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위험신호
2013년 여름, 아픈 엄마는 아픈 아들을 당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난 뇌출혈 직전의 몸 상태에 쉼표를 찍을 수 있었고, 아픈 몸을 돌볼 수 있었다. 아픈 엄마는 아픈 아들을 죽음 쪽에서 삶 쪽으로 구원해 주셨다.
83kg의 비만, 고혈압과 무좀, 통풍, 100이 넘는 간수치, 중등도 지방간, 중성지방, 역류성 식도염, 4-5번 디스크 통증, 테니스엘보, 손목터널증후군, 오십견, 이두박근염, 중심성망막증, 항문가려움증과 치질, 대상포진류의 피부병, 그리고 두통과 공황장애, 어지럼증과 중풍 등의 전조증상들, 한마디로 종합병원이었다.
박일수 열사가 분신한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당시의 계획과 신념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건물이었다. 거리에서 보냈던 수많은 시간은 내 몸에 독을 쌓는 일이기도 했다. 그 격렬한 스트레스를 다 견뎌냈지만, 몸 곳곳 성한 곳이 없었다.
엄마와 함께 돌쑥에게 침을 맞기 시작했다. 30년 지기이자 엄마의 주치의였던 돌쑥은 어느 날 침을 놓다 “네 몸이 너무 썩어서 안 되겠다. 몸의 독기부터 빼고 침을 맞자”고 제안했다. 투쟁 전술로서의 ‘단식투쟁’에 한 번도 동의하지 않았던 내게 단식은 어떤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고 단식을 하더라도 엄마 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곁에 있던 엄마는 어떻게든 더 먹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단식할 곳을 찾다가 송경동 시인에게 전화했다. SNS를 통해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경동 시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자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렇게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쉼터지기, 고 최정규 동지의 우정과 환대
남원버스터미널에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귀정사로 갔다. 종점에 내려 산으로 난 길을 한참을 걸었다. 2014년의 봄날이었고 뭔가 자꾸 일어서는 기운이 몸에 스몄다. ‘인드라망’ 현판이 장승처럼 정답게 나를 맞아주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던 쉼터지기, 고 최정규 동지의 주름지고 따뜻한 웃음은 1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는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눈 벗을 맞이하는 것처럼 나를 반겼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환대였다. 워낙 인간관계가 비좁은 나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난 단식하러 쉼터에 왔는데, 내가 반가운 최정규 동지는 술상부터 차렸다. 그의 주름지고 따뜻한 웃음이 아니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빈틈 많아 허술한 그의 몸짓과 말투에 매료됐다. 막걸리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취하도록 마셨다.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 최정규 동지는 내게 깍듯했고 비정규직 투쟁의 주체였던 나를 존중하고 있다는 걸 대화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날 최정규 동지가 파독 광부 출신이었다는 걸, 전노협 시절 전국을 돌면서 재정사업을 도맡아 했다는 걸, 이주노동자운동에 헌신했다는 걸, 민주노동당 연수원지기였다는 걸 처음 들었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민주노조 운동이, 진보정당운동이 최정규 동지를 함부로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성스런 마음에 대한 예의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종파적 이해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가 중요했다. 그의 진심은 혁명의 뿌리에 가 닿아 있음을 느꼈다. 최정규 동지는 뾰족한 날 편견 없이 우정으로 환대해 주었고, 나는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라고 철인이겠는가? 당시 나는 질병적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 몸이 아프니 남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욱하고 짜증 내고 화내는 일이 잦았다. 사람을 만나는 설렘도 사라지고 귀찮아졌다. 누군가를 알기 위한 우정과 환대의 노력보다는 어느 정파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더 궁금해지고 너무 쉽게 사람을 포기해 버렸다. 나는 충분히 위험해졌다.
정파들 사이의 외교전과 뒷담화에 이골이 난 내게 편견 없이 곁을 내어 준 쉼터지기 최정규 동지의 우정 어린 환대는 내 질병적 증상에 대한 참된 치유제였다. 내가 생각하는 관계론의 핵심에는 최정규 동지의 주름지고 따뜻한 웃음이, “이 한 사람”에 대한 정성스러운 마음이 깃들 것이다. 민주노총이 아무리 망가지더라도 아직도 타도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건 고 최정규 동지처럼 생을 걸어 단심으로 민주노조운동에, 혁명운동에 투신한 동지들이, 조합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치유자 조성웅은 최정규 동지의 주름지고 따뜻한 웃음을 따를 것이고 “이 한 사람”에 대한 정성스런 마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 생의 마지막까지 남을 강령이다.
고 최정규 동지를 생각하면 또 한 가지 잊히지 않은 기억이 있다. 혓바닥은 아주 예민한 감각기관이라서 시간이 지나도 그때의 감각을 새롭게 일으킨다. 10일 단식을 마친 다음 날 아침, 고 최정규 동지는 함께 밥을 먹는 공양간이 아니라 자신의 처소로 날 불렀다. 주방 냄비 속에서는 김이 나고 있었다. 직접 끓인 미음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음을 밥상 위에 받아 놓고 마음이 먹먹해져 한동안 그대로 있었는데, 어여 한술 떠봐, 손짓하는 그의 눈빛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음 같았다. 미음을 한 숟가락 떠 입 안에 넣었는데, 담백하고 연한 단맛이 났다. 따뜻한 정성이었다. 10일 동안 비어 있던 내장 기관에 최정규 동지의 정성이 담백하게, 아주 연한 단맛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살아보고 싶은 날이었다. 부드러운 미음처럼 따뜻하고 담백하며 연한 단맛으로 구성되는 것이 회복 같았다.
편견 없이 곁을 내어 주고 우정과 환대의 정성스런 마음으로 “동지적 관계”를 가꾸어 가는 것이 그가 생각했던 혁명운동이었을 것이다. 최후의 반혁명은 관료주의라고 했다.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은 최후의 반혁명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코뮤니즘”을 닮았다. 나의 질병적 증상을 치유했듯이 관료주의도 치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 최정규 동지에 대한 기억이 깊어질수록 가슴 뭉클하게 그가 내 안에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내가 아픈 누군가의 삶에 미음처럼 스며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 고 최정규 동지의 주름지고 따뜻한 웃음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고 최정규 동지의 명복을 빈다.
공양간 보살님이 차려준 밥상은 치유였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을 생각하면 공양간 보살님이 먼저 생각난다. 달처럼 둥글둥글 부드러웠고 달처럼 아픔을 품는 넉넉함이 있었다. 손맛도 일품이어서 밥상 자체가 “치유”였다. 조선 된장, 고추장, 간장, 김치, 참기름, 들기름으로 맛을 낸 묵나물과 된장국은 장내 미생물들을 돌보며 소화 기능을 촉진하고 해독 작용을 높이는 천연 항암제였다. 몸의 면역력을 높이는 발효 식품들이었다. 단식 전 이틀, 단식 후 20일 동안 공양간 보살님이 차려 준 밥상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맛있었다. 그녀가 차려 준 밥상은 내게 딱 맞는 치유제였다.
공양간 보살님의 밥상을 그리워할 때마다 땅을 배반하지 않고 땅에 순응하며 살아온 삶의 귀하고 소중한 정치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공양간 보살님의 밥상이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면, 내가 공장에서 집어 든 식판에 놓인 음식들은 치유의 밖, 반생명이었고 다 “독”이었다.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먹을거리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오늘 내가 먹은 소불고기와 삼계탕과 김밥·라면과 칼국수와 제육볶음과 새우튀김과 햄버그와 야채샐러드와 복숭아와 콜라와 아이스크림과 소주가 어떤 종자, 어떤 원료로 어떻게 재배되고 사육되고 가공되어 내 앞에 왔는지, 이윤을 위해 무엇을 사용했는지가 보인다. 항생제, 성장 촉진제, GMO, 글리포세이트, 벤젠, 제초제, 화학비료, 아스파탐 등등 오늘 먹은 음식을 통해 내 몸에 들어온, 이윤을 위해 사용된 독들이다. 자본이 기획한 상품들이다. 어느 것 하나 생명을 살리는 것은 없다.
공양간 보살님이 차린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본주의와 화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먹는 것이 죄다 독이기 때문이다. 땅을 배반하고 살아온 삶에 들이닥친 비극이다.
20일 보식 기간, 공양간 보살님이 차려 준 밥상을 적게 먹고 천천히 오래도록 씹고 있으면 식탐 조성웅이 보이고 과식 조성웅이 보였다. 내 의식은 사회주의적이었으나 혓바닥은 지나치게 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정치적 기형이 처참했다. 내 혓바닥은 오늘도 자본주의가 재생산되고 있던 공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양간 보살님이 차려 준 밥상은 삶의 안전과 존엄을 지켜 내기 위한 최전선 같다. 공양간 보살님의 밥상처럼 우리는 상품을 밥상 위에 차리는 것이 아니라 땅의 생명력을 밥상 위에 모셔야 한다. 이는 시스템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어야 하고 새로운 삶을 구성하기 위해 일정에 올려야 하는 긴급한 정치적 문제다. 지속가능할 뿐만 아니라 “순환가능한 삶”의 전망은 땅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 내게 준 선물
엄마와 함께한 1년의 기록을 묶은 『엄마-시집』을 선물했을 때, 엄마는 “내 생애 최고로 빛나는 아름다움”이라고 당신의 기쁨을 표현하셨다. 말기 암 환자였던 엄마의 밝고 환하게 펴진 웃음은 나를 벅차오르게 했다.
엄마 칠순 잔치 날, 머리도 다듬고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엄마는 당신을 위한 시서 앞에서 더욱 화사하게 피어나셨다. 시 낭송을 해 드렸을 때는 붓꽃처럼 환하게 웃으셨다. 붓꽃처럼 웃으시는 엄마는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다운 시였다. 행복이었다. 내가 시를 통해 도달한 최고의 긍지였다.
내 생의 가장 벅차고 아름다웠던 때를 준비했던 곳, 『엄마-시집』을 완성한 곳이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었다. 인드라망에서의 한 달, 엄마를 생각하며 오직 시에 집중할 수 있었던, 내 생에 처음 온 귀하고 귀한 시간이었다.
내 세 번째 시집을 소리 내어 다 읽고 난 엄마는 “내 시는 없네” 하며 조금은 섭섭하게 말씀하셨다. 기존 시집엔 엄마-시, 한두 편 수록했는데 세 번째 시집엔 엄마-시가 없었다. 아픈 엄마를 위해 시를 써 드리고 싶었다.
아픈 엄마 곁으로 오면서 함께 겪어 낸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딱히 시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와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일상에서 시로 도약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긍정적인 엄마보다 내가 더 초조했던 것이다. 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엄마와의 거리가 필요했고,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은 내게 제공된 최선이었다.
사회연대쉼터에서 단식을 시작하면서 새벽 5시에 무조건 일어났다. 귀정사 대웅전에 가 108배를 했다. 게으름과의 싸움이었고 시를 내 몸에 들이기 위한 의식이었다. 단식을 시작하고 며칠은 힘들었는데, 내장 기관이 차츰 비워지자 정신은 맑아지고 108배를 하자 오히려 다리에 힘이 생겨 몸에 활력도 돋았다.
엄마와 함께 보낸 구체적인 일상을 기록할 것, 치장하지 말고 담백하게 쓸 것, 엄마의 긍정적인 힘 속에서 정치적 사유를 지속할 것, 엄마-시를 쓰면서 생각했던 기조다. 엄마와 함께한 기록을 검토하는 일은 엄마의 고통스런 생을 위로하는 일이었고 내 안의 가부장성을 뼈아프게 성찰하는 일이었다. 엄마의, 아내 경희의, 여성의 고통스런 삶을 외면하고 가부장제와 투쟁하지 않는 그 어떠한 정치적 전망도 반혁명이었다.
하루에 한 편, 어떤 날은 두 편을 쓰기도 했다. 복식을 마무리할 무렵, 엄마와 함께한 1년의 삶을 25편의 시로 완성할 수 있었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을 나오자 곧 엄마 칠순이 다가오고 있었다. 임성용 시인을 통해 삶창 출신 편집자를 소개받고 원고 편집을 의뢰했다. 세상에 딱 한 권뿐인 엄마 시집을 인쇄하고 싶었으나 한 권은 인쇄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소 단위가 20권이란다. 상관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시집을 발행해 엄마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화선지에 붓으로 엄마-시를 옮겨 적은 시서를 준비했다.
엄마 칠순 잔치 날, 엄마는 생에 가장 밝고 환하며 행복한 때에 도달했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치유는 다시 삶의, 생명의 관계성을 되묻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정말 아팠다. 좁은 내 인간관계 안에서도 아픈 사람이 있고, 좀 더 나아가도 온통 아픈 사람투성이다.
몇 년 전에, 8살부터 공장 노동을 시작한 한 동지가 내 곁으로 왔다. 그는 아팠지만 치료를 거부하고 술이나 먹자 했다. 서로 고집 세고 성질 더러운 두 사람이 마주 앉으니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마지막엔 서로 공감을 이뤄 울먹울먹했다. 그 어린 나이,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됐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하고 도움을 요청할 곳도, 안겨서 울어 보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몸에 새겨진 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오직 맨몸으로 견디는 것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도움과 배려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몰랐다. 오직 자기희생과 헌신을 통해 운동에 복무해야 한다는 아픈 신념만 남았던 것이다.
내 몸이 온통 울음보였던 이유는 계급투쟁에 머뭇거리지 않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운동에 복무했던 동지들이 먼저 아프고 먼저 쓰러지고 먼저 죽어 가는 데에 있었다. 나 같이 말 많고 얍삽한 놈들은 지 살 궁리부터 하는데, 돌아갈 곳을 마련해 두지 않은 이 동지들은 자기 아픈 몸보다 운동에 복무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먼저 탓했다. 운동으로부터 고립되고 나이 들고 병들었는데, 아픈 몸을 돌볼 생각조차 않는다.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고, 운동판 꼬라지를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해소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술만 늘어 간다. 더욱 몸도 마음도 병들어 간다.
한 시대가 저물었는데,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울증이 더욱 깊어졌다. 새로운 관계론적 삶을 구성하기 위한 설렘도 사라졌다. 어떻게든 오늘 하루를 버텨냈는데 몸이 더 아프다.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 일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사건이 되고 해결되지 않는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
이제 삶의 쉼표를 찍고 잠시 멈춰서야 한다. 해야 할 일 때문에 눈치 보지 않아도 좋고 사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좋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치유는 다시 생명의 관계성에 대해 되묻는 것이다. 치유는 드러난 증상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원인에 대해 묻고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성찰하며 더듬더듬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몸의 동적 균형 상태, 내가 살아보고 싶은 관계망을 마침내 회복하는 것이다.
마음도 물질이다. 몸이 좋지 않으니 스트레스에 취약해지고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단이 없고 해소되지 않은 독이 오장육부에 켜켜이 쌓일 때 질병이 되는 것이다. 막힌 곳을 뚫어 주고 깨진 장부의 균형을 잡아 주면 우리 몸은 스스로를 치유한다. 몸이 좋아지면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는 마음의 근력도 생기는 것이다.
여기 삶에 쉼표를 찍고 잠시 멈춰 생명의 관계성을 되묻는 자리가 있다. 마음과 몸에 켜켜이 쌓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숲과 땅과 흙집과 건강한 먹을거리가 있다. 어떤 고민도 들어줄 수 있는 뛰어난 상담가가 있고 어떤 질병도 다스릴 수 있는 치유자가 있다. 다시 살아보고 싶은 관계망을 회복하는 자리가 있다. 바로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은 운동 속에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활동가들에게 고 최정규 동지가 내게 곁을 내어 준 것처럼 우정과 환대 속에서 치유의 자리를 제공할 것이다. 공양간 보살님의 밥상처럼 땅을 맞이하고 우리 몸이 땅 자체라는 걸 성찰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급진적인 사유를 자라게 할 것이다.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전망을 숲과 땅과 관계 속에서 회복하게 될 것이다.
당신, 오늘 지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당신 곁, 당신이 힘겹게 손 내미는 그곳에 귀정사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 있다.
덧붙이는 말
모든 치유는 자연치유,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
2014년 여름,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을 떠나 다시 화천으로 돌아왔다. 엄마를 돌보면서 내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꾸준하고 정기적으로 30년 지기이자 엄마 주치의였던 돌쑥에게 침을 맞았다. 단식을 끝내자 83kg이었던 몸무게가 65kg으로 줄었고, 내 일상을 괴롭혔던 항문 가려움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꾸준하게 침을 맞자,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파 잠도 자지 못했던 견갑골, 어깨 통증이 어느 날 문득 사라졌다. 뒷골이 뻣뻣해지며 맥없이 주저앉았던 증상도 어느 날 문득 사라졌다. 24시간 어두컴컴 저물녘으로 만들던 왼쪽 눈의 중심성막막증이 어느 날 문득 환해졌다. 먹으면 무조건 체했는데 어느 날 문득 속이 편해졌다. 혈압도, 무좀도, 대상포진류의 피부병도 더 이상 내 일상을 괴롭힐 수 없었다. 그렇게 일상을 고통스럽게 했던 아픈 증상들이 문득 사라지고 큰 탈 없이 하루를 살기 시작했다. 병원에 간 것도 아니고 약을 먹은 것도 아니다. 발효식품 중심으로 먹었고 꾸준하게 침의 자극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누가 치료했는가? 용한 침쟁이가, 아니면 침이? 아니다. 침의 자극을 받아들인 내 몸 스스로가 치유한 것이다.
엄마 주치의이자 30년 지기인 돌쑥이 내게 가르친 것은 침자리, 뜸자리가 아니었다. 그가 내게 가르친 것은 가장 급진적인 전망이었다.
“모든 치유는 자연치유, 스스로가 치유하는 것이다.”(돌쑥, 「내 몸에 침뜸하기」강의 중에서)
내 몸의 변화가 이 문장의 살아 있는 증거였고 함께 몸공부를 했던 길동무들도 질병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회복했던 것이다. 전문가에게 의지하지 않더라도 신규 조합원 교육받듯이 누구나 아무나 기본기만 배워 침을 찔렀고 뜸을 떴다. 몸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고 서로를 돌볼 수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은 치유의 수단을 찾지 못할 때 온다. 그러나 치유의 수단을 갖는다면 질병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몸공부, 삶공부가 된다.
불치도 없었지만, 완치도 없었다. 몸은 쉬지 않고 변화하는 유기체였다. 독을 먹은 만큼, 몸을 함부로 대한 만큼, 관계의 불균형이 깊어진 만큼 질병이 찾아왔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침, 뜸, 부황으로 충분히 다스릴 수 있었다. 다만 난치가 있었다.
돌쑥의 49재가 올 무렵 아프기 시작했다. 급격했다. 오장육부가 한꺼번에 된서리를 맞은 것 같았다. 갑자기 똥오줌 누고 겨우 밥상을 차릴 정도의 체력밖에는 남지 않았다. 일상을 영위할 수가 없었고 온갖 질병에 시달렸다. 몸과 마음의 ‘번아웃’ 상태가 오래 지속됐다. 정처 없고 막막했지만 병이 더 깊어지고 위중해지지 않게 침을 맞았다.
‘올해는 씨감자 20알이라도 직접 잘라 심어 봐라.’ 돌쑥이 죽기 며칠 전에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땅으로 갔다. 내 몸과 땅이 접지하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이 중심이었다. 돌쑥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텃밭 농사를 시작하면서, 땅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결정적으로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의지를 가지고 매일 뜸을 뜨고 정기적으로 침을 맞았다. 일상을 회복하는데 2년의 세월이 걸렸다.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에 대한 원고를 청탁받을 때, 난 마을 원주민 하우스에 토마토 모종 심는 일을 돕고 있었다. 그만큼 체력을 회복했던 것이다. 몇 년 만에 이렇게 긴 문장을 쓸 수 있는 것도 난치가 치유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시간이 걸릴 뿐, 난치도 치유되고 있는 것이다.
불치도 완치도 없다. 다만 아플 확률을 줄이며 사는 것이 최선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치유의 수단을 갖는 것, 존엄을 지켜 내기 위한 관계망을 회복하는 일이다. 자본의 공포마케팅으로부터 벗어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아픈 동지들에게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관문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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