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진보는 90년대 중후반 만델라와 노동자가 공동 집권한 남아공 모델과 브라질 룰라의 노동자당에 주목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을 전후해 이런 움직임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다 진보의 눈길이 베네수엘라로 쏠린 건 2006년 KBS 이강택 PD가 만든 ‘차베스의 도전’이 큰 계기가 됐다. KBS는 당시 차베스 앞에 열광하는 베네수엘라 민중을 보여줬지만, 그것이 ‘민중’인지 ‘군중’인지는 정확히 따져 보지 않았다.
조돈문 교수는 베네수엘라를 올바로 보려고 현지로 날아가 1년 반을 지내며 조사한 끝에 2013년 5월 ‘베네수엘라의 실험’이란 연구서를 썼다. 조 교수의 이런 집요한 연구 방법론 덕분에 우리는 국뽕에 취한 듯 바라보던 베네수엘라를 비로소 다양한 시선으로 보게 됐다.
조 교수는 이 책 서문에 “베네수엘라 사람의 절대다수가 자본주의 체제를 바람직한 사회경제체제로 여긴다. 이는 차베스 지지자들도 다르지 않다. 차베스 정권이 변혁정책들을 추진하면 친차베스 진영은 상당 부분 이탈하고 위축되는 반면, 반차베스 진영은 더 결집해 저항의 강도를 높인다. 이것이 베네수엘라의 딜레마다”라고 썼다. 이 짧은 몇 문장만 봐도 베네수엘라는 간단치 않은 나라다.
2013년 3월, 15년가량 집권했던 차베스가 암으로 죽자, 차베스 없는 차베스 정권을 이어받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연일 반정부 시위에 포위된 채 위태롭게 서 있다.
베네수엘라 민중은 2차 대전 이후 10여 년 군부독재에 저항하다가 1958년 1월 히메네스 장군을 축출했다. 이렇게 제4공화국을 열었다. 제4공화국 정치권력은 민주행동당(AD)과 사회기독당(Copei) 중심의 정당 엘리트가 모두 앗아갔다. 두 당이 번갈아 집권하며 권력을 분점해 안정을 이루는 듯했다. 오늘날 한국 대선에서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아귀다툼하는 모양새와 닮았다.
베네수엘라 제4공화국은 지나친 석유 의존 때문에 위기를 자초했다. 80~90년대 베네수엘라 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거세게 추진했다. 급기야 석유산업 민영화도 추진했다. 1인당 소득은 1979년과 1999년 사이 27%나 떨어졌고, 빈곤층은 같은 기간 두 배 이상 늘었다. 사회양극화는 노동계급 안에서도 일어났다. 안정적 정규직과 비공식 부문의 하층 노동자로 나뉘었다. 정규직은 노동계급 내 특권층이 돼 지배 권력과 결합했다.
1989년 2월 27일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차베스는 1992년 2월 4일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불발에 그치고 도망갔다. 돌아온 차베스는 1998년 12월 선거로 대통령이 됐다. 집권 초기 차베스는 경제정책에선 제4공화국의 신자유주의를 계승했다. 재무장관을 제4공화국 사람으로 그대로 임명하고 경제부처 장관들도 대체로 경제계가 수용하기 좋은 사람들로 구성했다.
그러다 차베스는 2001년 11월, 49개 특별법을 제정하고 석유산업 등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2004년 국민소환 투표에서 차베스는 59%로 재신임을 받았다. 차베스는 2005년 1월 5차 세계사회포럼에서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을 선언했다. 2006년 12월 대선에서 이긴 뒤엔 사회주의 색체를 심화했다. 20세기 국가사회주의와 달리 인민의 주체적 참여에 기초한 새 사회주의를 선언했지만 세부내용은 부족했다. 차베스는 이들 중하층을 단순히 수동적 복지수혜자가 아닌 참여 민주주의의 핵심 주체로 키우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엔 실패했다.
2013년 3월 5일 차베스가 죽고 그해 4월 14일 대선에서 부통령 마두로가 차베스 없는 차베스 정권의 수장이 됐다. 그러나 마두로는 50.78%를 득표해 48.95%을 얻은 까브릴레스에 1.83% 차이로 힘겹게 이겼다. 표차는 27만 표에 불과했다.
마두로 정부는 부패와 권력욕에 찌든 ‘볼리 부르게사’(볼리바르 부르주아)로 조롱거리가 됐다. 마두로는 이들을 통제할 역량도, 통제할 의사도 없다. 마두로는 2018년 재선에 성공하면서 더욱 썩어갔다. 마두로 정부가 국제 무기거래상을 통해 한국 방산업체 최루탄을 수입한 시점은 재선에 성공한 직후인 2018년 6월이다. 노동진영에선 썩은 협조주의 지도부와 현장 노동자의 괴리는 더 커졌다.
베네수엘라에 최루탄 불법 수출한 방산업체
▲ 서울신문 11월 3일 9면. |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2일 베네수엘라에 최루탄 30만 점을 연막탄이라고 속여서 수출한 방산업체 장모(54) 대표에게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벌금 34억 원을 때렸다. 장 대표는 2018년 6월께 무기중개상을 통해 베네수엘라에 최루탄 30만 점을 61억 원에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수출을 불허하자 장 대표는 허가가 필요 없는 연막탄이라고 속여서 수출했다. 판매대금은 해외에 만든 페이퍼컴퍼니로 받았다.
법원은 “최루탄이 민간인을 탄압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있고 수출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이 비난받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해 죄가 무겁다”고 지적했다.(서울신문 11월 3일 9면, ‘베네수엘라에 최루탄 위장 수출 방산업체 대표 1심서 실형 선고’)
‘노동’ 없는 차베스 정권의 취약함
2000년대 중반 차베스 집권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자본가 단체와 정규직 중심의 노총(CTV)은 반차베스 진영의 선두에 서서 총파업과 직장폐쇄로 차베스에 맞섰다. 갈등 속에서 차베스도 점차 이성을 잃어갔다. 차베스는 끈기 있게 중하층을 주체로 세우기보다 개인 인기에 과도하게 의존해 절대적 권위를 행사했다. 친차베스 정당인 베네수엘라통합사회당(PSUV)은 사실상 대중적 기반이 없었다. 친차베스 진영의 하향식 사업방식도 문제였다.
국유화된 기업을 정부와 노동자가 공동경영하는 실험은 21세기 사회주의의 차별성을 잘 보여주지만 한계도 분명했다. 공동경영 전환 기업들도 진정한 공동경영을 실천하는 사례는 흔치 않았다. 일부 공동경영 기업은 차베스 정부가 임명한 경영진이 전권을 휘둘러 사기업의 지배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09년 이후 차베스가 정치 안정을 확보하며 변혁정책을 추진한 배경엔 ‘기권 운동’을 벌인 야당의 전략적 오류에 크게 기인한다. 두 번째 배경은 군부의 확고한 지지다. 2002년 4월 쿠데타 실패로 군부 내 반차베스 인사들이 축출됐고, 차베스 스스로 군부 출신이라 공식 라인 외에도 비공식 군부 지휘라인을 갖고 있다. 세 번째 배경은 막대한 석유 수입이었다.
베네수엘라 변혁실험에서 가장 큰 맹점은 ‘노동계급의 실종’이었다. 차베스 정권이 의사 코포라티즘을 구축했지만, 노동자 계급성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차베스 스스로도 베네수엘라 같은 혁명 국면에서 노동조합은 사라져야 할 불필요한 존재라고 단언하며 노조의 자율성을 반혁명적 ‘독극물’로 매도했다. 차베스는 친노동 성격을 유지했지만 계급성을 가진 노동자를 제외하고, 협조주의에 젖은 하위 파트너로만 노동을 포섭하는 통제방식을 관철했다.
노동계급 형성에 기초하지 않은 차베스 정권의 변혁 실험은 자기 성찰과 자기 정화의 능력을 결여해 체제 이행 프로젝트의 역동성을 잃었고 스스로 전략적 오류를 수정하고 극복할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반인권범죄로 조사 받는 마두로 정권
영국 로이터 통신이 지난 3일 국제형사재판소가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부의 반인권 범죄를 정식 수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2017년 4월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베네수엘라 정부가 경찰특공대를 동원해 무력 진압하면서 시민 등 135명이 숨지고 1000명 넘는 사람이 체포‧구금됐다고 밝혔다. 이에 마두로 정부는 “국제형사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반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베네수엘라 야당은 환호했다.
▲ 조선일보 11월 6일 13면. |
마두로 정권이 수천 명 규모의 반정부 시위에도 경찰특공대를 동원할 만큼 권력 기반이 취약하다는 걸 반증하는 사건이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정식 수사에도 마두로 정권은 과거 차베스처럼 미 제국주의자들의 음모라고 정면 대결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최근 마두로 정부는 차베스 정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부패했다. 마두로는 올 초 바이든 미국 정부가 등장하자 미국의 환심을 사려고 공을 들였다.(조선일보 6월 4일 2면) 야당과 회담을 재개해 정상 국가임을 보여주려고 했다.
▲ 조선일보 6월 4일 2면. |
마두로 정권은 미국의 경제 제재 축소와 자산 동결 해제를 위해 비둘기 정책을 내놨지만, 미국은 쉽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 경제가 폭망한 베네수엘라는 이제 미 제국주의 탓으로만 돌리 어려울 만큼 망가졌다.
한 장에 ‘1천만 볼리바르’ 지폐까지 고려
베네수엘라는 2년 전 화폐개혁을 단행해 ‘10만 볼리바르’짜리 고액권을 발행했지만, 우리 돈으로 고작 270원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최근엔 ‘1000만 볼리바르’짜리 고액권 발행도 검토 중이다. 한겨레는 지난해 10월 7일 14면에 이 같은 블룸버그 보도 인용했다.
▲ 한겨레 2020년 10월 7일 14면. |
물가 통제에 실패한 베네수엘라는 1년에 2400%, 즉 24배나 물가가 폭등하고 있다. 시장에 장 보러 가려면 현금을 가방 가득 챙겨 가야 할 처지다. 시장에선 자국의 볼리바르 화폐보다는 미국 달러화 거래가 더 많다.
상황이 이런데도 마두로 주변엔 아직도 죽은 차베스의 발암 자체가 미국의 음모라고 믿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서로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국민의힘과 민주당 대선 후보를 보면서 오늘의 베네수엘라를 만든 제4공화국 지배집단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