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 국회와 청와대 앞에선 중대재해법 제정을 촉구하는 농성이 이어졌다. 지난 5일 거대 여야가 8일 본회의 처리에 합의하면서 내놓은 법안은 시민사회가 10만 명 입법청원 운동 끝에 제출한 법안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퇴색됐다. 누더기로 만들어 버렸다.
‘일터의 죽음’을 막으려 산재 유가족들이 단식하던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에 본 조선일보 8면엔 총리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망치를 들고 서 있었다. 사진 제목은 ‘규제 깨자, 망치 퍼포먼스’였다. 산재 유가족이 곡기를 끊고 버티던 그 시각 총리와 장관은 63빌딩에서 열린 ‘중소기업 규제 혁신대상 시상식’에 참석해 ‘규제의 벽’을 망치로 깨부수는 퍼포먼스를 했다. 사진은 조선일보 기자가 찍은 것도 아니다. 연합뉴스 사진을 가져다 썼다. 조선일보 입장에선 구미에 딱 맞는 사진이었다.
63빌딩에서 총리와 장관 망치 들고 사진
한쪽에선 억울한 죽음을 줄이려면 솜방망이 처벌을 멈추고 엄하게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총리와 장관은 반대편에 가서 그런 규제 다 깨부수자고 망치를 들었다. 하긴 중소기업부는 300인 미만 사업장 사용주까지 중대재해법 처벌을 유예해 달라고 국회에 의견을 냈다. 그런 장관이 서울시장 후보로도 거론되는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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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2월 24일 8면. |
총리와 장관이 바벨탑 같은 빌딩에서 기업주 살리는 규제 깨기 퍼포먼스 할 때 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는 최정우 포스코 회장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포스코에선 지난해 8명의 노동자가 숨졌고, 최근 3년간 17명이나 숨졌다. 주로 폭발, 화재, 추락사고였다. 같은 유형의 사고는 반복된다. 지난해 11월 24일 광양제철소 산소배관 사고는 2014년 7월 1일 일어난 3연주공장 산소배관 사고와 닮았다. 2014년 3명이나 숨지는 중대재해에도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다가 지난해 11월 다시 3명의 노동자(원청 1, 하청 2명)가 또 희생됐다.
어디 포스코 뿐인가. 노동자를 넘어 국민 모두에게 중대재해의 위험을 인식시킨 2016년 5월 구의역 김군 사고 이전에도 비슷한 스크린도어 수리 중 사망사고가 있었다. 2015년 강남역에선 조모 씨가 혼자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숨졌다. 2013년엔 성수역에서도 같은 사망사고가 있었다. 서울시는 2013년과 2015년 반복된 사고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세월만 보냈다. 세 개의 사고 모두 2011년 10월 당선된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 서울시장 때 일어났다. 변창흠 국토부장관 말처럼 “걔만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 아니라 언제라도 반복될 일이었다. 작업장 안전사고를 1도 모르는 작자가 말은 왜 그 따위로 하는지.
2013년 성수역 사고 때 처벌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5년 강남역 사고 땐 하청업체 대표만 벌금을 조금 냈다. 2016년 구의역 사고 때 원청인 서울메트로 대표는 벌금 1000만원에 그쳤다. 위험의 외주화와 솜방망이 처벌이 같은 유형의 사망 사고를 반복하는 주범이다. 그걸 고치자는데 이렇게 누더기로 만들어 버리는 민주당 정부는 너무도 자기계급의 이익에 충실하다.
제천 참사를 겪고도 ‘목욕탕’ 타령인가
총리와 장관이 규제 깨기 망치를 든 사진이 실린 날 조선일보 3면엔 ‘목욕탕 종업원이 넘어져 크게 다쳤을 때도 사업주 징역형?’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는 음식점과 목욕탕, 노래방, 고시원 등 다중이용업소를 중대재해법으로 처벌하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목욕탕 종업원이 넘어져 크게 다치는 가당찮은 사례를 만들어 냈다.
충북 제천 참사는 대부분 사우나에 목욕 갔던 시민이었다. 2017년 12월21일 불이 난 제천의 한 스포츠센터에서 29명의 안타까움 목숨이 사라졌다.
조선일보 말처럼 목욕탕 종업원이 넘어져 다쳤다고 곧바로 업주가 처벌 받는 것도 아니다. 업주의 중대한 고의가 있어야만 처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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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12월 24일 3면. |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윤을 내려고 외벽을 가연성 드라이비트로 마감하고, 불이 나면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필로티 건물도 불연 마감재를 쓰지 않아도 된다. 구멍 숭숭 뚫린 규제 완화에 수박 겉핥기처럼 이뤄지는 안전점검이 대형 사고를 확대 재생산 해왔다.
1999년 씨랜드, 2008년 이천 물류창고, 2015년 의정부 드라이비트 아파트, 2017년 제천 스포츠센터 참사가 이를 잘 증명한다. 제천 참사가 나고 한 달 뒤에도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에서도 불이 나 37명이나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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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18년 4월 4일 13면. |
조선일보가 한사코 중대재해법에 넣어선 안 된다는 다중이용시설이 얼마나 안전에 취약한지는 2018년 4월 정부의 안전대진단 결과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정부는 제천 참사를 계기로 전국 30여 만 곳에서 안전대진단을 벌여 법규를 위반한 447곳에 과태료를 부과했다. 이 가운데 찜질방이 96곳(21.5%)로 가장 많았다. 적발된 찜질방은 비상구 양옆에 짐과 쓰레기를 쌓아놓거나 화재경보기나 스프링클러를 일부러 꺼놓았다. 조선일보는 이에 격분해 2018년 4월 4일 13면에 ‘또 비상구 막고… 제천 교훈 귀막은 찜질방’이란 제목의 머리기사를 썼다.
당시 행정안정부는 전국 1415곳 찜질방 중 1341곳 찜질방을 점검했다. 사실상 전수조사였다. 점검한 찜질방 1341곳 중 515곳(38.4%)에서 지적사항이 발견됐다. 10곳 중 4곳이 안전을 무시한 채 영업 중이었다. 목욕탕과 찜질방 같은 다중이용시설을 중대재해법에서 빼야 한다는 건 이런 참사를 방치하자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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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2017년 12월 23일 3면. |
조선일보는 제천 참사 이틀 뒤인 2017년 12월 23일 3면에 ‘외할머니·엄마·딸… 3대 목숨 앗아갔다’는 제목으로 사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소개했다. 40대 여성은 수능을 친 딸과 친정 엄마까지 셋이 함께 스포츠센터에 있는 사우나에 갔다가 화를 입었다. 조선일보는 아내와 딸, 장모님까지 한꺼번에 잃은 남편에게 ‘다중이용시설은 중대재해 처벌 대상에서 빼자’고 말하는 거다. 참 잔인한 언론이다.