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 임원은 국정원으로부터 통지서를 한 통 받았다. 통지서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내사 결과, 혐의사실 없어 불입건 결정함"(결정일자 2023. 1. 26)이라고 적혀 있었다. 첨부된 2장의 통지서에는 2013~2014년 사이 휴대전화 통화내역, 휴대전화 위치추적자료, 이메일 접속기록, 이메일 실시간 접속지(IP) 추적자료, 싸이월드 미니홈피, 카카오톡 계정 등에서 통신사실을 확인하거나, 압수수색을 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 국정원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불입건 결정 통지서. 종결일자가 2023년 1월 26일이다 |
전북민중행동에 따르면 이달 들어 위에 언급된 간부를 포함한 전농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의 전·현직 임원 7명이 <통신사실 확인자료제공요청 집행사실>을 국정원으로부터 통보받았다. 이들 통지서 내용에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수사의 법률적인 근거 등만 적혀 있을 뿐 구체적인 사유와 사찰의 범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전북민중행동은 23일 전북도민을 사찰하고 내사한 국정원을 규탄하는 성명을 내고, 국정원의 사찰과 내사의 문제점, 관련 내용을 비공개 한 것의 문제점을 확인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인권침해 가능성 높은 내사..."국정원 예외가 문제"
해당 전농 전 간부에게 통보된 불입건 결정일은 2023년 1월 26일로, 전체 국정원의 내사 기간은 9년에서 10년으로 추정이 된다. 내사는 수사로 입건되기 전 준비단계다. 준비단계라고는 하더라도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들여다 보는 행위이기 때문에 기본권이 제한된다. 실제로 수사기관의 업무가 범죄혐의와 관련된 증거를 수집하고 보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사활동과 마찬가지다. 특히 통상적인 수사와 달리 내사의 경우는 밀행성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해서 피해자에 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할 소지도 높다.
▲ 국정원은 이메일, 싸이월드 미니홈피, 카카오톡 계정 등을 본인의 동의 없이 들여다 보았다. |
장여경 정보인권연구소 상임이사는 국정원이 장기간 내사를 진행한 것에 대해 2018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는 수사기관이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취득한 후에 장기간 통지하지 않은 데 대해 "수사의 밀행성 확보는 필요하지만, 적법절차원칙을 통하여 수사기관의 권한남용을 방지하고 정보주체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후 국회는 통신비밀보호법을 개정해 정보를 입수한 정보·수사기관들이 원칙적으로 1년이 경과하면 대상자들에게 통지하도록 통지제도를 개선했다. 그러나 장여경 상임이사는 "국가정보원에는 광범위한 예외가 허용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다"라고 비판했다.
실제 이와 같은 비판에 직면해 경찰청은 2018년 안보 수사에서 내사가 불필요하게 길어져 관련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을 막도록 '내사 일몰제'를 도입하고, 6개월 이상 진행된 내사는 원칙적으로 종결하도록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림을 다 그려놓고 뒤지는 식"
그동안 국정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사 또는 수사를 할 때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비판도 계속 제기됐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근거 없이 광범위하게 내사를 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내사종결 통보를 받은 전 전농 임원은 현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올해 1월 20일 불구속 기소된 하현호 전북민중행동 공동상임대표와 함께 일을 하던 사이다.
언론에 알려진 하현호 대표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2013년 경부터 2019년까지의 일들이다. 국정원이 보낸 통지서에 따르면 해당 간부에 대한 내사가 시작된 시기도 2013년이다. 시기상 하현호 대표와 동일한 건으로 내사를 받았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정충식 전농 전북도연맹 사무처장은 해당 건이 하현호 대표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기본적으로 시민사회에서 일을 하게 되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하현호 의장님과 실무를 봤던 사람이 한 두 사람도 아니다. 그 많은 사람을 모두 들여다봤다는 이야기"라며, 이번 내사 건은 "(국정원이) 그림을 다 그려놓고 뒤지는 식"으로 철저히 국정원의 시각에서 진행된 내사라고 비판했다.
내사 종결 통보를 받은 전 임원 뿐만 아니라 통지서를 받은 나머지 7명도 어떤 근거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게 되었는지 국정원은 공개조차 하지 않았다. 정충식 사무총장은 통지서를 받은 전·현직 임원들이 국가보안법 혐의나 내사의 구체적인 범위 등을 확인하고자 통지서에 적인 국정원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으나, 국정원측에서 설명을 거부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