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2월, 동학농민군 3만여 명이 전남 장흥에 집결했다. 우금치 패전 후 쫓기던 동학농민군이 최후의 저항선을 설치한 곳이다. 이것이 마지막 전투였다. 황룡촌 전투의 승리의 주역이었던 이방언의 지휘하에 12월 4일 벽사역을 점령하고 5일에는 장흥부성을 점령했다. 그 기세로 강진현과 강진병영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했다. 이를 계기로 농민군은 다시 일어서는 전기를 맞는 듯했다.
농민군이 장흥부를 공격할 당시 말을 타고 진두지휘하던 여성 지도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소사(李召史)다. 이소사는 동문 쪽 농민군을 이끌었는데, 다른 곳보다 사기가 매우 높았다. 이소사가 이끄는 농민군의 거대한 함성은 성벽을 무너뜨릴 기세였다. 뒤이어 꽹과리, 북, 징 소리가 높아지고 또 그 소리를 받아 농민군의 함성은 더욱 높아졌다. 장흥부사 박헌양을 사로잡아 목을 쳤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박홍규 화백의 이소사 목판화 [출처: https://nongmin.tistory.com/1372] |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했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며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신녀(神女)가 되었다.”
당시 일본에서 발행되던 〈국민신문(國民新聞)〉 1895년 3월 5일 자 기사다. 이소사의 탁월한 지도력과 대중적 지지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용맹함과 당찬 기상, 뛰어난 직관력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몸이 날렵하고 목소리가 청아하여 사람을 모으는 재주가 있으며, 말을 잘 다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군이 관군과 합류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14일부터 일전을 벌인 석대들 전투는 장렬했지만 처참했다. 농민군의 죽창과 몽둥이, 저급한 조총으로는 신식훈련과 기관포로 무장한 토벌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석대들 전투에서 양측 사망자가 2천여 명이나 발생하면서 장흥과 강진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해산했다.
관군 기록에 따르면 이소사는 1894년 음력 12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치러진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뒤 피신해 있다가 같은 달 27일쯤 소모관 백낙중 진영에 체포된다. 나주감옥으로 이송된 후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거괴 체포자(이소사)를 나주로 호송할 수 있냐고 했는데, 이 역시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백성이 처형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령이 오고 있을 때는 민인이 체포하여 바친 여동학 1명을 소모관 백낙중(白樂中)이 받았습니다. 소모관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돼 있었으며 교령을 받았을 때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입니다. 조금 늦추는 것을 용인하여 이에 안정되면 여동학을 본부로 압송하겠습니다”
관군의 우선봉장인 이두황이 작성한 4권짜리 군영일기 〈우선봉일기(右先鋒日記)〉에 나오는 기록이다. 1895년 1월 1일 이두황이 일본군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미나미가 12월 27일 이두황에게 ‘이소사를 나주로 압송하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두황은 마음을 바꿔 이소사를 당일 오후 나주로 압송해 조사받도록 한다. 미나미의 명령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소사는 장흥에서 너무 심한 고문을 당해 몸이 심하게 망가져서 나주 일본군 진영에서도 조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토벌군은 농민군이 체포되면 주요 지휘관 외에는 2~3일 안에 즉결처분했다. 하지만 이소사에 대해서만은 체포 후 7~8일 동안 극렬한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고, 일본군은 조선군에 압송을 거듭 지시했다. 당시 장흥 전투에는 이방언 대접주를 비롯해 이인화, 이사경, 구교철, 김학삼 접주 등이 있었지만 토벌군은 유독 이소사에 집착했다.
일본군은 이소사의 남편을 찾아 간호하도록 해 이소사의 몸이 어느 정도 나아지면 조사를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남편 김양문이 이소사를 찾아왔다는 기록은 없다. 그녀의 최후에 대한 기록도 없다. 일본 신문에도 이소사의 전투기록은 실려 있지만, 체포 이후 상황에 대한 후속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獄死)했던지, 아니면 형장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발통문(격문) [출처: 위키피디아] |
이소사(1874?-1895)는 동학농민군의 유일한 여전사로 알려진 실존 인물이지만 그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많지 않다. 남아있는 기록마저 정확하지도, 소상하지도 않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배려로 신이한 재능을 키우며 성장했고, 동학을 공부하고부터 더욱 출중한 능력으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한, 이방언 대접주 등을 도우면서 호남의 서남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에 서게 됐다.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국적인 봉기지만, 발굴해야 할 인물과 기록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여전사가 이소사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양성평등을 중요한 사상 중 하나로 내걸었지만, 혁명에 참여한 수많은 여성은 익명으로 은폐된 채 역사는 흘러왔다. 그리고 역사의 주변에 머물러 있다. 이젠 역사에서 삭제된 삶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그 중심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이다.
이소사는 그의 이름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조차 모른다. ‘소사’는 이름이 아니며 지금의 ‘여사’ 또는 ‘씨(氏)’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결혼을 했거나 그 정도의 나이가 된 여성을 부르던 호칭이라고 한다. 남편을 잃은 여성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라고도 한다. 이름부터 되찾자.
[참고문헌]
· 곽병찬, “[곽병찬의 향원익청] 여자 동학농민군 ‘거괴’ 이소사의 꿈”, 〈한겨레〉, 2016.12.7
· 명금혜정, 《깊은 강은 소리없이 흐르고-장흥 편(개정판)》, 모시는사람들, 2021
· 문충선·박정민·박홍규·박형모·윤정현·이미옥, 《1894 석대들》, 장흥문화공작소, 2021
· 정대하, “말 타고 장흥 석대들 전투 지휘…동학혁명 여성 선봉장 이소사”, 〈한겨레〉, 2021.3.8
· 최혁, “[전라도의 혼] 불세출의 항일여걸 장흥 여인 이소사”, 〈Ai타임스〉, 2020.7.31
· 최혁, 《전/남/여/성/생/애/사-갑오甲午의 여인, 이소사李召史》, 전남여성플라자,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