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건국 신화에서 여성의 역할은 배제돼 있다. 고구려 건국 신화의 핵심인 소서노(召西弩)가 대표적이다. 소서노는 2006~2007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주몽〉을 계기로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앞서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백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소서노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졌지만,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당시만 해도 매우 생소하고 낯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라마 〈주몽〉을 통해 잊혔던 소서노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현재 소서노에 대한 자료는 일부 기록에만 남아있다. 그마저도 단편적이며 매우 미흡한 수준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가장 대표적인 사료다. 하지만 유교적 관점과 남성 중심 사관으로 많은 내용이 배제돼 있다. 반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소서노를 ‘조선 역사상 유일한 창업 여대왕’ 이자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운 이’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소서노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건국을 주도한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여성이다.
[출처: http://egloos.zum.com/weismann/v/1301647] |
연합정권의 등장과 고구려
소서노(B.C. 66년-B.C. 6년)의 출생과 성장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알려진 것은 졸본부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토착 세력인 연타발의 딸로 태어난 것 정도다. 졸본부여는 계루부, 비류부, 연노부 등 5개 부족 연맹체이며, 소국들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다. 연타발이 졸본부여의 왕인지 상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계루부의 족장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정치·경제· 사회적으로 유력한 세력임은 틀림없다. 소서노는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서손(庶孫, 서자의 아들)인 우태와 결혼해 비류와 온조를 낳은 것으로 기록된다. 북부여는 만주 지역에서 영토도 넓고 역사도 깊은 강한 나라였다. 따라서 졸본부여가 북부여와의 혼인을 통한 정치적 연합으로 지배력을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서노는 남편 우태가 사망하자 미망인이 돼 본가가 있는 졸본으로 돌아왔다. 우태의 사망은 졸본부여에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혼인으로 형성된 정치적 연합이기 때문에 정치력 확장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졸본부여는 새로운 정치적 연합이 필요했다. 우태가 살아있을 때 소서노의 야망은 지대했으나 미망인으로서 사회적 지위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만난 인물이 주몽이다.
당시 주몽은 동부여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후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졸본으로 넘어온 신진세력이었다. 드라마에서 묘사 하는 것처럼 하늘의 아들이자 하백의 자손 이라고 떠벌리며 놀던 룸펜이나 한량이 아니었다. 주몽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비류수 일대를 거점으로 삼아 졸본 지역에서 정치세력화의 기반을 다졌다. 이 과정에서 ‘모둔곡(毛屯谷)’의 정치 세력 규합과 동부여에 남아있는 모친 유화의 물자 지원이 세력 확대의 원동력이 됐다. 주몽이 졸본부여에 정착하기까지 치열한 전투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서노 집단도 세력 확대를 위해 비류수 지역으로의 진출이 필요했기에 불가피하게 주몽 집단과 맞닥뜨리게 됐다. 소서노의 선택은 명료했다. 두 집단의 이해관계는 동일했고 정치적 연합은 필연적이었다. 이 연합이 소서노에게는 두 번째 정치적 연합이지만, 주몽에게는 고구려 건국의 원년이었다. 이때가 기원전 37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다.
이는 고구려 건국 시기를 주몽의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소서노의 관점에서 보면 주몽의 고구려 건국은 독자적인 국가건설이 아닌 토착 세력인 소서노 집단과 이주 세력인 주몽 집단이 공동으로 형성한 연합정권 형태의 이행기다. 그렇다면 기원전 37년은 소서노-주몽 연합정권의 성립 원년이 되는 것이다. 이들 연합정권은 졸본부여의 소국인 서부의 비류국을 정벌해 주도권을 확보했다. 또한 동부의 행인국을 정복하며 졸본부여 통합의 전반부를 완결했다. 그리고 북옥조를 정벌해 범 부여계 국가의 통일을 위한 대외정복의 초석을 다졌다. 이들 전쟁에서 소서노 집단은 승리의 주역이었다. 주몽 집단 못지않은 군사력으로 통합을 완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 연합정권은 주몽의 왕위 계승을 위한 유리(儒理) 집단의 이주로 19년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세는 매우 복잡했고 긴장감이 팽팽했다. 주몽은 매우 고민스러웠다. 정치적 동지이자 부부의 연을 맺은 소서노의 장자인 비류에게 왕위를 계승하자니 고구려가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결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서노와는 부부관계 이전에 정치적 동지로서의 관계가 우선이었다. 주몽의 입장에서 그녀와의 결별은 정치적인 독립체로서 고구려의 본격적인 성립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 결국,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곧이어 사망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대장정과 백제 건설
여기서 소서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왕의 자리를 놓고 유리와 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리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았기에 승리를 예측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또 다른 선택은 또다시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결국 소서노는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만주 지역에서 남쪽으로 대장정을 떠났다. 수십 일이 걸려 드디어 한강 변에 도착했다. 소서노가 보기에 강은 크고 산은 수려하며 넓은 평야도 있으니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의견이 엇갈리고 말았다. 큰아들 비류는 두고 온 고향으로의 귀향이나 교류, 또 경제적으로 소금생산과 같은 국제적 무역을 고려해 바다 쪽에 있는 미추홀(인천)로 떠났다. 소서노는 둘째 아들 온조와 함께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세우고 10명 신하의 보좌를 받아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나라의 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18년이었다.
그런데 비류 집단이 정착한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염도가 높아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마실 물이 부족했고 굶주리는 사람도 많아서 불평 불만이 많았다. 비류의 리더십은 땅에 떨어지고 권위는 점점 상실했다. 반면 소서노의 위례성 백성들은 모두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이에 비류의 백성들이 즐겁게 위례성으로 이주했으며, 소서노와 온조도 이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소서노는 십제와 미추홀을 통합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재위 13년에 사망했다.
〈참고문헌〉
1. 권도경, “고구려 신화의 성립과 소서노 배제의 정치사회학”, 『선도문화』 제9권(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0).
2. 김영순, “인물 콘텐츠 소서노 활용 공간 스토리텔링으로서 둘레길 개발 방안”, 『인물콘텐츠』 제46호(인문콘텐츠학회, 2017).
3. 연희원, “소서노(召西弩)와 그녀의 정치적 역할- 김부식의 역사철학에 대한 탈신비화(脫神秘化)”, 『한국여성철학』 제15권(한국여성철학회, 2011).
4. 차옥덕, “소서노에 대한 기본 자료 검토”, 『동아시아고대학』 제5권(동아시아고대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