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청년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광주시 양동 철물공장에서 일했다. 공장 일을 하면서 쇠파이프로 사제총과 총알 만드는 솜씨를 익혔다고 한다. 그는 날쌔고 탄탄한 몸놀림으로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사건 직후 도주하였다가 서울에서 검거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980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영화 같은 이 이야기는 1977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고, 무등산 타잔의 이름은 박흥숙이다.
박흥숙의 최후진술을 보자.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마을사람들을 개 취급했다. 집을 부숴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오갈 데 없는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렀다. 돈이나 천장에 꽂아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도 깡그리 타버렸다. 이처럼 당국에서까지 천대와 멸시를 받아야 하는 우리들인데 누가 달갑게 방 한 칸 내줄 수 있겠는가?”
최후진술은 지금 다시 봐도 심금을 울린다.
“옛말에도 있듯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살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80년대 들어 도시빈민의 희생이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전두환 군부독재는 정권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국제적인 행사를 많이 개최했다. 87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전국적인 철거와 재개발 붐이 일었다.
상계동 철거투쟁은 특히 많은 일화를 남겼다. 한 분을 더 소개하자면 철거민 이치호 씨다.
1986년 6월 26일 당시 59세였던 이치호 씨는 사망 당시 철거대상인 집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밑에 사람이 있다” 고 소리치는 옆집 아줌마의 말도 개의치 않고 철거깡패들은 건물 지붕부터 마구잡이로 부수기 시작했다. 벽이 무너지면서 벽돌과 시멘트가 쏟아졌고, 더미에 깔린 이치호 씨는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고막이 터지고, 얼굴이 깨져 피투성이가 되어 스러졌다.
철거반원들은 사람이 죽든 말든 옆집으로 옮겨 작업을 계속했다. 주민들은 그를 경희의료원으로 옮겨 입원시켰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환자를 동부의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무의탁자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립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을 전전하던 이치호 씨는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
이 나라의 도시빈민들은 사회의 밑바닥에서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인정받지 못하고 암혹한 시절을 살았다. 그들은 희생을 통해서야 비로소 일시적으로 사회적 각성과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은 투쟁의 고비고비마다 희망과 용기를 주었고, 단결과 연대의 구심을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투쟁이 밑거름이 되어 다음 해인 1987년 철거민으로 구성된 자생적인 조직 ‘서울시철거민협의회’가 탄생할 수 있었다.
다음은 노점상들의 가슴에 깊게 각인되어 있는 이재식 씨를 소개하려 한다.
이재식 씨는 나이 37세였던 1985년에 ‘성흥사’에 입사하여 ‘노동조합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노조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모두들 기억하듯이 1987년은 노동자 투쟁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해 9월 한국의장에 재취업했더 이재식 씨는 다음 해인 1988년 5월 노조결성을 추진했다.
그러나 조합 활동 감시와 해고 위협으로 현장노동자 생활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는 한겨레신문 거제지국 총무를. 낮에는 노점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그의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근처의 대우조선 노동자의 파업이 전개되자 동지들을 규합해 농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재식 씨는 고향 충북에서 삶터를 찾아 거제로 들어와 성실히 살려고 노력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밝게 웃으며 가난을 표내지 않았다. 주변의 인간관계도 원만하여 항상 사람이 들끓었다. 그는 타고난 활동가이자 노동자이며 노점상이었다.
하지만 몇 십만 원이나 밑천을 들여 차린 노점 좌판은 몇 푼 모아보지도 못한 채 뒤집히기 일쑤였다.
1989년 10월 16일 신현읍 개발과장을 반장으로 한 거제시 노점단속반이 농촌지도소 앞 호떡 손수레를 끌고 가버렸다. 부인인 황귀남 씨가 이에 항의를 하였다. 밀가루 반죽을 오토바이에 싣고 온 남편 이재식 씨는 통사정을 했다. 읍장은 뒤늦게 나타나 콧방귀만 뀌며 무책임한 태도로 비웃었다.
죽음의 시작은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자존심이 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고 유린당하는 슬픔, 그것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12시 40분 경 이재식 씨는 조용히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불을 댕겼다. 이를 본 직원들이 멍하니 보는 사이에 3도에 이르는 치명적인 화상을 입었다.
거제 기독병원, 마산 고려병원, 부산대병원 등을 찾아갔으나 모두 진료를 포기했다. 영도의 해동병원에서 생사를 헤매다 12월 12일 새벽 12시 40분에 운명했다. 서울에서 경기에서 그리고 지방에서 그 소식을 듣고 노점상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80년대 수많은 노점상들의 투쟁이 있었지만, 노점상의 가장 성공적인 연대와 투쟁의 순간이었다.
모두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2009년 새해 벽두... 거리는 온통 공사판으로 난장판으로 뒤바뀌었다. 서울의 재개발 재건축, 그리고 이모든 것을 압도하는 뉴타운 사업들이 현란하다. 우리가 뛰어놀던 골목길은 자고나면 헐리고 자고나면 새 빌딩과 아파트로 빼곡히 들어찼다. 누군가는 들어오고 또 누군가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다. 서울 사람들은 고향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한때 서울 어딘가에 집 한 채 갖고 있던 사람들은 이게 좋은 것인 줄 알았다. 재개발은 집을 갖고 있던 사람이나 집 없이 세입해서 사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삶의 기초를 위협했다.
이명박 정권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취임한 지 1년이 되었다. 악몽 같은 시간이다. 지긋지긋하니 길기도 하다. 천인공노할 폭력적인 살인 만행을 바라보며 과거의 박흥수, 이치호, 이재식, 그리고 도시빈민 투쟁으로 숨져간 수많은 동지들이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구나. 그들의 투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구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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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흥수 씨와 관련된 자료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었으며, 그밖의 내용은 전국빈민연합에서 펴낸 빈민열사 자료를 참조했습니다.
최인기 님은 전국빈민연합 사무처장으로 본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