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우리가 ‘이상하다’라는 말을 들은 건 최근의 일이다. 선배가 우리 둘 모두를 알고 있는 한 지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내 나이를 물었다고 한다. 선배는 사실대로 “모른다”라고 답했단다. 그러자 지인은 “친한 사이에 어떻게 나이를 모를 수 있냐?”라며 우리의 관계가 이상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무수한 대화 속에서 ‘나이’는 한 번도 진지하게 등장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각자 소비했던 대중문화나 교육과정, 겪었던 사건 등을 두루두루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정도의 나이 차가 있겠구나 싶은 게 다였다. 우리가 친해지는데 나이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한다. “친해지는 데 나이가 왜 중요하지?”
한국 사회에서 ‘나이’란?…권력 혹은 혐오!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혹자는 한국에 존재하는 ‘호칭’ 때문이라고 말한다. 처음 만난 사이에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것 또한 상대방의 나이를 알아야 “언니”, “형”, “오빠”, “누나” 등 뭐라고 부를지 정해지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런 논리들이 TV를 통해 여과 없이 설파되기도 한다. 이상한 점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방송인) 역시 이런 주장에 수긍한다는 점이다.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말해야 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국에서는 실례일 텐데….
지난해 9월, KBS <개는 훌륭하다>에 출연한 성시경은 한국 사람이 초면에 몇 년 생인지 묻는 것과 관련해 “호칭을 정해 친해지려고 하는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자, 강형욱 훈련사는 함께 방송에 출연한 독일 출신 다니엘 린데만을 지목하며 “아까, 저한테 몇 년 생이냐”라고 물었다고 이야기했고, 스튜디오는 ‘(다니엘이)한국 사람 다 됐다’라는 식의 대화들이 이어졌다. TV 속 출연자들은 화기애애했으나 그 장면을 보며 이해하기 어려웠고, 불편했다. 초면부터 굳이 호칭을 정해 친해져야 하는 이유는 뭔가. 그냥 “~씨”를 붙이면 될 일이 아닌가.
문제는 한국에서 ‘나이’라는 건 단순히 호칭을 정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이 열심히 싸우다 종국에는 “민증 까!”, “너 몇 살이야!”라는 고성이 나오는 광경은 굉장히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거야말로 이상하다. 상대방의 나이를 아는 것과 싸움을 끝내는 것이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인가. 결국, 나이 어린 사람이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툼의 발생 원인이 무엇인지를 떠나서 말이다. 그러니, 결코 지려고 하지 않는다. 민증을 깐들 “내가 출생신고를 늦게 했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렇듯, ‘나이’는 위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이 권력’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 ‘나이’라는 것도 적당히 먹어야 한다. 때로는 나이가 차별·혐오의 요소가 되기도 하니 말이다. 인터넷상에 노인을 지칭하는 ‘틀O+충’이라는 혐오 표현이 떠돈다. 틀니에서 ‘틀’과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히는 소리의 합성어, 그리고 여기에 벌레를 뜻하는 한자 ‘충’이 더해진 말이다. 혐오에 혐오를 더하는 셈이다. 나이가 적은 것도 차별의 대상이 된다. ‘초딩’, ‘O린이’라는 표현에는 “미숙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던가.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혹은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혐오와 차별이다. ‘막내’, ‘맏언니’ 등의 호칭도 같은 맥락의 문제다. 구성원 사이에서 나이에 따른 고정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에 대한 차별도 ‘나이’를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이브 케이크’라는 말이 있었다. 스물네 살이 지나면 “여자도 아니다”라는 남성의 시각이 듬뿍 담긴 표현이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그렇지 않다. 연예 기사에 흔히 등장하는 “마흔에도 불구하고”라는 식의 수식이 그 예다. 김혜수,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이 있는 배우이지만 기자들은 무례하게도 그의 나이와 함께 “~세 동안”, “~세 중 바가지 머리가 제일 잘 어울려”라는 제목의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나이’, ‘관계’가 TV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나이를 따져 호칭을 정하는 게 사적인 영역에서야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나이’가 개입되면 말이 달라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디어는 그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어 보인다.
과거 예능프로그램 출연자들은 서로 “~씨”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적어도 ‘선후배’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가 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MBC <무한도전>에서 동생 그룹이 “재석이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KBS <1박 2일>, SBS <런닝맨>도 마찬가지다. ‘리얼’이라는 이름 아래 연예인들 간의 ‘사적인 관계’들이 TV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 자연스러움(?)은 ‘관찰 예능’ 뿐 아니라 스튜디오 물로 이어졌다. “오빠”, “형님”이라는 호칭들이 예능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시대. 그리고 후배가 선배한테 “~씨”라고 부르면 그다음 날 여론의 표적이 되는 시대가 됐다.
시대의 흐름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다만, 최소한 선을 지켜야 한다. 실제 ‘나이’에 다른 고정관념과 차별이 TV 속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지난해 <2020 KBS가요대축제>에서는 ‘막내즈’라는 이름으로 공연이 펼쳐졌다. 걸그룹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멤버(오마이걸 아린, (여자)아이들 슈화, 아이즈원 장원영, 있지 유나)들이 모여 선배 그룹인 에이핑크의 노래 ‘몰라요(2011년 4월 발표곡)’를 커버한 무대였다. 분명히 새로운 조합이었고 무대도 훌륭했다. 하지만 불편함도 있었다. ‘막내=상큼’이라는 나이를 중심으로 하는 고정관념에 따른 기획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막내즈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MC들은 “언니들한테 사랑받는 꿀팁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쏟기도 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의 시선이 아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아랫사람’으로 봤다는 말이다.
이런 시각은 지난 2020도쿄올림픽 중계와 보도에서도 이어졌다. 양궁 종목에 출전한 안산·김제덕 선수 등은 “막내”라고 불렸다. 국가대표라는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나이가 우선시된 호칭이었다. 선수들이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흘린 노력을 깎아내리는 일이지 않을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가 무슨 벼슬인가, 그런 시대는 지났다’라는 말들이 유행처럼 번졌지만, 한국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연장자에 대한 ‘존중’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다. 나이를 떠나 모두 존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는 여전히 우리에게 ‘나이’로 관계 짓기를 강요한다. 이런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영국 잡지 ‘올디(Oldie)’가 선정하는 ‘올해의 노인상’ 수상을 거절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배우자. 나이? 그게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