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 참세상

좌파의 시계는 멈춰 서 있다: 민중경선의 ‘바다’에 진보–좌파의 ‘그물’을 던지자

[서평] <2022년 대통령 선거와 진보–좌파 정치>. 해방터, 2021.

메뉴보기: 클릭하세요. V

『2022년 대통령 선거와 진보–좌파 정치』(2021, 해방터)가 나왔다. 고민택 등 4인의 여러 정세에 대한 고민이 담긴 책이다. 특히나, 채 일 년도 남지 않은 내년 대선에 대한 ‘진보–좌파’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 필자들은 말 그대로 용을 쓰며 고투하고 있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을 보다 보니 영화 <인 타임>(In Time)이 떠올랐다. 손목에 그려진 시간이 다 되면 죽기 때문에 살고자 시간 전당포에 가서 시간을 빌리는 장면처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진보- 좌파’의 운명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손목 시간과도 같다. 필자들은 ‘지금은 좌파의 시간이다. 충분히 좌파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반드시 좌파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진정 어린 목소리로 역설하고 있다. 좌파에게는 내년 대선이 절체절명의 운명을 가를 분수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편 동화 <모모>의 내용을 민주당의 시간을 훔쳐서라도 ‘진보–좌파’에게 주고, 시간 전당포에 사서 몇 백만 몇 천만 시간을 빌려서라도 꿔주고 싶다. 하지만, 필자들은 ‘진보–좌파’의 현실에 대하여 지극히 암울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2002년 대선을 앞둔 ‘진보–좌파’ 내부의 태세는 역대 최악이다(42쪽). 어느 정파, 누구 하나 나서서 이 어려운 상태를 타개하려 하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다. 대부분 과거에 발목 잡혀 있고, 현재를 낙담하고 있으며, 미래를 방치하고 있다(43쪽). 내년 대선 판세와 구도가 요동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진보–좌파’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좌파 전체는 최악을 맞고 있다. 갈수록 세력이 약화되는 현실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45쪽).


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 정도로 정세를 판단하고 있다면, 필자들은 모두 프로메테우스들인 셈이다. 하지만 미리 알고 먼저 생각하는 프로메테우스일지라도 다 더해도 몇 평 되지 않을 ‘진보–좌파’들이 단 몇 평도 되지 않는 땅을 움켜쥐고 자신들의 조직 확장이나 꾀하는 ‘진보-좌파’의 현실에서 전체 (계급) 정치지형의 변화를 기대하고 보수–중도–진보의 정치지형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좌파’는 그렇다 치고 ‘좌파’의 경우 참으로 땅 몇 뙈기조차 경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슨 일말의 변화라도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2022년 대선에서는 누가 정권을 잡든 어쩌면 ‘진보-좌파’의 급격한 정치적 후퇴를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고 필자들이 가슴 절절하게 이야기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 ‘위기감’이 현실이 되어 버린다면 어쩌겠는가? ‘진보–좌파’의 무풍지대에서 노동자계급은 정치검찰 윤석열의 막돼먹은 말처럼 매주 120시간 노동을 해야 하고, 친일파 자손 최재형의 말처럼 최저임금은 너무 높아 다시 내리 곤두박질 칠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자본가들의 수출은 역대 최고를 기록하는 마당인데, 양당 거대 독점 시스템 하에서 거추장스러운 ‘진보–좌파’가 소멸했으니 얼마나 속 시원하겠는가 말이다. 코로나 핑계로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한층 더 강화될 것이 불 보듯 뻔하게 보이는데, 그럼 ‘진보–좌파’, 정의당과 진보당, 그리고 좌파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필자들은 계급 전체의 이익, ‘진보–좌파’ 전체의 정치력 강화라는 토대 위에서,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 제 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주장하고 이를 위해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선거인단으로 하는 2022년 대선 공동대응, 민중 경선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제조건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난 20년 동안 이루어진 ‘진보–좌파’의 정치적 퇴행성 행적에 대한 발본적인 반성과 실천이 앞서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좌파’는 자유주의 세력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해야 한다. 민주대연합이니, 진보대통합이니 하면서 민주노총으로부터 ‘배타적지지’를 받으려고 하거나 특정 정파를 위한 행동을 지속한다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새로운’ 변화를 할 수 없을뿐더러 ‘진보–좌파’ 운동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락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필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에 ‘새로운’, ‘제 2의’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제도정치 안에서 이재명이든 누군가가 대선 가능성이 있으면, 또 다시 민주 대연합을 할 것인가 말이다. 최근 민주당에 대한 불신이 감지되고 민주당이 보수화하는 마당에, ‘진보–좌파’는 자신들의 정책이나 비전으로 보수–중도-진보의 정치지형을 만들어도 시원찮음에도 불구하고, 근본 없는 정치인들이 나서서 공정과 정의를 외치는 판에, 다시 또 진보대통합, 민주대연합의 담론을 기치로 내세울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이 같은 행동은 이참에 ‘진보–좌파’의 싹을 말려버리는 결과로 귀착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연합이 아니라 담합이고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한 배신일 따름이다.

두 번째, 필자들이 ‘진보 좌파 제 정파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며, 나아가 대립 지점도 있다. 그러나 최악은 지금 상태로 그냥 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현재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채 각개 흩어져 있는 좌파는, 어떤 정파도 독자로는 전체 (계급)정치지형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을뿐더러, ‘진보–좌파’ 내에서도 독자적인 변수가 될 수 없다. ‘좌파’가 처한 현재 상태로는 대중을 향한 직접 정치를 할 수 없고 대중 속에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도 없다. ‘좌파’의 힘을 다 합해도 독자적인 정치 세력이 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닌(44쪽)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좌파의 제 정파들은 연합 위에서 연대를 모색하는 길밖에 없다. 좌파의 정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연합이므로 그 기초 위에서 변혁 이론과 전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대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진보세력과 연대하여 2022년 대선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

진보당이 민주노총을 플랫폼으로 하는 선거인단을 통한 경선으로 ‘진보–좌파’ 대선 단일후보 선출하자는 대의에 공감을 하더라도 고민이 깊을 수 있다. 정의당과 ‘좌파’가 이를 받아들일지가 미지수인 상태에서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반대로 모두가 동의한다고 할 경우에는 경선에서 자신의 후보가 단일후보로 선출될 수 있을 것인가가 또한 미지수라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42쪽)

나는 소련 사회를 사회주의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였다고 보는 입장이고1) 후진국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러시아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СССР)을 수립했을 때, 레닌은, 나라 이름에 있는 ‘사회주의’라는 말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며, 러시아에 사회시스템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생겨났다는 등의 환상은, 추호도 나타낸 바가 없었다.

반제국주의 관점에서 국가보안법 철폐에 동의하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에 동의하는 입장이 아니지만, 민중 경선에서 어느 정파의 후보가 단일 후보가 되든 거기에 따르고 지원할 용의가 있다. 변혁 이론과 전략의 차이만 움켜쥐고 있기에는, ‘진보-좌파’의 입지가 공멸을 불러올 정도로 현재 너무나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진보’와 ‘좌파’를 분리하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다. 해서, ‘진보–좌파’라 말하는 것이고 ‘진보’와 ‘좌파’를 절합(切合)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변혁 이론과 전략에서는 ‘절’이지만(이라 하더라도), 대선 공동대응 차원에서 ‘합’의 자세를 취하자는 것이다. ‘진보–좌파’ 전체, 노동자 민중(인민) 전체를 위한 대의에 동의한다면 말이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후보를 단일후보로 선출하고자 볼썽사나운 예전의 정치공학이나 행동까지 용인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보수–중도–진보의 정치지형을 넘어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 사이의 대립구도,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를 만드는 길은 장기적인 플랜을 요구한다. 그 사이에는 멀고도 먼 길이 놓여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노동과 자본의 대립 구도 형성은커녕 보수–중도–진보의 정치지형을 다시 회복하는 길도 만만치 않다. 2022년 대선에서 그 회복에서마저도 1%의 가능성을 찾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는 보수우익이 판치는 세상이 될 공산이 크고 노동자계급의 고통은 더더욱 가중될 것이다.

필자들이 제안하는 2022년 대선 공동대응은, 그저 선거철이 돌아오고 그 정치 스케줄에 따라 그저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진보든 좌파든 지난 20년 동안의 행적을 통렬히 비판한 토대 위에서 제 3의 길이 아니라 진정으로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필자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진보와 좌파의 변증법’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좌파’로부터 자유로워진 ‘진보’는 ‘민주대연합’, ‘야권연대’에 의존하는 정치로 내달렸으며, ‘진보’를 놓아버린 ‘좌파’는 현장투쟁, 노동조합투쟁으로 ‘좌파정치’를 대신했다. ‘진보’는 너무나 일찍 계급 형성과 계급투쟁을 저버렸으며, ‘좌파’는 제도정치에의 진출을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49쪽)

이러한 지적을 거꾸로 읽으면, 진보와 좌파는 ‘진보–좌파’로 다시 묶여야,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절합해야 한다는 얘기가 되고, 진보와 좌파는 공통적으로 이전의 행태를 완전히 뒤집어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또 다시 어떤 것이든 과거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과거 반복은 ‘진보–좌파’가 과거에 발목 잡혀 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 계급투쟁만 주야장천 외치고 있을 수도 없다. 일반시민은 물론이고 노동자대중마저 ‘좌파’라는 단어를 어렴풋이 꿈결에 들은 정도이거나(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한 폄훼는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계급’장마저 뗀 상태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과연 계급투쟁적으로 행사되어 왔는가도 의문인 상태에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진보-좌파’ 및 진보와 좌파의 현재적 입지 사이에는 도저히 메우려고 해야 메울 수 없을 듯한 천양지차의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계급, 계급투쟁, 사회주의정당 건설 담론을 저버리라는 얘기는 단연코 아니다. 최근 강원도 원주 투쟁처럼 그 어떤 것이든 현장 투쟁은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좌파는 당연하고 진보의 존재감마저 사라질 판국에, 좌파나 마르크스라는 단어의 ‘화석화’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는 마당에(그리고 엉뚱하게 레드 콤플렉스가 오락실 앞 고슴도치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와 민주당이 ‘좌파’로 언론플레이 당하는 마당에), 현실 정치에 ‘진보–좌파’가 개입해야 필요성은 여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소위 민주개혁 세력들은 시민을 중심으로 검찰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을 이야기한다. 시민들에게는 노동문제가 개혁의 대상일 뿐이고, 노동개혁도 개악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논의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다가 다시 촛불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하는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다. 박근혜–최순실 쌍이 윤석열–김건희 쌍과 오버랩되면서 민주개혁 진영의 촛불이 다시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이 책의 필자 중 한 사람인 고민택도 다른 정치적 맥락에서 ‘2022년 대선에서 현 집권 세력 역시 다시 한 번 촛불을 불러낼 가능성이 있다’(74쪽)고 진단한다. 지난 4.7 보궐선거 패배, 촛불의 배신, 촛불정부의 시효 만료, 민주당에 대한 불신 등 현 자유주의 세력은 올 하반기나 연말에 이루어질 코로나의 집단면역 운운하며 지난 조국 사태로 인한 검찰청 앞의 촛불을 기억하고 연말 연초에 촛불을 소환하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비하여, 촛불이 들불로, 윤석열의 세 치 혀로 떠든 ‘민란’ 수준은 아닐지라도, 촛불 정세에 개입할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촛불의 자발성은 지난 촛불운동에서 현실로 나타났지만 지도력의 부재 등 촛불의 한계 또한 현실이었고 ‘진보–좌파’가 ‘박근혜퇴진 비상 국민행동’ 안에서 민주당을 뒤에 둔 시민단체(광의의 자유주의 세력)에게 사실상 정치적 헤게모니를 빼앗긴 과거 또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책의 저자들이 제안하는 것은 촛불과의 소통이고 ‘큰 틀에서 연대연합한 공동의 정치세력으로서 다가가자’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내걸었던 온갖 공약들이 모두 한갓 쇼였음이 드러난 지금, 여권이고 야권이고 간에 댓글부대 망령, 윤석열 청부 고발 사건 등 대선을 위한 경선 여기저기서 마찰음이 들리는 지금, 계급적 불평등의 골이 더욱 깊어진 지금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가 과거의 때를 다 벗기고 ‘새롭게’, ‘제 2의 출발’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진보–좌파’가 연대(연대연합이 아니라)를 통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하나의 대안세력으로 등장하지 못한다면, 좌파활동가 모임 간에 중층적인 갈등만 드러난다면, ‘진보–좌파’가 촛불과 소통할 수 없다. ‘진보’와 ‘좌파’ 사이에도, ‘좌파’ 사이에도 암묵적인 갈등 요인이 잠복해 있는 것처럼 ‘진보–좌파’와 촛불 사이에도, 좌파가 촛불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선 긋기와 갈등 및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해소되고, 어떤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으며, 해소 가능한지 ‘진보–좌파’는 고민해야 한다. ‘반–이재명 전선’ 하나 구축하지 못하고 또 다시 촛불에 권력을 빼앗기고 말 것인가 말이다. ‘진보–좌파’는 노동문제 이슈에 집중하고, 촛불은 노동문제 바깥의 이슈를 중심으로 하는 전선 형성을 특징으로 한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서야 한다.

촛불의 이슈와 ‘진보–좌파’의 이슈를 합치면 결국 상부구조와 토대의 이슈를 포괄하는 한국사회구성체의 이슈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검찰개혁 등의 촛불의 이슈가 ‘진보–좌파’에게 금기어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만시지탄이지만, 재난지원금, 아파트 폭등 등의 이슈에 ‘진보–좌파’가 선제적이고 선도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것은 실책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통제가 인민의 생명과 생존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자본의 이윤 저하를 저지하기 위한 목표 아래 이루어지고’(87쪽) 있지만, ‘진보–좌파’는 코로나19 담론에도, ‘손실을 사회화’하는 현실, 그것도 자영업자의 손해를 수출 호조를 보이는 자본가가 아니라 국민 세금으로만 충당하는 데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자본의 세계화와 국가의 방역 하에 이익을 보는 자본가계급에 대한 선전 선동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난감하다. 노동자가, 자본가가 전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닌 지위로 전락한 지금, ‘좌파’라는 단어가 듣보잡 언어로 전락한 지금, ‘진보–좌파’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책의 필자들이 주장하듯 과연 지금이 좌파의 시간인가? 좌파의 시간은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 앞에서 자본가들은, 자본과 권력은 대동단결하고 있는데, 우리는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이라는 숲은 보지 않고 정파(당)의 이익이라는 나무만 바라보고 있다. 굼뜬 것인지, 자포자기인 것인지, 좌파의 시계는 지금 멈춰 서 있다. 누가 시계추를 다시 돌려 시계가 가게 만들 것인가. 시계밥을 누가 줄 것인가. 코로나가 로컬, 내셔널, 글로벌 차원에서 시공간을 폐색시킨 지금 ‘진보–좌파’마저 폐쇄공포증을 떨쳐내지 않을 것인가.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 선수들도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보자’라고 했다. ‘진보–좌파’도 한 번만 더 해보자. 과거의 온갖 정치적 행태를 발본색원한 토대 위에서, 책의 필자들이 제안하는 대로, 민주노총 직선 3기 지도부 선거에서 제기된 바 있는 민중경선을, 제대로 한 번 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같이 해보자.

<각주>
1) 후진국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러시아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СССР)을 수립했을 때, 레닌은, 나라 이름에 있는 ‘사회주의’라는 말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며, 러시아에 사회시스템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생겨났다는 등의 환상은, 추호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며, 러시아에 사회시스템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생겨났다는 등의 환상은, 추호도 나타낸 바가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