내부에 공존하였고, 그 사이에서 두 방식은 긴장관계를 유발하여 상호갈등을 하면서 분열하거나 통합되기도 했다.
o 이런 제파PD그룹의 특징은 첫째, 정치노선과 조직노선 등을 구체적으로 정립하지 않고 혁명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을 견지한 채 구성원들을 전국의 노동현장으로 존재이전시켰다는 것이다. 둘째, 이 그룹은 당시 사용되던 정치운동의 개념과 다른 그들만의 개념 및 혁명운동의 상을 견지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방식으로 소비에트 혁명과 쿄뮨 혁명의 관계를 고민했고, 대중의 혁명성과 의식성의 관계에 대해 ‘시추론’과 ‘점화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또 당건설운동의 주체형성을 노동현장에 존재 이전하는 In Field와 지역운동의 개념인 Out Field의 개념 등을 통해 접근하려 하였다. 셋째, 수도권과 영남권 등의 지역에서 현장활동을 개척하던 이 그룹은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중운동의 발전 속에서 조직운동방향을 둘러싼 내부 갈등을 지역마다 표출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o 우선 안양PD그룹은 활동가들이 1985년 전후로 안양·군포 등의 노동현장에 진입해 활동을 했고, 그 가운데 해고된 현장활동가들이 1989년 4월부터 9월까지 정치조직건설의 경로 및 필요성을 선전하기 위한 연구활동을 했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의 올바른 당건설 경로에 대하여 : 초안」, 시기와 사안별로 지역 선전물 「메이데이 100주년 기념 한국노동자 대회에 부쳐」, 「현정세의 성격과 민민운동의 과제」, 「경기 남부지역 임투 평가」 등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이 선전물들의 출처는 ‘안양 민주노동자 일동그룹’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런 활동과정 중에 1989년 9월 13일 김학원 등 6명의 선전그룹 성원들이 구속되었다(『서울신문』, 1989.9.13.).
o 다음으로 영남권의 활동은 1985년부터 시작되었다. 부산지역의 경우는 1985년 초 이전팀을 마친 80학번과 81학번 5인이 방직산업을 조직하기 위해 내려갔다. 현장 안착이 이루어질 즈음 부산지역출신자들의 ‘실임그룹’과 연계해 1986년에는 6개월에 걸쳐 지역 선전물 작업을 집중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이어 1987년에는 다산보임 출신의 3인이 합류하였고 다시 여성활동가 3인, 남성활동가 2인이 합류하면서 지역 정치서클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지역활동으로 ‘만판’이라는 문화공간을 만들어 풍물강습 등을 매개로 노동자들과의 연계성을 가져왔고, 1989년 말에는 ‘반실임그룹’과 ‘노동계급’ 등의 여러 정파와 같이 노동단체인 부산노동자교육협회를 결성해 교육활동을 벌이면서, 활동가, 선진적 노동자들의 소모임도 운영했다(홍정이 구술).
o 마지막으로 마산지역의 활동이다. 1985년부터 이전팀을 마친 3인이 마창수출자유공단으로 갔다. 수도권지역이 이미 활동가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6년 3월 다산보임사건의 여파로 이들은 활동을 중지하고 직장에서 퇴사하였다. 이후 6개월 정도 상황을 보다가 재취업했는데, 그중에 1인은 1,700여 명 규모의 사업장인 한국시티즌에 입사했다. 한국시티즌에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시기에 노동자들이 자발적 투쟁과정에서 노조를 결성했는데, 이 그룹의 활동가는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또 다른 활동가들은 지역노조 준비활동을 벌였고, 1인은 마창노련의 선전국장으로 상근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는 인원이 더 이상 충원되지 않아 정치서클을 형성하지는 못했다(이미숙 구술).
o 한편 1986년 3월 25일 사건으로 인해 다산보임그룹의 수도권 조직은 일부 혼란을 겪었다. 이 시기는 NL과 CA의 논쟁이 부상되던 시기여서 일부의 구성원들이 NL, CA로 방향을 수정하여 조직을 떠나기도 했다. 남은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당시 논쟁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거리두기를 하였다. 이들은 현장에서부터 검증된 이론으로 지도력을 형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비상대책위원회 체계를 구축하고 독립된 지역별 조직 활동을 펼쳐 나갔다. 1988년까지는 지역대표자회의라는 소통체계를 갖추고 서울그룹에 정치교육단위를 두어 학생운동을 관리하면서 그룹의 재생산영역을 담당하게 했다. 그 이후 각 지역활동과정에서 여러 균열이 나타났다. 인천과 부천의 대립, 서울 지도부내의 갈등, 1988년 3.25사건 출소자들의 분산 등이 그것이었다. 균열과 갈등의 내용은 그룹의 지도력 형성방향을 둘러싼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당건설방식을 둘러싼 것이었다. 인천지역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8년 들어 인천그룹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1986년 말부터 서강대 학생운동가들이 집단적으로 이 그룹에 합류하면서 조직규모가 확대됐다. 또 노동현장 경험의 축적, 다수의 노동현장 진입 등 조직상황의 변화와 동시에 민주노조운동의 급속한 발전 등이 그 조건이었다. 우선 확대된 인원과 활동력에 맞게 조직구조를 재편하고 지도부를 새로 구성했다. 새로운 지도부는 1986년의 3.25사건 이후 각 지역으로 산개한 다산보임그룹의 조직역량들을 복원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산보임 시기의 이전팀들이 공동으로 학습했던 내용을 총 정리한 ‘113문건’을 만들었다. 다산보임그룹의 사상적 바탕이 되는 내용을 노선으로 정리한 것이라서 각 지역에 분산된 역량을 결집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나타난 반응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지역마다 현장과 지역활동경험을 바탕으로 운동방향에 약간의 차이들이 생긴 것이었다. 그 와중에 성수동과 안양지역 그룹이 조직탄압 사건으로 다수가 구속되면서 논의는 중단되었다.
논쟁은 인천그룹 내부에서 일어났다. 쟁점은 조직활동의 방향과 조직구도를 둘러싼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지도부 구성을 이론지도부와 실천 지도부를 분리하고 이론적 영역에서 그동안 축적된 내용을 바탕으로 변혁론을 정리하여 사상적 결합을 높여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맞서 현장 중심적 경향을 띤 활동가들은 운동의 과제가 현장의 일상활동과 투쟁에서 정치활동을 결합하는 것이라는 판단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통합지도부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이훈구 구술). 후자를 주장하던 세력들은 주로 부천지역에서 활동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전자의 경우는 현장 경험 없이 바로 지역조직에서 선전활동과 조직활동을 담당하던 이들이었다. 조직 분리로 부천 지역은 독자활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부평과 주안지구를 기반으로 한 세력은 이론지도부와 실천지도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인천그룹의 논쟁도 조직지도력의 형성방식을 둘러싸고 나타났지만, 이는 당건설방향에 대한 것으로 1989년 서울PD그룹의 논쟁과 유사했다. 전자의 주장은 그동안 견지되었던 현장 중심의 전위당건설 지향이라는 기조에 대해 사상적 통일성을 통한 ‘위로부터의 당건설’을 주장한 것이었고, 후자의 주장은 여전히 노동현장을 통해 검증된 지도력과 대중운동 속에서의 당건설의 토대형성을 주장한 것이었다(이훈구 구술). 특히 노동현장에서 투쟁경험을 한 후자의 조직원들이 현장활동 경험이 없던 전자의 조직원들의 주장에 대한 불신이 컸던 것도 소통을 어렵게 하였다. 실제 위의 두 주장은 조직분리로 내달을 문제라기보다는 노동운동에서 항상적으로 내재된 문제인 당건설 방식의 차이, 즉 대중성과 의식성의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기에, 오히려 그 차이의 긴장성을 유지한 채 상호결합하여 조직운동의 질을 높여나가도록 했어야 했다.
결국 조직분열의 책임을 지고 부평·주안 지역의 지도부는 사퇴했다. 지도부 사퇴에는 ‘113문건’을 매개로 각 지역의 제파PD그룹들을 통일하려 했던 시도가 실패한 것도 영향을 주었다. 새로 구성된 지도부는 대중운동에 천착하는 조직운동을 다시 벌여나갔다.
3. 변혁적 노동운동의 이념적 분화와 그 역사적 의의
1) 이념적 분화
o 1987년 6월 민중항쟁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 가능성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성장 등으로 정치조직들 간에는 변화가 나타났다. 거기에 인민노련, 삼민동맹, 안양PD, 노동계급, 사노맹 등의 정치조직들이 1989년 하반기부터 집중적인 조직탄압을 받으면서 1990년 들어서 그 변화는 두드러졌다.
그 결과 위의 [그림1]에서 알 수 있듯이 인민노련을 중심으로 삼민동맹, 노동계급, 안산노련이 1991년 6월 11일 통합에 합의하고 1991년 7월 한사노당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적 정치조직 건설을 시도했다.6 인민노련을 통해 참여 제안을 받았던 사노맹은 이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제파PD그룹도 그와 같은 당건설방식에는 비판적이었다. 이 그룹은 대중실천을 통해 검증된 이론을 중심으로 한 사상투쟁과정을 거쳐 당건설을 추진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사노당이 추진하는 정치조직 간의 통합방식에 대해 반대했다. 이에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제파PD그룹이 결집하여 노동계급의 소수파 등과 같이 ‘반(反) 한사노당’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공동대응을 모색했다. 그러나 1991년 제파PD조직사건으로 이 움직임은 중단됐다.
o 이 과정에서 일어난 1991년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변혁적 노동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이념적 혼란은 외부로부터 갑자기 온 것이었기 때문에 파장이 더욱 컸다. 이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타났다.
o 우선 제파PD그룹의 경우처럼 현실사회주의의 존재에 의지하기보다는 한국의 현실에 착목하여 실천을 통한 이론을 정립하려던 경향들은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또 NL세력인 주체사상파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이념적 기반을 주체사상에 두고 있고 그 현실적 근거를 북한 사회주의체제에 두면서, 소련식 사회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주체사상파인 일동그룹의 성원들은 인노련 해체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에 대한 교조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독자적 노선정립을 시도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대해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o 그러나 인민노련을 비롯하여 여러 정치조직의 활동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특히 인민노련은 사회주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노선 전환에 착수했다. 비합법적 전위정당건설의 어려움과 합법정당노선으로 전환을 주장하는 「노동자정당건설 전략에 대해 재고를 요청함」이라는 문건을 통해 이른바 ‘신노선’이 제출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7 창준위에서도 정당건설 경로를 놓고 논의한 결과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하고 합법정당 결성으로 빠르게 전환을 시도하여 1991년 12월 15일 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이하 ‘노정추’)를 결성하였다. 이어 1992년 한국노동당(가칭)을 창당하려했다.8 이런 합법영역으로의 전환시도는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역사적 사건이 결정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운동의 발전과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활동방식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영향을 주었다. 거기에 한국자본주의가 발전되면서 개량화의 물적 토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판단 등이 작용했다.
이러한 한국노동당의 출범에 대해 전국노운협(특히 경수노련)은 “대중의 광범한 투쟁보다는 선거에서의 득표율을 기반으로 정치세력화를 이루려는 방식”이라고 규정하면서 “추진방식도 음모적이고 비대중적 활동방식이라서 운동의 분열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거기에 한국노동당이 탄압받는 과정에서 일어난 ‘탄원서 사건’은 당시 노동운동 세력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9 한사노당 관련자들이 “사회주의 이념의 포기, 폭력혁명 포기, 프롤레타리아 독재폐기, 계급정당 포기” 등의 내용을 담은 「탄원서」를 정권에게 제출한 것이었다. 급조된 합법정당 추진도 논란을 일으켰지만 조직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정권에게 투항했다는 것에 대해 한국노동당(가)의 안팎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o 이와 같은 합법정당 추진의 움직임은 대중운동과 결합하고 있던 전국노운협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국노운협은 각 정치세력들이 공동실천을 하는 상설투쟁체로서 1988년 이후 민주노조운동과의 밀착되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 전국노운협에서 일부는 합법정당운동을 주장했고 그와 대립된 세력들은 상설투쟁체나 선진노동자조직을 주장했다. 결국 경수노련 등 일부가 잔류했고 분리해 나온 세력은 다시 분화하여 일부는 합법정당추진세력으로, 다른 일부는 전국노동운동단체연합으로 결집하였다. 전국노운협의 분열로 변혁적 노동운동의 대중운동에 대한 결합력은 약화되었다.
o 한편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세력도 이념지형의 변화, 정치정세의 변화, 민주노조운동의 변화 등에 대응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면 조직탄압사건으로 그 활동이 위축된 것도 있었지만, 변혁지향성이라는 이념만을 견지한 채 직접적인 정치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o 이처럼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가능성, 조직탄압사건, 특히 1991년 현실사회주의권 붕괴를 계기로 이념적으로 분화되었고, 정치세력화의 방식 역시 분화되었다. 사회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포기세력, 전위정당 추진과 합법정당 추신세력 등으로 분화되었으며, 전위정당 추진세력은 잠복하였고 합법정당 세력은 실패로 끝났다.
2) 변혁적 노동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역사적 의의
(1)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성격을 벗어나 사회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이념을 복원시켰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과제로 제기했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즉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은 정권의 폭압적 탄압 속에서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결합하기 위해 분투했던 실험의 시대였다.
(2) 대중운동의 침체 속에서 일어난 구로동파는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가들의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정치투쟁의 가능성을 열었다. 구로동파 이후 등장한 변혁적 노동운동세력은 노동운동의 목적을 노동조건개선과 노동자권리확보 차원에서 국가권력과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나아가 변혁적 노동운동은 노동자계급이 정치의 대상이 아닌 정치 주체라는 것을 제기했고, 노동자 대중운동과 결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추상적인 범주에서 추구했던 ‘인간다운 삶’을 넘어, ‘노동자·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의 건설이라는 대중적 이념을 제시했다.
한편 변혁적 노동운동은 당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지 못했다. 노동운동은 민주주의의 문제와 변혁운동과의 관계설정을 둘러싸고 대립·갈등했고, 1987년 6월 민중항쟁 이후 형성된 정치국면을 주도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은 민중의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변혁이념을 한국사회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특히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노동현장에서의 민주주의 문제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내용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기했다. 이처럼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을 지렛대 삼아 발전한 민주노조운동은 ‘노동해방’, ‘평등사회’라는 가치를 대중적 요구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에 제한되었던 것에서 나아가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계급 삶의 질과 분배문제, 나아가 생산과정과 경제구조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주주의의 내용과 그 질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한계
(1) 우선 초기 정치조직운동에서는 사상적 기반과 주체역량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치조직을 건설하려는 ‘조급성과 관념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치조직을 이념과 노선만을 가지고 형성하려 했다. 그 예로 제헌의회그룹은 ‘의식성과 자생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 이해를 달리하면서 의식성을 굴절시켜 학습으로 훈련된 자임하는 ‘전위’를 양성해서 전위조직건설을 시도하면서, 현실과 괴리된 관념적이고 비대중적인 양상을 드러냈다. 이런 조직운동의 방식은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 선전그룹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조직들에게는 하나의 편향으로 관통되고 있었다.
(2) 다음으로 변혁적 노동운동은 정치조직 ‘내부의 정치’의 한계를 보였다. 1980년대 정치조직들은 상호 대립·갈등할 뿐만 아니라 정치조직 내부에서도 갈등과 분열을 겪기도 하였다. 그 예로 서노련은 1986년 임투 이후 선도적 정치투쟁에 대한 비판 등을 제기하였지만, 지도부는 일방적으로 봉합하여 무마하려다가 조직해체로 귀결됐고, 제헌의회그룹은 조직탄압사건 이후 재건된 노해동에서 정치노선과 정세, 조직운동방향을 둘러싸고 조직을 담당하던 세력과 편집부가 대립하여 결국 조직이 분열되었다. 제파PD그룹도 조직의 지도력 형성방식을 둘러싸고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서울그룹은 지도부의 교체로, 인천그룹은 조직분열로 나타났다. 초기 인민노련 역시 NL세력과 비NL세력이 결합하여 조직을 결성했다가 3개월 만에 노선 차이로 분립했다.
이러한 정치조직 내부에서 대립하던 쟁점들은 조직분열의 근거가 되어 새로운 정치조직을 형성하는 근거로 작용했고, 정치조직 내적으로는 조직의 지도력을 형성하는 기제로 작동된 측면도 있었다. 일부의 정치조직들은 조직의 지도력을 형성하거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에 있어서 ‘아(我)와 타(他)’의 구별을 통한 다른 조직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이는 탄압 상황 속에서 조직 보위와 규율의 강제를 통해서 가능했다. 그 결과 조직운영의 원칙인 민주집중제에서 ‘민주’보다는 ‘집중’에 치우친 운영이 되었고, 그 조차 조직의 수직적 운영으로 인해 일면 조직원이 대상화되기도 했다. 그리고 심지어 지도력의 수직적 권위는 대중활동까지 굴절시키기도 했다.
(3) 또한 변혁적 노동운동은 ‘정치조직 간의 정치’의 한계를 드러냈다. 즉 정치조직 간에는 자신들의 이론과 노선의 타당성을 실천 속에서 검증해내려기 보다는, 실천적 경험을 담보하지 않는 ‘논쟁’의 영역에서 우열을 가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결과 다른 정치이론과 정치세력을 배타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공동실천 또는 상호검증의 구조를 모색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이는 심지어 다른 정치조직의 존재를 부정하는 모습으로까지 나타났다. 그 결과 정치조직 간의 다양한 실천경험이 공동의 자산으로 축적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4) 이러한 정치조직운동의 형성과정, 정치조직 내부의 정치, 정치조직 간의 정치에서 나타나는 한계는 정권의 일상적인 감시와 탄압이라는 조건에 의해 규정된 면도 있었다. 정권은 일상적인 감시를 하다가 주로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점, 해당 정치조직이 선전서클 차원에서 대중적 선동차원으로 전환되어지는 과정 등에서 정치조직을 탄압하는 양상을 보였다. 우선 집중적 조직탄압 사건이 1985년 대우자동차투쟁과 구로동파로 대중운동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1986년 5.3인천항쟁으로 노동·민중운동이 개헌국면에 개입하는 시점에서 일어났다. 이 시기는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상황이었다. 이때 일어난 조직탄압사건은 다산보임사건, 서노련사건, 반제동맹당 사건, 마르크스-레닌당사건, 제헌의회그룹 사건, 남노련사건 등이었다. 당시 조직체계를 갖추면서 대중운동을 발돋움하려는 조직들이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그 결과 탄압받은 정치조직들은 그 활동이 위축되거나 해체되었다.
이후 다시 집중된 조직탄압사건은 1989년 전후로 일어났다. 1987년 6월 민중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대중운동이 발전하였던 이 시기에는 지역차원의 조직결성에서 나아가 전국조직 결성을 목전에 두고 다양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조직건설에 정치조직들이 직·간접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이에 정권은 노동운동에 대한 대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9년부터 인민노련사건, 삼민동맹사건, 노동계급사건, 인노회사건, 안양 제파PD사건, 1990년부터 지속된 사노맹사건, 1991년 제파PD그룹 사건과 한사노당사건 등이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전체적으로 주요 정치조직들이 대거 탄압을 받은 것이다. 그 결과 정치조직들이 해체되거나 그 활동이 침체됐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조직탄압사건은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다수의 정치조직들이 와해·침체되면서 각 정치조직들에게 형성된 경험들이 축적되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결국 정권의 조직탄압은 정치조직운동의 다기한 경험들이 축적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는 데 제약조건으로 작용하였다.
(5) 또한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의 한계는 역사적 경험의 단절과 반공이념 이외에는 발붙이지 못했던 사회적 상황, 민중을 학살한 정권을 전복해야한다는 긴박성, 그리고 그 정권의 항상적인 감시와 탄압이 가해지는 시대 상황 속에 규정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조건에 의해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은 사상적 기반이 척박한 속에서 마르크스 이념, 러시아의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의 존재를 그 자체로 혁명의 무기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사회주의 이념에 천착하여 혁명운동의 방식을 한국의 상황과 주체적인 경험의 축적 속에서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천착하지 못했다. 이를 반영하는 가장 중심적인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즉 전위당건설을 둘러싼 문제였다. 당시 변혁적 노동운동 세력은 전위당건설을 중심의 문제로 설정했고 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1985년 전후로 보급되기 시작한 레닌의 조직과 혁명에 대한 저작물들이었다.
이런 문제는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세력이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시키면 그 밖의 문제는 변혁된 사회구조 속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 속에 머물러 그 이상의 대안을 찾지 못했던 것과도 연관되었다. 이들에게는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한 이후 건설될 사회주의 사회의 구체적이 상과 그 운영원리에 대한 고민과 모색이 부재했다. 노동자계급이 혁명운동 과정에서 투쟁의 주체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건설의 주체가 되기 위한 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으나 이들은 ‘주체 형성’의 실질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천착하지 못한 것이다. ‘주체형성’ 문제는 전위당건설을 목표로 한 정치조직운동으로 대체되었고 대중운동은 지도와 견인이 대상화된 측면이 있었다. 이는 정치세력 간의 경쟁구조 속에서 더 강화된 측면도 있었다. 그 결과 정치조직들이 전위당건설을 통해 혁명의 담지자로 설정되었고, 이로써 노동자계급이 변혁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간과되기도 했다. 또한 변혁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중심성만을 강조했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뛰어넘는 제반 사회관계에서 표출되는 문제들에 대한 개입, 또 그 문제해결의 주체들과의 연대관계를 형성하는데 한계를 드러냈다. 즉, 이들은 일면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 계급이기주의로 변질시켰고, 다른 계급·계층과의 연대와 공동실천 속에서 그 중심성을 확보하는 것에도 한계를 보였다
o 이처럼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은 대중운동과의 결합 관계를 높여나가던 과정에서 외적 충격과 탄압으로 인해 운동이념과 활동을 급속히 청산하거나 잠복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짧은’ 시간 내에 변혁 이념으로 무장해야 했지만 그것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새로운 환경이 전개됐다.
여러 한계 속에서도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과제를 남겼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운동과 분리된 정치조직운동은 존립할 수 없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이는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이 건설될 사회운영의 원리, 그리고 그 주체형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정치’를 재사유할 것을 제기하고 있다.
* 각주
1)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유경순, 2015, 봄날의박씨) 1권 2부에서 관련 내용 요약한 것입니다. 내용에서 필요한 각주이외 참고자료 관련 각주는 생략했습니다.
2) 학생운동에서 NLPDR노선이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로 반미의식의 형성, 민족공동체에 대한 강한 유대감 및 민족을 신성시하는 도덕적 감정과의 연계, 유물론적 사고에 비해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강조하는 사상의 특징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민족 우선의 관점 및 운동가의 품성과 정서를 중요시하고 대중성을 강조한 것이 1985년 이후 학생운동의 대중화된 상황과 맞물렸다는 주장이 있다(이수인, 「대립성의 경합과 일면성의 확산 : 1980년대 학생운동」, 『사회와 역사』 77집, 2008, 258~261쪽).
3)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외, 앞의 책, 195쪽.
4)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전 민중에 대한 정치·사상적 지도를 확고히 보장하며 조직 자체가 이러한 올바른 사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둘째는 광범한 대중 기반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을 포함한 각계급과 계층 속에 광범한 대중조직을 건설하고 이를 단일한 통일전선으로 결집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는 정치사상적으로도 무장되어 조직 실천적으로도 훈련된 활동가들을 충분히 배출해내야 된다.
5) 『자본』Ⅰ-1, 2, 3권(이론과실천사, 1987), 『공산당선언』(청년사, 백산서당, 1988),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돌베게, 1989), 『레닌저작집』 1(전진, 1988), 『레닌의 선거와 의회전술』Ⅰ, Ⅱ(백두, 1989), 『무엇을 할 것인가』(백두, 1988),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제국주의론』 등이 출판되었다(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2, 역사비평사, 1992, 164쪽, 176쪽).
6) 이 모임에는 인민노련의 주대환, 황광우, 삼민동맹의 이용선, 유병진, 안산노련의 전성, 노동계급의 이상민, 최정식, 서울의 윤영상(노동계급), 부천의 이영이, 안양의 안명균(삼민), 대구의 민영창, 광주의 조진태, 구미의 조근래, 울산의 신지호, 수원의 김종관, 마창의 한승주, 부산의 이상귀, 안산의 강영식 등 3개 정파와 11개의 지역대표가 참석하였다(『주대환 공소장』).
7) 신노선은 정통적인 사회주의 노선의 폐기 및 마르크스-레닌이즘에 입각한 혁명적 노선을 폐기하는 대신 합법적인 의회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다. 즉 신노선은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 포기하는 대신 민중의 중심성에 기반하는 정치운동을 주장하였다(주대환, 『진보정치의 논리』, 현장문학사, 1994, 52~71쪽).
8)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는 1991년 12월 3일자로 해체된 조직이다」, 1992. 1.18.
9) 1991년 1월 17일 추진위원장 주대환, 조직부장 전성, 대외협력부장 이용선, 총무부장 민영창을 강제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