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이 지지했던 사람은 손학규였고, 손학규가 대선 후보가 되지 못하자 그는 정동영을 지지했었다. 이명박이 아니라 손학규나 정동영이었다는 것이 뭐가 그리 다른가? 손학규나 정동영이 아니라 문국현이나 유시민이었다면 또 뭐가 그리 다른가?
황석영은 이명박 정부가 ‘중도’이며 ‘실용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명박 정부가 ‘중도’도 아니고 ‘실용적’이지도 않다고 말한다. 특히 이명박을 비난하며 김대중과 노무현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반동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이야말로 ‘중도’였으며 ‘실용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좌파는 물론이고 우파가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이도 저도 아닌 ‘중도’임에 분명하다. 또한 ‘녹색’이라는 진보적 수사이든지 ‘성장’이라는 보수적 수사이든지, 그저 돈만 된다면 다 가져다 붙이는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 것으로 보아 ‘실용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태도에 있어서 이명박-박근혜와 노무현-유시민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명박 정부가 ‘중도’도 아니고 ‘실용적’이지도 않다는 주장의 밑바탕에는, ‘중도’라는 것이 그리고 ‘실용적’이라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중도’라는 것과 ‘실용적’이라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사실은 ‘중도’와 ‘실용적’이라는 것이야말로 정말 나쁜 것이며, 우리 모두가 조심하고 멀리 해야 할 것들이다. ‘중도’라는 것은 ‘우파’보다 위험한 것이며, ‘실용적’이라는 것은 ‘보수적’이라는 것보다 천박한 것일 뿐이다.
‘중도’와 ‘실용’은 결코 자본주의를 문제 삼지 않거나,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중도’와 ‘실용’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지적에, “맞는 말이지만” 하는 반응을 나타내 보인다. “맞는 말이지”에서 끝나면 되는데, “만”이라는 글자가 따라 붙는 것이 문제다. 문제를 알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미 그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서, 그 문제가 해결된 상황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익숙한 것을 편하게 느끼게 마련이다. 또한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낯선 것은 불안하게 마련이다. 낯섦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두려움을 낳는다. 누구도 자본주의 체제가 훌륭한 체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한 낯선 세계를 두려워할 뿐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각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자들이 그 이전 체제의 지배자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방법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역시 어마어마한 진통을 겪고 태어난 체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본주의 바로 이전의 체제, 즉 중세 체제는 결코 쉽게 극복될 수 있는 체제가 아니었다. 중세의 지배자들에게는 엄격한 도덕성과 예의범절이 요구되었다. 지배당했던 이들은 그들의 지배자들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배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지배자들은 얼마나 한심한 존재들인가. 오늘날 지배자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무엇보다도 강조해야 할 것은 중세의 지배자들의 권위가 종교를 통해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중세를 극복하고자 했던 이들은 신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지배자들의 권위는 겨우 화폐를 통해 보장된다. 생각해 보라.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는 신을 부정하는 것이 어렵겠는가, 교환의 도구에 불과한 화폐라는 종이를 부정하는 것이 어렵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우주의 질서를 주관하는 신을 부정했고, 그 신이 보장했던 지배자들의 권위를 무너뜨렸다. 절대로 극복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중세는 그렇게 극복되었다. 중세의 암흑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계몽이었고, 칸트는 계몽이란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라고 말했다. 그 용기가 신을 무너뜨리고 중세를 극복해낸 것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중세를 극복하려 했던 이들은 신을 죽여야 했지만, 오늘날 신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늘날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화폐라고 부르는 너절한 종이일 뿐이다. 자신들을 만들어냈다고 믿었던 신도 부정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종이를 부정하지 못하는 현실이 우습지 않은가? 사람이 종이에 지배당하는 현실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탈근대주의자들은 계몽을 해체하려 하지만, 계몽은 아직 미완의 기획이다. 정작 해체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노벨상을 받을 만한 문호라고 추켜올렸던 한 소설가의 권위일 뿐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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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은 님은 인하대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