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4 기후정의행진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그러나 기후정의운동은 아직까지 변화를 가능케 할 실질적인 사회적 힘으로 전환되지는 못하고 있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이나 기후정의동맹과 같이 기후정의를 표방하는 연대체는 있지만 사회적 의제를 주도하거나 정세를 돌파하는 조직적 구심체로서 역할을 하기엔 역량이 매우 부족하다. 또한 기후정의나 체제 전환과 같은 개념이 여전히 추상적이라는 평가에서부터 기후정의운동의 요구와 주장이 지금의 강고한 지배체제 속에서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소망만을 담고 있다는 비난에 이르기까지 안팎의 문제 제기와 비판도 만만찮다. 기본적인 원칙과 지향에 대한 동의는 확장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대안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가속되고 있는 정책 변화도 기후정의운동의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산업부는 2036년까지의 전력수급 계획을 담은 ‘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확정해 국회에 전달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2030년 기준 30% 이상으로 늘리려던 재생에너지는 21%대로 감소한 반면 원전 비율이 32% 이상으로 증가했는데, 주요 언론은 이 계획을 2036년까지 전력생산의 65% 이상을 신재생에너지와 원전으로 대체하고 석탄발전 비율을 15% 이내로 잡는 ‘친기후’ 정책이라고 묘사했다. 1월 중순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해 두 나라 간의 “탄소중립을 위한 연대와 협력”을 제안했다. 이 자리에서 원전과 수소 에너지 분야 40조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소식도 대서특필됐다. 기후활동가들은 윤석열 정부의 기후정책을 ‘반(反)기후적’이라 비판하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탄소중립’ 정책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윤석열 정부의 권위주의적이고 반노동적인 정책은 갈수록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인다. 지난해 건설노조와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공정위까지 개입시키며 과징금을 부과하고 형사고발까지 추진하는 방식으로 노동자의 목소리를 압살하더니, 급기야 지난달에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단이 있다며 국정원까지 나서 민주노총 등을 상대로 공안몰이를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관과 협력적 모습을 보이던 ‘시민사회’ 단체들에 대해서도 국가보조금 사용에서 부정이 발견된다고 공격을 가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재명의 대장동 사건과 성남FC스캔들을 매개로 민주당에 재갈을 물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이처럼 독단적 일방통행의 조건을 구축하고 있는데, 윤석열 정부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민주당의 무능이 되려 윤석열 지지율 상승에 기여하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도 유권자의 최소 1/3가량은 꾸준히 ‘반(反)윤석열, 비(非)민주당’의 흐름을 형성하며 대안 부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사회운동은 선도적으로 정세에 개입하기보다 사안을 뒤따라가며 분절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벅찬 모습이다. 획기적으로 개입하자는 계획 없이는 일 년여 앞으로 다가온 총선과 이후 지방선거, 대선 과정에서 거대 양당 구도는 더욱 견고해질 것이 뻔한데,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한 기후위기 대응과 체제 전환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기후정의운동은 무엇을 해야 할까?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 성장체제에 맞선 사회 세력화를 주장했던 기후정의운동은 어떻게 양당 구도에 균열을 내며 독자적 변수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사회 세력화와 대안적 관점의 담론화
‘사회 세력화’란 다양한 사회운동의 요구와 투쟁, 이 투쟁의 담지자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모이면서 유의미한 단일 행위자이자 정치과정의 변수로 정립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 세력화는 조직 형태를 필수적으로 요구하지만, 그것이 지금 당장 정당 혹은 정당적 지향을 갖는 조직 형태일 필요는 없다(이것이 ‘정치 세력화’와의 차이라면 차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 세력화는 대신 부문이나 지역에 따라 분절돼 벌어지는 투쟁들을 연결해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모순과 억압 구조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개별 공동체나 사회운동 주체들과 공유하면서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 지역 또는 한 사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과 그 요구가—비록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지 않더라도—나의 투쟁과 요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따라서 그 투쟁이 나의 투쟁이기도 하다는 인식과 실질적 ‘관계 맺음’이 필요하다. 이 관계성을 기초로 중장기적 계획에 따라 공동 투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사회적 담론과 정책 논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집합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사회 세력화의 출발점이다.
▲ 924 기후정의행진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서로 떨어진 사회운동 간 연대와 연결의 강화, 이를 넘어서는 조직적 결집은 기후정의운동이 제시하고자 하는 대안적 전망과 관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언어화(혹은 기표화)하는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일상 현실에서 체험하게 되는 어려움, 두려움, 불만이 직관적인 언어로 기표화할 때 사람들은 더 쉽게 정치화하고 행동의 동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나 ‘차별’에서부터 ‘기후정의’나 ‘체제 전환’에 이르기까지 기후정의운동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은 현실의 모순이나 지향을 담아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상적 삶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추상적 개념이다. 따라서 이를 보다 직관적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컨대 북미 오큐파이 운동의 “99% 대 1%” 혹은 “우리는 99%”와 같은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 말이다.
이 표어들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맥락에서 불평등이(혹은 나의 경제적 어려움이) 어떻게 (금융)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며 큰 공명을 울렸고, 영국 멸종반란의 “6차 대멸종”과 결합한 “지금 당장 행동하라”는 구호는 수천 명을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에 나서게 하는 동력이 됐다.
하지만 감성적으로 확 다가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는 기후정의운동이 지향하는 사회 세력화를 위해 필요한 내용과 관점이 포함돼야 한다. 어떤 기표 혹은 담론틀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되레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사회 세력화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1년도 안 되는 기간 한국 사회가 크나큰 ‘퇴행’을 경험하고 있다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 확산하고 있는 ‘반윤석열’ 프레임이 그 한 사례다. 윤석열 정부 초기부터 추진돼 온 여가부 폐지, 마을공동체 조례 폐지, 재생에너지 확대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이태원 참사 대응, 그리고 노동탄압 등의 정책은 분명 ‘퇴보’다. 그러나 ‘퇴보’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걸 막아야 한다는 혹은 있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 잘못됐다고 비판하던 이들마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과거 문재인 정부를 ‘좋았던 시절’인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 열심히 투쟁하면 할수록 그 결과물은 지지율이든 국회 의석수든 민주당으로 수렴하는 쪽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세월호 싸움 때도 그랬고 박근혜를 끌어내린 촛불시위 때도 그랬다.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근원적으로 규명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직관적으로 드러내지 못한 상황에서 ‘진상규명-책임자 처벌’ 혹은 ‘퇴진’이 핵심 요구로 자리 잡았다. 결국 (세월호의 경우엔 요구조차 제대로 관철되지 못한 채) 운동의 성과는 민주당이 가져가 버렸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 이후의 사회운동도 이와 비슷한 양상을 따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49재를 맞이해 각지에서 발표한 성명은 대체로 철저한 진상규명/책임규명, 국가 책임 인정과 대통령 사과, 피해자 권리 보장, 기억과 추모와 같은 요구를 중심에 두었다. 49재를 맞이해 발족한 시민대책위는 여기에 ‘재발 방지 및 안전한 사회를 위한 근본 대책’을 추가했으나 이런 참사가 계속되는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안전한 사회’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무엇이 ‘근본 대책’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기민한 정부 방침에 대한 대응과 분향소 운영과 같은 실무로 인한 어려움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사회 세력화를 꿈꾸는 사회운동이라면 기업의 비용 절감 노력 속에 참사가 재발하고 있다는 현실을 들춰내야 한다.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 시장화된 돌봄 체계나 행정 편의주의적 시설 속에서 침해되는 안전과 인권, 소수의 가진 자만 중심에 놓는 주거나 교육 정책의 문제, 여성과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체제가 이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 기후위기로 인해 이미 현실화한 재난이 이후 어떤 식으로 사회 공동체의 집단적 안전을 위협하며 대규모 참사를 불러올지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어떻게 성장과 이윤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다수의 안전, 복리, 행복을 부차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기인하고 있는가를 언어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민주당이 선거에서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더라도 압력을 느껴, 보다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안전 대책 마련에 대해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기후정의운동이 의식적으로 (또한 계획적으로) 이런 문제를 계속 제기해야 기존 담론을 넘어서는 대안 담론의 공간이 창출되고 양당 구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사회 세력화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사회 세력화를 위한 운동방식의 혁신
사회 세력화는 다양한 사회운동 간 연대를 강화하는 것, 또한 이를 넘는 단일한 결집을 수반한다. 기득권 세력과 차별되는 대안적 관점과 전망을 수립하고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이를 위한 충분조건이지만, 기후정의운동의 세력화는 우리가 원하는 변화의 크기에 비례해 관점과 전망을 공유하는 이들을 폭넓게 조직하는 것을 통해 물질화된다. 이를 위해서는 연결되지 않은 혹은 조직되지 못한 지역이나 부문, 개인과 집단을 연결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체를 기본 단위로 하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소수 활동가 중심의 운동이 뿌리내리면서 각개약진하는 사회운동의 경향이 강해졌다. 단체 회원을 대상으로 한 일상적 사업을 축으로 강연이나 토론회, 논평, 기자회견, 연대 사업 등으로 사업이나 전술이 정형화했고, 상대적으로 고립된 조건에서 더 큰 운동을 만들기 위해 면밀한 계획 속에서 사업이나 투쟁을 기획·배치할 여력을 찾기 어려워졌다. 대부분의 경우 계획은 단체 차원을 넘지 못하고, 단발성 사업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런 경향은 소위 ‘달력투쟁’에서도 발견된다. 각종 기념일로 가득한 한국의 사회운동 달력은 과거 사회운동의 성과이자 투쟁의 기획과 조직화를 위한 중요한 자산이다. 지금껏 기념일에 맞춘 행사나 투쟁은 과거의 투쟁을 기억하고 이를 오늘의 투쟁과 연결해내며 사회운동 간 연대의 기초로 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연례행사는 이미 연결된, 혹은 ‘품앗이 연대’의 관계망에 이미 속한 단위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운동 방식은 어려움을 겪는 투쟁 현장이 있을 때 달려가 같이 싸우며 끈끈한 상호지원 체제를 구축하고 연대 단위 간 공통 경험에 기반한 정체성을 강화하며 사회운동 재생산의 중요한 기제가 되어왔다. 무엇보다 운동이 어려움을 겪는 시기 최소치의 동력을 유지하는 데에 무척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사회 세력화를 위한 운동의 확장이 요구되는 시기에는 의도치 않게 장벽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모르는 이들을 운동으로 끌어들여 대중적 확장을 꾀하는 일은 옆으로 밀리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운동적 상상력이 과거 혹은 현재에 고착되면 지금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기후정의운동의 사회 세력화를 위해서는 몸에 붙은 운동 방식에 대한 성찰과 혁신의 노력이 절실하다. 운동의 확산을 위한 새로운 대중 조직화 사업, 또는 어떻게 직접행동과 같이 파급력 있는 행동전술을 배치할 것인가에 고민의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 물론 이런 작업은 한 단체나 지역, 부문을 넘어 ‘더 큰 운동’ 차원의 계획과 조율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이것을 수행할 주체가 마땅치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서로의 칸막이를 넘어 폭넓은 대중 조직화와 이를 위한 혁신적 방안을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주체는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혁신의 모색은 효과적인 투쟁을 위해서도, 기후정의운동의 사회 세력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