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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워커스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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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인다.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인다. 이런 끔찍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살인의 뉴스 뒤에 붙은 사연들은 더 참혹하다.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돌봄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서, 모든 원조가 끊긴 곳에서 생존의 모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스스로 죽어버리는 사람들은 조용히 사회에서 사라진다. 사람들은 죽음의 상호부조라도 시작한 것일까. 가난한 병자와 노인들은 일찍 죽기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죽어주는 것이 서로를 돕는다고 생각되는 사회. 그런 죽음을 방조하는 사회. 우리가 지금 그런 시대를 살아간다.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복지의 사각지대’라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사회의 해체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복지 개념은 주로 2차 대전 이후 서구에서 등장한 ‘복지국가’의 제도와 사회적 상상력을 원형으로 한다. 복지국가(welfare state)는 2차 대전 기간 전쟁국가(warfare state)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했다고 알려졌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태동했던 박애주의와 사회연대성의 개념 및 ‘사회적인 것’에 대한 근대적 상상력과 관련되며, 더 근원적으로는 ‘행복한 삶’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의 ‘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좋은(eu)-다이몬(daimon)과 함께 한다’는 고대적 행복의 정의는 ‘행복’을 개인의 범주를 넘어 모든 시민의 행복을, 또한 모든 생명뿐만 아니라 죽은 자, 혼령(daimon)의 안녕까지 포함한다. 다이몬은 올림포스에 사는 불멸의 신들과 달리 인간 세상에서 잠시 머무르며 함께 살아가는 작은 신들이다. 좋은 다이몬은 우리 삶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나, 세상에 원한을 갖고 죽은 편치 않은 영혼은 산 사람을 괴롭히는 악귀가 된다. 악귀가 많은 세상은 평안치 않다.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나면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천도재를 올리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이성과 과학에 기반한 근대적 세계관이 등장하면서 공동체적 윤리의 토대를 제공했던 신화적 세계관이 주술이나 미신으로 치부되었고, 신에 대한 이야기들(theologia)이 힘을 잃으면서 모두의 안녕을 걱정하고 돌보라는 에우다이모니아의 윤리적 지침도 함께 힘을 잃었다.

대신 종교적 신화적 구속력은 제도화된 ‘사회법’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사회를 서로 죽고 죽이는 야만적 상태로 빠지게 하지 말자고 등장한 것이 사회계약의 이념이고, 사람들이 각자 죽게 내버려 두지 말자는 합의에서 등장한 것이 사회연대성과 공적 부조로서 사회 보장의 개념이다. 공화국은 최소한 일국 안에서는 인민의 행복을 추구한다. 물론 그것은 순수한 박애주의의 이상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으며, 사회의 질서, 안전, 지속가능성을 위한 통치의 기술로 발명된 것이기도 했다. ‘복지후생’이란 번역어는 안전한(건강한) 사회의 관리로서 치안 개념에 훨씬 더 가깝다. 사카가미 다카시는 <인구·여론·가족–근대적 통치의 탄생> 5장에서 ‘공적 부조의 논리’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에 대한 기원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입헌의회는 무산계급의 보호를 위해 ‘구걸근절위원회’를 설립하고 빈민에 대한 부조를 시행하는 작업계획에 착수한다. 위원회는 ‘모든 인간은 생존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명제를 빈민 구제의 기본 원리로 내걸고, 빈곤은 개인의 현상이 아니라 사회의 현상이며, 따라서 빈민의 구제는 공적 부조여야 한다는 원칙을 기본 입장으로 천명한다. 이에 따라 공화국은 이전의 방식인 자선과 감금이 아닌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는데, 그것은 빈민을 사회적으로 재포용하는 방책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빈민을 사회적으로 재통합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격리와 배제의 관점을 통합의 관점으로 바꾼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 통합 기술의 핵심은 무노동 인구를 노동 인구로 재창조하는 데 있었다. 이는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조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도시 빈민은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이들로, 전통적인 상호부조의 방식에서 단절된 상황이었다. 공적 부조는 이들을 노동자 예비군으로 만들어 노동력을 저렴하고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필수 조치이기도 했다. 이처럼 공적 부조는 빈민을 위험한 존재로 바라보고 박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지배계급으로부터 빈민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빈민으로부터 부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불안을 효과적으로 안심시키기 위해 위험한 자들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다. 지배층의 불만을 불식시키고, 그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롭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위원회는 ‘참된 빈곤’과 ‘거짓 빈곤’을 구별하여 부조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참된 빈자는 적극적 지원의 대상으로, 거짓 빈자는 훈육과 처벌의 대상으로, 빈곤층의 재분할이 이뤄졌는데 이때 참된 빈자를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은 ‘노동의 의지’다. 참된 빈곤은 노동의 의지가 있으나 상해나 질병 등 다른 여건으로 말미암아 자립하지 못하고 빈곤에 빠지게 된 경우이고, 거짓 빈곤은 애당초 노동의 의지가 없고 부조에만 의지하려는 의존적 빈곤이라는 것이다. “부조의 목적과 유효성은 빈민을 기술과 습속 면에서 모두 노동하는 인간으로 만들 것, 그들을 노동-임금이라는 통상적 교환관계의 세계로 재통합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이 선별의 원리는 이후의 복지제도 발전 과정에서도 계속 반복된다. 하지만 이제 공적 부조를 사회적 채무로 보는 공화국의 관점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18세기의 사람들은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부조는 선의에 따른 시혜가 아니라 ‘사회에서 지울 수 없는 신성한 부채’”라고 말했지만, 오늘날에는 아무도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자신의 구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빈자에 대해 빚진 자’라는 관념을 가진 사람들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제는 복지 수급자들을 공적비용, 세금에 대한 채무자로 인식하고, 납세자들은 채권자처럼 당당하다. 행복에서 복지후생으로, 안녕에서 안전으로, 바뀐 용어와 함께 우리의 인식도 변해갔다. 공적 부조는 공공서비스로, 사회연대와 사회보장은 사회서비스로, 정치사회적 개념들도 차례로 경제적 용어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에우다이모니아나 공생공락의 공동체적 이념, 프랑스 혁명기의 사회연대성 같은 사회적 이념은 서서히 제거되었다. 국가 단위의 행복을 추구하던 웰페어(welfare)는 90년대 환경 이슈의 등장과 함께 웰빙(wellbeing)으로 전환되고,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웰니스(wellness)를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앙드레 스파이서와 칼 세데르스트룀이 쓴 <웰니스 신드롬>은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이 이제 국가와 사회의 공통 목표가 아니라 문화적이며 계급적인 분할선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서구 자본주의의 호황기에 수립된 전후 사회협약의 와해는 복지 해체의 과정을 촉진했다. ‘45년체제’라고 불리는 이 사회협약의 핵심은 노동계급에 일자리, 노동권,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사민주의 정당은 대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70년대부터 자본주의 성장 위기가 시작되자 복지국가의 토대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등장한 보수혁명은 전후의 사회협약을 하나씩 파기하고 후퇴시키며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의 길을 만들어 냈다. 복지의 파괴는 사회를 해체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의 핵심이다.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와 세금 감면,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는 국가 재정에서 공공부문 예산을 축소하게 했다. 예산 감축은 복지를 축소했고, 다시 복지의 시장화로 이어졌으며, 세수감소로 인한 재정적자를 막기 위해 다시 공기업을 매각하고 공공예산을 축소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보수 정부는 매우 신묘한 논리로, 공공 부문 예산 삭감 조치를 국민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는 조치로 둔갑시켰다. 특수 이익집단이 향유하던 특권을 해체하여 경제를 살리는 기업의 활동을 지원하겠다는 것이 대처 정부의 약속이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와 보수 정부가 만들어 낸 이념적 공세 속에서 노동조합은 나라가 어려운 데도 계급의 이익만 앞세우는 ‘특수 이익집단’이 되었고, 노동권과 사회권에 의해 보장되어 온 노동자 시민의 보편적 권리는 ‘특권’으로 매도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논리를 노동조합과 장애인 투쟁을 공격하는 윤석열, 이준석 등 우파 정치세력에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복지에서 사회연대성과 공적 부조의 이념을 제거하고 복지의 개인화와 시장화를 추진한 것은 보수적 신자유주의만이 아니다.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80년대 보수혁명에서 충격받은 서구 유권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노동당(영국)과 민주당(미국)을 선거에서 승리하게 만드는 정치적 심판으로 응답했다. 하지만 블레어와 클린턴 등 1990년대 ‘제3의 길’ 옹호자들은 신자유주의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부의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잘못된 원인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개인들이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면서 실업자에 대한 재교육과 구직자에 대한 직업훈련, 은행 대출이나 신용 카드 등 상업적 신용의 확대, 건강보험과 퇴직연금의 감소분을 사보험의 확대로 대응하는 등 시장주의적 복지 정책을 고수했다. 그 결과가 가족 구성원 중 임금소득자와 대출가능자에게 사적 복지의 책임이 지워지면서 노인연금에 실업 자녀(청년)가 의탁하고, 자녀의 학자금 대출에 부모(노인)의 생활비를 의탁하는, 현대적 빈곤의 양상이다.

1996년 클린턴 대통령은 새로운 복지 개혁 법안을 추진하면서 “무조건적인 부조 프로그램 탓에 의존 상태에 처한 실업자를 내버려 두는 것은 이들을 배려하는 적절한 방식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블레어 정부가 도입한 노동연계복지 프로그램은 과거의 노동당처럼 노동계급에 일자리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무노동계급의 의욕을 고취하고 고용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2003년 독일의 슈뢰더 총리와 적록연정 정부는 하르츠 법안을 통과시켰고, 기업에 대한 고용보장 요구 대신 “자질과 아무 관계도 없는 저임금 일자리를 받아들이라고 빈곤층을 밀어붙였다”. 이와 같은 사민주의적 배신과 제3의 길 노선에 대해 유권자들은 투표 철회로 응답했고, 2000년대 신자유주의 우파의 부활과 보수 반동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다음에 집권한 보수 정당들은 일자리 감소와 소득 감소, 복지 해체 등에 따른 노동계급의 불만에 대해 봉합이나 타협 정책 대신 그들의 분노를 정부나 기업이 아닌 다른 곳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외부의 적’을 제공하는 방법을 썼다. 보수 세력에 의하면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정부와 기업이 아니라 테러리스트, 무슬림, 이민자, 난민, 중국과 인도의 노동자들이었다. 국가가 복지에서 손을 떼면 복지 산업과 복지 시장이 성장한다. 사회의 재생산에 대한 책임을 개인과 시장으로 떠넘기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좌·우파 모두의 합의였다. 한국 사회에서도 IMF 이후 복지의 공백을 부채가 메웠다. 빈자가 금융시장을 부양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목표는 제대로 인민을 돌보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일까? 한국 사람들에게 ‘복지 국가’는 오랫동안 선망의 대상이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영국의 복지제도는 풍요롭고도 정의로운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상징했고,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부러워하며 칭송하는 모델이었다. 그것은 보수주의자들에겐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증거였고, 진보주의자들에겐 사민주의적 이상의 현실태였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시민사회와 학계에서도 그동안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는 주로 배워야 할 참고와 교훈의 사례로 다루어져 왔고, 극복해야 할 한계나 비판점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관리 자본주의’로서의 복지국가 체제는 전쟁과 공황, 혁명을 겪고 전후에는 ‘공산화’의 접경에 위치한 유럽에서 불가피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종종 간과되었다. 내부의 노동자들에 대한 양보 조치– 임금과 일자리 보장, 기업에 대한 복지를 위한 세금 부과와 노동권 강화를 위한 기업 규제 등 -로 인한 자본의 손실을 상쇄할 수 있는 남반구의 식민지와 여성, 이주노동자, 도시 주변부 등 젠더 및 인종적 지역적 계급적 내부 식민지로의 ‘착취의 이전’이 이 복지국가 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조건이었다는 사실도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다. ‘착한 가부장제’가 ‘폭압적 가부장’의 대안이 될 수 없듯이, ‘잡아먹기 위해 보살피고’ ‘착취하기 위해 살려두는’ 생명권력이 우리의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는 없다.

1980년대까지 이 땅의 사람들에게 국가란 국민을 감시, 처벌, 통제하는 ‘무자비한 통치자’와 동일시되었고, 안전보다는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그런 국가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민을 ‘보살피는 국가’, ‘돌보는 국가’를 쉽게 ‘착한 국가’로 표상하고, 북유럽과 서유럽의 복지국가를 그런 ‘좋은 국가’를 대표하는 나라들로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복지의 개념을 서구 좌파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주체와 대상을 다시 확장하고 재구성해야 할 때다. 당면한 기후위기는 복지의 범주를 일국적 차원에서 지구적 차원으로,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인간에서 비인간 존재로, 시민에서 비시민으로, 노동자에서 노동하지 않는 자로, 근대적 사회연대성의 개념을 넘어 연대하는 신체들을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그동안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는 진보적 시민들에게 서구의 복지국가는 성장과 분배, 자본과 노동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조화롭게 중재하고 조절하는 모범적 사례로 각인되어 있었지만 이 타협적 ‘중재 국가’야말로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의 근본적 한계이기도 하다. 중재는 결국 힘의 관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자본과 노동을 타협시키고 사민주의적,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적 이상을 모두 포괄하고자 한 ‘중재국가’의 기획은 복지국가가 처음부터 노정하고 있는 한계였으며, 자본이 일국적 통치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 불행히도,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계급정치가 시작될 순간에, 이미 서구에서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전후의 사회협약이 급속히 해체되는 중이었고, 민중의 힘으로 새로운 사회계약을 만들어 내야 했던 시기, 금융자본주의가 본격 전개되면서 자본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해졌다. 중간계급과 중재권력의 위치도 계속 더 위로, 더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복지를 생명통치의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위험하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그것이 혁명의 요구였던 것처럼, 이후에도 복지는 생존권의 의미만이 아니라 노동권, 사회권, 교육권, 참정권 등 제반 권리를 위한 조건으로, 보편적 인권의 수단으로 해석되었고, 노동자 민중의 투쟁 속에서 쟁취하고 확장하며 제도화해 왔다. 20세기 서구 복지국가의 사회보장 시스템은 노동계급의 투쟁과 그에 따른 사회협약의 산물임이 분명하다. 지금 필요한 우리의 대응은 ‘그런 복지를 반대한다’라거나 ‘그런 복지라도 쟁취하자’가 아니라 지난 세기 성장과 착취에 기반한 북반구 복지의 한계를 넘어 더 공세적으로 더 크고 더 넓은 사회연대성과 공공성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전대미문의 기후위기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에, 핵위기와 전쟁위기까지 가중되어 닥쳐오는 상황에서, 삶이 붕괴되지 않도록 돌봄의 안전망과 사회 안전 시스템은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하고 섬세하게 계획하고 확충해 나가야 할 때임에도 정부의 정책은 오히려 ‘복지 축소’를 노골적으로 천명하며 그나마 남아있는 사회적 안전망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것은 노동계급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며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여기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과 연대가 필요하고, 만물의 안녕이 나의 안녕이고 그들이 평안해야 우리도 평안하다는 행복의 공동체적 상상력, 에우다이모니아와 공생공락의 정신을 운동으로 되살려내는 일이 또 함께 필요하다. 시혜나 원조가 아니라 생명의 권리이자 정치적 권리로서의 복지를 노동자의 상상력으로 그리며 탈환하자.

<각주>
사카가미 다카시 지음, 오하나 옮김, <인구·여론·가족–근대적 통치의 탄생>, 그린비, 2019.
사카가미 다카시, 위의 책, 249쪽.
앙드레 스파이서, 칼 세데르스트룀 지음, 조응주 옮김, <건강 신드롬>, 민들레 2016 참고.
미셀 페어 지음, 조민서 옮김, <피투자자의 시간>, 리시올, 2023. 160-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