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민주주의’라는 마지막 수수께끼

[기고] 가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와 싸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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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말기부터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정치계와 학계의 주요 담론 가운데 하나였다. 1987년 대규모의 민주화 투쟁 이후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데 대한 이견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토록 힘들게 투쟁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노동자 서민들의 삶은 여전히 너무나도 어렵다는 데 있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빚어낸 문제에 대한 진단은 저마다 달랐다. 혹자는 정당 정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혹자는 정권들이 맹목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추종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우리가 믿었던 ‘민주주의’에 대해 묻기

2008년 여름, 20여 년 만에 시민들이 광장을 메웠다. 거리의 광장에서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가상의 광장에서까지, ‘독재 타도, 민주 수호’라는 낯익은 구호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2009년 여름, 이른바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교수들과 작가들, 만화가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의 시국선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 지 20여 년 만에, ‘민주주의’는 다시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과연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민주주의’가 이 땅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민주주의’라고 믿어왔던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동화작가 임정자가 2009년 2월에 출간한『마지막 수수께끼』는 ‘민주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다. 작가가 2005년 1월에 출간한『물이, 길 떠나는 아이』가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라면,『마지막 수수께끼』는 ‘민주주의’에 대한 은유이다. 앞서 말한 작품들의 출간 시기를 잘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2005년이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날로 심해져서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해였다면, 2009년은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수께끼』의 공간적 배경은 ‘신성한 검의 나라’이다. 어느 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대통령 선거가 12월에 실시된다는 점을 상기할 것), 신성한 검의 나라 임금이 세상을 떠난다. 몸집이 집채만 하고 황금 털을 가진 호랑이인 산왕은, 언제나 그랬듯이 신성한 산에서 내려와 신검을 거두어갔다.

신성한 검의 나라에서는 오랜 전통에 따라, 신산에 올라 산왕이 내는 세 가지 수수께끼에 모두 정확히 답하는 자에게 신검이 주어진다. 만약 산왕이 내는 수수께끼에 하나라도 틀린 답을 하게 되면, 산왕은 그 자리에서 그를 삼킨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은유이다. 권력을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권력에 대한 책임 역시 결코 가벼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품 좋은 대통령이라면 잘 살 수 있을까

  <마지막 수수께끼>, 임정자, 해와나무, 2009
그때 임금이 되고 싶어 안달 난 자 가운데 하나인 ‘불라’가 오랜 준비 끝에 산왕을 찾아간다. 불라는 두 가지 질문에는 정확히 답을 하지만, 마지막 수수께끼에서 틀린 답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산왕은 그를 삼키려 하는데, 불라가 옷자락에 감추어 온 칼을 산왕의 목에 던진다. 칼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었고, 산왕은 숨을 거둔다. 불라는 재빨리 신검을 들고 산을 내려가서 임금이 된다.

임금이 될 자격이 없는 자가 임금이 되었으니 나라가 평안할 리 만무하다. 어느 날 갑자기 신검이 사라지고, 백성들의 원성은 나날이 높아만 갔다. 기어이 백성들은 횃불을 들고 궁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불라는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그들을 억누르려고만 한다. 불라가 어떤 자와 참 비슷하다고? 내 생각도 그렇다.

불라는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하여 세따미의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데, 세따미가 신검을 찾아올 테니 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세따미의 흥미진진한 모험이 시작된다. 세따미는 여성 영웅설화 속의 주인공처럼 “배고픔도 꾹 참고, 졸음도 견뎌 가며 쉬지 않고 걸”어서 “열두 마을 지나고, 열두 산을 넘어가고, 열한 강을 건너”며, 넘을수록 높아지는 아홉 고개까지 넘는다. 이 대목에서 작품의 주요 독자층인 저학년 독자들은 옛이야기를 읽는 듯한 흥미를 느낄 수 있겠다.

세따미는 신검을 얻기 위하여 호랑이와 결혼하여 삼척이를 낳는다. 이종결합은 옛이야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요소인데, 특히 여성 영웅설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결합은 인간과 자연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이 자연과 대립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옛이야기의 건강한 세계관 가운데 하나이다. 자본주의에 의한 생태위기가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를 위협하는 오늘날,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세계관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결국 세따미는 삼척이와 함께 산왕을 만나 신검을 얻고, 불라는 죽음을 맞이한다. 작품의 결말에서 신검은 사라진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모두의 것이 되었다고 해야 하겠다. 이러한 설정은 매우 의미심장한 정치적 은유이다.

악당 불라에 비해 훨씬 선한 인물인 여성 영웅 세따미가 임금이 되면, 신성한 검의 나라는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될까? 우리는 ‘민주주의’를 논할 때, 흔히 대통령 개인의 성품이나 자질을 문제 삼고는 한다. 물론 성품이나 자질이 더 나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성품이나 자질이 더 나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만 하면, 이 나라는 모두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왜 ‘민주주의’를 지켜야 되는데?

어쩌면 지금의 이 ‘민주주의’라는 것은, 우리를 정치의 주인이 아닌 관람자의 역할에 머무르게 하는 강력한 억압 장치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억압 장치가 아닌 매우 ‘민주적’인 제도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별다른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하게 하고 있다. 생존권을 요구하던 시민 다섯 명이 희생당해도, 노동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의약품조차 제공받지 못한 채 위험천만한 도장 공장에 고립되어 있어도, 오히려 그들을 폭도나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것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금의 지배자들이다.

우리는 미디어악법 날치기 처리를 ‘반민주적’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자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처리된 것이다. 그 법안의 통과 절차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더욱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도대체 왜, 대다수의 시민들이 반대하는 법안이 통과되고 실시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을 정말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민주주의’를 우리가 수호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혹시 지금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타도해야 할 적이 아닐까?

미디어악법 처리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던데, 도대체 왜, 사회의 공기라는 언론의 운명이 우리가 선출하지도 않은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과연 ‘법’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 편이기는 한 것일까? 애초에 지금의 ‘헌법’을 만든 자들이 누구이던가? 그것이 우리를 위해 작동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태도가 아닐까?

표를 차지한 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과 신검을 차지한 자가 임금이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실질적 민주주의’인 것이다. 도대체 왜, 우리의 뜻을 대변한다는 자들이 우리의 뜻과 정반대의 결정을 내리는가? ‘정치’라는 것이 우리가 아닌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정말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한’ 민주주의는 ‘대리주의’를 넘어 모든 노동자 서민이 정치적으로 자기조직화하는 것, 그리고 모든 권력이 ‘진정으로’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용산 촛불방송국 '레아'에 '우리는 힘들지 않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마성은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면 ‘민주주의’라 부르지 말자

2009년 여름, 의회는 더 이상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야당 의원들의 총사퇴 여부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다. 1871년 파리 코뮨처럼, 1894년(갑오년) 농민 집강소처럼, 노동자 서민의 뜻을 직접 반영할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 기구들이 사회 곳곳에서 생겨나야 한다. 투표에 참여하는 것 이외에는 ‘정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민주주의’를 단호히 거부하자.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그것을 더 이상 ‘민주주의’라 불러서는 안 된다.

또한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지를 분명히 하자. 지금까지의 ‘민주주의’는 ‘가진 자들을 위한 민주주의’였다. 지금까지의 ‘민주주의’는 대다수 노동자 서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 가진 자들의 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존재했다. 또한 ‘법’과 ‘공권력’ 역시 우리의 편이 아닌, 가진 자들의 무기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자 서민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일자리 걱정, 집 걱정, 자녀 교육 걱정, 병원비 걱정에 시달리게 하는 ‘민주주의’도 더 이상 ‘민주주의’라 부르지 말자.

2009년 7월 24일, 더작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책 작가모임)에서 ‘용산에서 함께 하는 1박 2일’이라는 이름으로 밤샘 문화제를 벌였다. 더작가는 점잖게 무게 잡으며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자들과는 다른 차원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 땅 ‘민주주의’의 가증스러운 실체를 보여준 용산 학살에 집중하며, ‘민주주의’라 불리고 있는 적과 진지전을 벌이고 있다.

어린이 독자를 상대로 한 처세서, 자기계발서 등이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가 아직 내일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아도 좋은 이유는, 여전히 더작가와 같은 어린이책 작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지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적은, 싸울 의지조차 꺾어버리는 형편없는 정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적은, ‘용산’에서 ‘평택’에서, 노동자 서민을 학살하고도 오히려 희생자들을 폭도 혹은 테러리스트라 부르는 ‘민주주의’다. 용산 참사 현장 바로 뒤, 촛불방송국 <레아>에 걸려 있는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우린 힘들지 않다!”

더운 여름, 자녀들이나 조카들과 함께 흥미진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동화책『마지막 수수께끼』를 읽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그리고 아무리 더워도 지치지 말고, 아무리 역겨워도 외면하지 말자. “배고픔도 꾹 참고, 졸음도 견뎌 가며 쉬지 않고 걸”어서 “열두 마을 지나고, 열두 산을 넘어가고, 열한 강을 건너”며, 넘을수록 높아지는 아홉 고개까지 넘어 아버지를 살린 세따미를 생각하자. 그렇게 지치지 말고 싸워서 나 자신을,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살려내도록 하자. 우린 힘들지 않다!
덧붙이는 말

마성은 님은 인하대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 참! 잘 읽었어요!

    내용이 맑아요.
    아주 잘 읽었습니다~!^^

  • ㅋㅋㅋ

    광주 코뮌, 용산 코뮌, 평택 코뮌, 대추리 코뮌 ...이런 식으로 코뮌을 만들고 이것을 전국적으로 조직한다 투표는 나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권력을 박탈당하는 것일 뿐이다

  • 냉이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물이..>>가 보여주는 은유에 대해서도 언젠가 듣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